67화
아리스티네는 그 생각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캐묻는다고 해도 브로디가 허튼짓을 하도록 충동질했을 뿐, 자신은 관계없다고 할 게 분명했다.
소소하게 사고 칠 줄 알았지, 설마 메스를 찾아내 공격할 거 라고는 꿈도 못 꿨다는 식으로 말할 터.
‘그게 사실이라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죄송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지.’
그리고 진정으로 충실한 시녀라면 아리스티네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을 꾸미지 않았을 거다.
아리스티네는 손을 내려 로잘린의 머리를 쓸고 턱을 긁어 주 었다.
개를 귀여워하는 모양새에 로잘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 졌지만,그녀는 잠자코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조금만,조금만 참으면 돼.’
곧 있으면 이 수모를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다.
로잘린의 녹색 눈동자가 힐끗 아리스티네의 매끈한 얼굴을 훑었다.
‘저 얼굴이 너덜너덜해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가득하면 꽤 볼 만 할 것이다.
상흔이 안 남도록 신관이 신성력을 쏟아붓더라도, 낫는 과정까 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브로디 그년은 멍청해서 무방 비한 상대에게 칼침 하나 제대 로 놓지 못하고.’
겉으로 보기에 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인치고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못 먹고 자란 데다가 일반적인 활동도 못 하고 갇혀 살았기 때문에 뼈가 약하고 체력도 없었다.
브로디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다.
‘설마 타르칸 전하께서 나타날 줄이야.’
타이밍이 참 아까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로잘린은 속마음을 감추고 순종적으로 입을 열었다.
“브로디를 사냥했으니 이제 다른 시녀들도 사냥할 생각이에요.”
“그것참 믿음직스럽구나.”
아리스티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일부러 로잘린을 칭찬했다.
“넌 다른 시녀들과 달리 영특 하고 수완도 좋지.”
자신이 로잘린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다고 착각해서 방심하도록.
“그때 다른 누구도 아닌 로잘린,네가 기꺼이 날 따르겠다고 해서 참 기뻤단다.”
아리스티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보석함을 열었다.
남색 벨벳 위에 휘황찬란한 광 채를 뽐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망설임 없이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로잘린은 상황도 잊고 그 화려한 반짝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페어 드롭 모양의 다이아몬드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였고,넝쿨 모양 목걸이 전체에 물린 보조석도 전부 다 다이아몬드였다.
투명도도, 색도,광채도 모두 최상급인 다이아몬드.
모두 합치면 대체 몇 캐럿이 나올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메인으로 사용한 페어 드롭 다 이아몬드만 해도 수십억 에르는 할 것이다.
‘하물며 전체에 사용된 다이아 몬드와 화이트골드까지 합치면......!’
로잘린은 기절할 것 같았다.
“일어나렴,로잘린.”
로잘린은 홀린 둣 아리스티네 의 명에 따라 일어났다.
아리스티네는 손수 그녀의 목 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차가운 목걸이의 감촉에 로잘린이 움찔했다.
‘무거워……’
그 무게마저 황홀했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리스티네가 거울을 보여 주며 속삭였다.
로잘린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로잘린이 평생 꿈도 꾸지 못할 물 건이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중에도 이 정도의 목걸이는 없다.
“내 근심 하나를 없애 준 네게 보이는 작은 성의란다.”
“작은…… 성의?”
“그래,받아 주겠니?”
로잘린은 숨을 삼켰다.
‘받아 주겠냐니,받아 주겠냐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진심으로 아리스티네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발등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화,황송합니다,황녀 전하.”
로잘린이 무릎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져 로잘린의 온 신경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그렇지,목걸이에 어울리는 드 레스도 맞춰야 할 텐데.”
두근.
로잘린은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이 목걸이에 어울리는 드레스는 또 얼마나 값진 것일까.
그녀의 눈이 탐욕스레 아리스티네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훑었다.
아리스티네의 말이 뜻하는 바 는 명확했다.
‘나머지 시녀들을 다 처리하면.....’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걱정 마세요,황녀 전하. 제가 나머지 근심도 뿌리째 뽑아 드릴 테니까요.”
“역시 영특해서 내 뜻을 잘 읽는구나. 마음에 들어.”
아리스티네는 나른히 대답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사냥개는 본디 다른 개보다 충성심이 높고 영특해야 하거든 ”
그녀는 일부러 은근히 로잘린의 속을 긁었다.
처음부터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을 포섭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사람을 끼고 살 순 없지.’
과연 값비싼 장신구를 계속 준다고 오늘처럼 만족할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로잘린은 더 큰 것을 바라게 될 것이다.
‘애초에 지금도 내 자리를 탐내고 있고.’
그렇게 티를 풀풀 내면서 아리스티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스웠다.
지금 목걸이를 주며 칭찬한 것은 어디까지나 로잘린을 방심시 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거 때문에 한동안 내 말을 잘 들으면 처리하기 귀찮아지니까.’
시녀들을 처리할 때 로잘린까지 함께 보내려면 속을 긁어 두는 게 좋았다.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을 내려다 보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에 로잘린은 움찔하며 입 안의 연한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와중에도 다이아몬드 목걸 이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런 대단한 목걸이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을 인정해서 이 목걸이를 하사했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개 취급 하는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노래하듯 말했다.
“잘 어울리네,개목걸이.”
로잘린은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그녀는 구겨지는 얼굴을 펴고 최대한 순종적인 얼굴을 했다.
‘지금은 참지만 두고 봐. 그 자리에 앉게 되는 건 내가 될 테니.’
마침 잘됐다.
‘브로디 일로 나를 홀딱 믿게 되다니 너무 쉽잖아.’
