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왜 안 나와.”
나른한 목소리에 로잘린은 설마,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타르칸이 느긋 하게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었다.
그 모습 역시 한숨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아,미안. 얘기가 길어져서.”
아리스티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로잘린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일이 있다던 게 타르칸 전하와 나가는 거였어?’
사이가 소원하니,뭐니 말했던 자신이 뭐가 되는가.
‘아니,그러면 왜 부부 사이가 걱정된다고 했던 거야?’
자신을 속인 건가?
왜?
“매번 미안하네. 데려다줘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로잘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브로디 일 때문에 타르칸 전하께서 친히 데려다주시는 건가?’
역시 사이가 좋다고밖에 생각 되지 않는다.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로잘린의 눈에 의심이 가득 들어찼다.
“조금만 참아. 다칠 뻔한 나를 네가 구했다고 온갖 신문에서 세기의 로맨스네,뭐네 하는데 한동안은 그 장단에 맞춰 줘야지.”
아리스티네의 말에 로잘린은 깨달았다.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황녀를 아끼고 위하는 척하는 거구나.’
딱딱했던 로잘린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덧그려졌다.
오히려 잘됐다.
타르칸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억지로 황녀를 데려다주는 걸 좋아할 리 없지.’
실제로 아리스티네의 말을 들은 타르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짜증 난다는 둣이 미간을 구겼다가 로잘린을 보고 멈칫했다.
로잘린은 재빨리 그녀가 지을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그려 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막 피어난 5월의 장미처럼 싱그럽고 화사한 미소였다.
‘어때요? 반말이나 틱틱 내뱉는 품위 없는 황녀보다 내가 훨씬一.’
“뭐야?”
타르칸의 음성에는 뾰족한 날이 서 있었다.
로잘린의 얼굴은 미소 지은 그대로 굳었다.
타르칸은 성큼성큼 걸어 그녀 에게로 다가왔다.
긴 다리 덕에 몇 걸음 걷지 않 았는데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 졌다.
로잘린은 자신을 굽어보는 타 르칸의 모습에 두려우면서도 설랬다.
이렇게 가까이 서 있으니 큰 키와 단단한 몸이 여실히 보였다.
풀어헤친 가슴팍의 단단한 근육이 정면에서 보였다.
달군 쇠 냄새와 평원을 휩쓰는 바람 냄새가 났다.
멍하니 계속 맡게 되는 체취였다.
“전하……”
저도 모르게 달뜬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타르칸의 커다란 손이 그녀에 게로 뻗어졌다.
로잘린은 기꺼이 그 손에 제 몸을 맡기려…….
“악!”
거칠게 목걸이를 잡아채는 손 길에 로잘린이 비명을 질렀다.
몸이 휘청거렸지만 타르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흉흉한 기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걸 왜 네가 하고 있지?”
“아,흐으,저,저는……”
흉포하게 빛나는 금안과 마주친 로잘린이 부들부들 떨었다.
뇌 속에 얼음을 집어넣은 것처럼 머리가 떵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준 거야.”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팔을 잡았다.
거짓말처럼 타르칸의 주변에 휘몰아치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네 가?”
“응,결혼 선물로 들어온 목걸이 중에 눈에 띄어서.”
“눈에 띄는 걸 남을 줘?”
타르칸이 기가 막힌다는 둣 물었다.
“음,뭐.”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쑥였다.
‘나중에 돌려받게 될 거니까.’
속생각이 빤히 읽히는 눈짓이었다.
“하.”
타르칸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의 황녀이자,아이루고 왕위 계승 서열 2위의 신부였다.
심지어 이 결혼은 이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결혼이기까지 했다.
당연히 실바누스의 제후국을 포함해 전 대륙에서 엄청난 결혼 선물을 보내왔고, 그 값어치 는 수치화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문학적 이었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드레스 룸에도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보물들을 떠올렸다.
아리스티네는 돈을 좋아하면서도 어째서인지 그 보물들에 심 드렁했다.
심드렁하다기보다는 남의 떡 바라보듯 봤다.
‘그중에서 이게 눈에 띄었다고.’