아리스티네가 제아무리 똑똑한 척해 봤자다.
브로디는 싱긋 미소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봤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녀 전하의 사냥개니 그 자리에 걸맞게 노력하겠습니다.”
“좋아,믿고 있을게.”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어 말했다.
“그럼 이만 나가 봐. 나는 일하러 가 봐야겠으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가요? 전하의 몸이 상하실까 염려 됩니다.”
로잘린은 걱정하는 척하며 아리스티네를 떠보았다.
“그러게. 오늘도 밤늦게야 겨우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리스티네는 푹 한숨을 쉬고 목덜미를 꾹꾹 눌렀다.
힐끗 로잘린을 보자 그녀의 진 녹색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좋아,이걸로 더 날뛰겠는데?’
자신이 아리스티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로잘린은 은근한 어조로 타르칸에 대해 물었다.
“신혼인데 자꾸만 귀가가 늦어지면,타르칸 전하와의 관계도 조금 소원해지지 않을까요?”
“으음,조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로잘린은 혀로 입술을 할았다.
“그러면 안 되죠. 벌써부터 두 분 사이가 삐걱거리면 어떻게 해요.”
“나도 그게 걱정인데, 해결 방법이 없네.”
‘좋아!’
시무룩한 아리스티네의 반응에 로잘린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 것 같다고 애매하게 답하더니,삐걱거리고 있다는 내 말에 완전히 동의하잖아!’
떠보는 말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관계에 틈이 생긴 게 확실하다.
이건 자신에게 호조였다.
역시 겉모습만 볼만한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처럼 속까지 전부 귀족다 운 고귀한 레이디야말로 타르칸 에게 어울린다.
하긴,아리스티네는 고작 브로디 일 하나로 자신을 푹 믿을 정도로 인간관계를 모른다.
‘사람을 대하는 법 자체가 서투니 부부 사이에 관해서도 잘 알 리가 없지.’
로잘린이 붉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승리다.
왜냐하면 一.
‘나는 너보다 네 남편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
로잘린은 일전에 디오나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디오나…….〉
로잘린을 비롯한 시녀들은 몰래 타르칸을 유혹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디오나의 모습에 당황했다.
〈네,디오나라 불러 주세요, 실바누스의 시녀님들.〉
하지만 디오나는 그런 시녀들의 상태를 모르는 듯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 하는 건 지 못 들은 건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안심하면서도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데 디오나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무슨 이야기 중이셨어요?〉
시녀들이 담소를 나누기엔 너무 외진 곳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무슨 얘기를 하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지요.〉
시녀들은 애써 당당한 척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하지만 디오나는 기죽긴커녕 부드럽게 반박했다.
〈제가 어찌 상관하지 않겠어요.〉
디오나가 웃으며 시녀들을 바 라봤다.
〈타르칸 전하와 관련된 이야기 인데.〉
흠칫.
그 말에 시녀들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설마,다 들었나?’
디오나가 가서 쪼르르 아리스티네에게 일러바친다면…….
상상만으로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리스티네에게 자신들을 쫓아 낼 건수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쫓겨난다면,황제가 가 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실바누스로 돌아간 기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그들로서 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타르칸 전하께서 좋아하는 걸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시다니.〉
시녀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무마시킬지 고민하며 긴장한 채 디오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비전하의 시녀님들이세요.〉
활짝 웃은 디오나가 손력을 짝,치며 시녀들을 칭찬했다.
‘뭐지?’
순간적으로 디오나의 반응을 따라갈 수 없었다.
시녀들은 서 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사이에도 디오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비전하께서 신혼이라 고민이 많은 거죠? 아직 남편이 뭘 좋 아하는지 모르니까요.〉
시녀들은 옳다구나,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디오나가 앞의 대화는 못 듣고 거의 마지막 대화만 들은 것 같았다.
〈이 디오나가 도와 드릴게요.〉
디오나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타르칸 전하를 어렸을 적부터 봐 와서 그 취향을 잘 아니까요.〉
〈우리를…… 황녀님을 도와주 겠다는 건가요?〉
〈네,오랜 적대를 끊어 낸 결혼이잖아요.〉
디오나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감격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두 분 전하께서 별 탈 없이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보내시길 바라는 건 이 나라 국민이라면 모두가 그렇겠지요. 저 역시 미력하나마 힘이 되고 싶습니다.〉
디오나는 정말로 타르칸이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에 관해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로잘린은 아리스티네가 모르는 타르칸에 대한 것들 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 * *
그때를 상기한 로잘린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타르칸 전하께선 단것이라면 질색이라고 했지.’
로잘린이 타르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바로도 그랬다.
타르칸은 디저트를 포함해 단 맛이 강한 음식엔 일절 손대지 않았다.
본디 부부 사이는 커다란 것보다 소소한 것들이 잘 통해야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맛같이 소소한 것을 이용한 전략은 꽤 유효 했다.
“부부 사이가 멀어지는 게 걱정이시라면 선물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선물?”
“예,타르칸 전하께서 황녀님을 구해 주기도 하셨으니 그 보답을 겸해서요.”
“아,확실히. 구해 준 보답을 해야지. 좋은 생각이야.”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로잘린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제가 궁인들에게 듣기로는 타르칸 전하께서 단걸 정말 좋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단것을?”
“네,아주 사족을 못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파티시에도 공들여 섭외했다고.”
“과연.”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디저트를 선물하시는 게 어때요?”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을 빤히 쳐다봤다.
로잘린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으로 미소 지었다.
이윽고,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 고마워, 로잘린”
‘됐어!’
로잘린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그때 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