“……눈에 띄었다는 건 네 마음에도 들었다는 소리야?”
“ 응”
‘엄청 비싸 보였으니까.’
아리스티네는 생각했다.
돈이 최고다.
“크흠.”
시선을 돌린 타르칸이 괜히 헛기침했다.
빡치는데도 어쩐지 뿌듯했다.
‘이 목걸이를 내가 준 건지 모르고 그런 거니까. 그래도 화는 좀 나지만. 아니, 그래도 마음에 든다잖아.’
만약 그가 목걸이를 몰래 아리스티네의 드레스 룸에 넣어 두지 않고 직접 주었다면 시녀에게 하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빡침보다는 뿌듯함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하지만.’
“이거 말고 딴 거 줘.”
타르칸이 목걸이를 로잘린에게서 빼앗듯이 잡아당겼다.
로잘린은 또다시 넘어질 뻔한 것을 애써 버렸다.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귀족 레이디인 자신이 이렇게 거친 취급을 당하다니.
아리스티네는 의아한 눈으로 타르칸을 바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로 받아낼 거긴 하지만 잠시라도 주기엔 너무 비싼가.’
좀 적당한 선에서 고를 걸 그랬다.
아리스티네의 눈짓에 타르칸과 함께 들어온 궁인들이 재빨리 다가와 로잘린의 목에서 목걸이 를 풀어냈다.
로잘린은 반사적으로 제 빈 목을 쓸었다.
“아……”
목이 가벼워졌다.
그게 그렇게나 허전할 수가 없 었다.
상실감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휘돌았다.
그녀의 시선이 목걸이를 향했다.
하지만 궁인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목걸이를 갈무리해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목걸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로잘린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럼 갈까.”
“응.”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타르칸이 내민 팔에 팔짱을 꼈다.
로잘린은 우두커니 선 채 꽉 닫힌 상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란히 선 채 걸어가는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스티네……!’
그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 러졌다. 까드득,절로 이가 갈렸다.
아리스티네 때문에 저만 타르칸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
억지로 호위하는 짜증을 정치적 입장상 아리스티네에게 풀수 없으니 자신에게 푼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비어 버린 목을 쓸었다.
아직도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감촉과 무게가 선명했다.
한번 손에 넣었던 것이 사라지니 상실감에 애가 달았다.
‘내 것이었어.’
다이아몬드 목걸이도,지금 아리스티네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비단 드레스도,이 우아하면서 화려한 방도,타르칸 전하도!
진녹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부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 * *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무사히 대장간에 데려다준 뒤,오후 업무를 봤다.
부상자 추세에 대한 그래프를 체크하던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갑자기 부상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그것도 서서히 늘어난 게 아니라,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아리스티네가 연무장을 방문한 날이 시발점이 되었다.
아리스티네는 처음 우미루를 만나 메스를 전해 준 날 이후로 어쩌다 한두 번 상황을 살피러 병동에 왔을 뿐이다.
그마저도 메스를 개량하겠다는 말 이후로 뚝 끊겼다.
하지만 전사들은 혹시 자신이 비전하를 뵙는 행운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며 수선이었다.
전에는 병동에 가지 않았을 까 진 상처에도 입원시켜 달라며 아주 난리였다.
〈이 빌어먹을…… 아니,대단하신 전사님들 좀 어떻게 해 보십쇼!〉
조금 전에도 우미루가 와서 씩씩거리다 갔다.
〈어찌나 대단하신지 엄살도 세계 제일로 대단하셔!〉
물론 타르칸은 그녀에게 어떤 유감도 느끼지 못했다.
〈바쁘다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시간은 있나 보지?〉
〈지금 전하께 온 것은 어디까지나 상황 보고 차원으로 제 업무의 연장입니다만.〉
우미루가 들고 온 서류철을 흔 들며 말했다.
〈누가 지금 나한테 온 걸 말했나?〉
그 말에 무슨 소리냐는 둣 타르칸을 바라보던 우미루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지금 저번에 비전하께 갔던 일 때문에 그러세요?!〉
타르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그게 언제 적……. 한 달도 지난 일을 가지고!〉
〈정확히 29일 전이다.〉
〈아 진짜!〉
우미루가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제가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메스 때문에……〉
그녀는 기가 막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물론 사심이 아예 없진 않았다.
전보나 아랫사람을 보냈어도 될 일인데,아니,사실 그냥 기다렸어도 되는 일인데 핑계 삼아 아리스티네를 만나러 갔다.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전하께서 이렇게 유치한놈……. 아니,뇌의 발달 정도가 어린아이와 같은 분이셨나?!’
항상 곁에 있는 측근 전사들처 럼 타르칸을 매일 하루 종일 봐 온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우미루는 꽤 오랫동안 그와 알고 지낸 사이라 자부했다.
그간 타르칸이 어땠는가.
어떤 여자에게도,심지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홀렸다는 희대의 무희가 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던 남자 아닌가.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관심 없 을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혹시 불능이 아닐까 싶었는데.’
우미루는 실례되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고개를 저었다.
불능이어도 타르칸보다는 여자에게 관심 있을 것 같았다.
‘그랬던 사람이,지금 뭐?’
사랑이나 연애 따위 제 인생에 없던 것처럼 굴던 사람이 이러니까 소름이 돋았다.
아리스티네를 만나러 갔던 날도 부득불 따라와 방해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쓸쓸하게 퇴장했던가.
‘내가 말을 말아야지.’
우미루는 이번에도 쓸쓸하게 퇴장했다.
그나마 타르칸이 어떤 일이 있어도 일 처리 하나만큼은 확실 하게 한다는 게 그녀에게 위안이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지금 타르칸 은 심각한 얼굴로 그래프를 바 라보고 있었다.
병동이 꽤 붐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이렇게 수치로 보니 다소 심하긴 했다.
‘이렇게 하면 병동이 비효율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다행히 지금은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않고 정찰하다 조우한 마수를 처리할 뿐이니,심각한 부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녀석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이 런 엄살을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이 잘 쉬지 못 하고 피로가 쌓이면 나중에 힘들어.’
그리고,무엇보다.
‘이놈들이 전부 아리스티네를 보기 위해 엄살 부리고 있다는 거지.’
이 많은 전사들이 전부다.
왕자비인 아리스티네를 따르고 경애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거슬려.’
왠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거슬 렸다.
아리스티네가 제가 아니라 무칼리를 보러 연무장에 왔던 게 다시금 생각났다.
타르칸은 그녀가 가져온 봄 딸기 케이크를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주군께선 단거 싫어하시죠.〉
무칼리 놈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다른 놈들은 다 먹었거늘!’
단건 별로지만,평소 케이크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지만,어째서인지 기분이 더러웠다.
타르칸의 눈이 예리한 빛을 발하며 마수 출몰에 관한 서류를 훌었다.
‘무칼리에게 줄 장기 임무 없나? 이왕이면 왕도를 떠나야 할 정도로 멀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똑똑,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장기 임무를 떠나기로 방금 확정 난 무칼리였다.
그 외에도 자칼렌을 비롯해 다른 전사들도 함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무칼리는 순박하게 웃으며 타르칸에게 권했다.
“주군, 잠시 다과라도 들면서 휴식하는 건 어떠십니까?”
“됐다.”
타르칸이 딱 잘라 거절했다.
원래도 그는 다과를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가,지금은 무칼리의 얼굴을 보면 심사가 뒤틀렸다.
“그,그래도,여기 초콜릿 퍼지 를 가져왔는데 맛이라도 보시는 게……”
평소라면 알겠다며 물러갔을 무칼리가 주저하면서 재차 권했다.
결국 타르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둣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 라봤다.
“초콜릿 퍼지? 그 입 안이 썩을 것처럼 단 것을 내게 먹으라는 건가.”
질책이 담긴 나직한 목소리에 전사들은 움찔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숨죽여 속닥거렸다.
“것 봐. 내가 안 드실 거라고 말했잖아.”
“하지만 그래도……”
“기분도 안 좋아 보이시는데 나가자. 괜히 일하시는 걸 방해 했어.”
“비전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비전하?’
타르칸의 귀가 움찔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