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일부러 보내신 건데 주군께서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알면 비전하께서 실망하실 텐데.”
드르륵一.
쑥덕거리던 전사들이 갑자기 들린 커다란 마찰음에 고개를 돌렸다.
타르칸이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타르칸이 말했다.
“가져와.”
“예?”
바로 가져올 생각은 하지 않고 답답하게 되묻는 모습에 타르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저번처럼 전사들끼리 다 먹어 치우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히익..!’
전사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주군의 표정이 엄청나졌다. 무시무시했다.
초콜릿 퍼지가 아니라 지옥의 불길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전사들은 차마 더 묻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디저트 트레이를 가져갔다.
“여기 있습니다,주군.”
새하얀 레이스 장식이 사랑스러운 상자를 풀자, 꾸덕꾸덕하고 진득한 초콜릿 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이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인상을 쓴 채 초콜릿 퍼지를 노려보던 타르칸이 은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서,설마 드시게요?”
자칼렌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타르칸은 대답 없이 초콜릿 퍼지를 꾹 집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꾸덕꾸덕 한 초콜릿 덩어리가 타르칸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았다.
타르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지,진짜로 드시다니?!’
‘주군께서 단것을……!’
다른 전사들에게 말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다.
타르칸은 말없이 트레이에 있 는 커피 잔으로 손을 뻗었다.
뭐라도 마셔서 이 얼얼할 정도 로 단 맛을 씻어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칼리가 커피 잔을 막는 게 아닌가.
저,주군. 이건 드시지 않는.......”
“왜지?”
내 아내가 날 위해 보내 준 건 데 왜 네가 먹으라 마라야?
타르칸의 시선이 대번에 비딱 해졌다.
무칼리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거 솔티드 캐러멜 라테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콜릿보다 캐러멜이 훨씬 더 달다.
타르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역시 이건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어이,물 좀 가져와.”
무칼리가 시종을 향해 말하며 트레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텁, 강한 힘이 그의 팔목을 쥐었다.
“주군?”
“놔둬라.”
그 말에 전사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안 됩니다, 주군!”
“이거 진짜로 달아요! 소금 때문에 더 달게 느껴진다고요!”
“상상 그 이상입니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을 말리는 줄 착각할 기세였다.
그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르칸은 커피 잔을 집어들었다.
점점 입술과 잔이 가까워지는 모습에 전사들과 시종은 차마 더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타르칸이 마시는 게 솔티드 캐러멜 라테가 아니라 사약이라도 되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탁,소리와 함께 타르칸은 커피 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전사들과 시종은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커피 잔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괘,괜찮으십니까,주군!”
“어서 물을!”
“여기 있습니다!”
시종이 재빨리 내민 물을 받아 타르칸은 벌컥벌컥 마셨다.
다들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타르칸의 안색이 살짝 창백했다.
열 살에 대마수 무르지카의 숨 통을 끊을 때도 혈색 하나 바꾸지 않았던 그다.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타르칸을 바라봤다.
역시 단것을 먹어서 그런지 타르칸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차가운 금빛 눈동자가 무칼리를 향했다.
“무칼리.”
“예,주군.”
“왜 네가 이걸 가져왔지?”
“예?”
의외의 지적에 무칼리는 당황 해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게 솔티드 캐러멜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타르칸은 아리스티네가 혹시 무칼리에게도 디저트를 준 것인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해서 뭐 어쩌자는 건지는 그 스스로도 모르겠다.
“혹시 너도 받은 거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무칼리가 펄쩍 뛰었다.
“근데 왜 시종이나 궁인들이 아니라 네가 이걸 가져오지?”
무칼리는 장군이다. 이런 잔시중을 들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직접 가져왔다는 건—.
‘설마 아리스티네와 만난 건가?’
만난 김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 받았다든가.
‘나도 잘 만나지 못하는데.........!”
타르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리스티네는 요즘 거의 대장간에 콕 박혀 있어,밤늦게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브로디가 아리스티네를 공격했던 후로 타르칸은 그녀가 대장간을 오갈 때 호위를 자처했다.
그런 꼼수를 부려서 겨우겨우 보는 시간을 몇 분 늘렸을 뿐이다.
게다가 그도 처리해야 하는 일정이 있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가 있었다.
‘아니,딱히 아리스티네가 보고 싶은 것도,오래 함께 있고 싶은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 사이,아니,비즈 니스 파트너인데 자주 봐야 원활하게 사업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설마 무칼리가 따로 아리스티네를 만났을 줄이야.
날카로운 시선에 무칼리가 식은땀을 홀렸다.
“그냥 궁인들과 마주쳤을 뿐입니다.”
“왜 궁인들이 직접 오지 않고.”
“집안 하녀들이랑 궁인들이 어째서인지 친해져서 저까지 편히 생각하는지……”
타르칸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마주쳐서 같이 걷는 김에 수다를 떨었을 뿐이다.
“전하께 드리는 거라는 말에 제가 가는 길에 전해 주겠다고 받았습니다. 초콜릿 퍼지와 솔티 드 캐러멜 라테라는 것도 그때 들었고요.”
“무칼리의 말이 맞습니다. 그때 저희는 함께 주군을 뵈러 오는 길이었으니까요.”
주변의 증언이 더해지고 나서야 타르칸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전사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 며 입을 꾹 다물었다.
‘비전하께서 다른 전사들도 먹으라며 더 보내 주신 건 절대 숨겨야겠다!’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모두 다짐에 다짐을 하며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나저나 주군께선 정말 비전하를 아끼시는군.”
“다른 누구도 아닌 비전하시니 그럴 법하지.”
이미 저번에 아리스티네가 연 무장에 방문했을 때 깨달은 바였다.
그날 전사들끼리 수다를 떨 때,자칼렌이 왕후와 아리스티네의 티타임에서 있었던 일을 이 야기해 주었다.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왕후에게도 아리스티네가 굴하지 않고,오히려 주군의 역성을 들며 한 방 먹였다는 말에 전사들이 환호했음은 당연했다.
물론 그 후에 있었다는 커플 행각을 듣고 시린 옆구리를 부여 잡았지만.
“주군께서 그 못된 시녀가 간계를 꾸민다는 걸 비전하께 숨 겼을 때 깜짝 놀랐어.”
아이루고의 수호자로서,타르칸이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효율 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타르칸이 그 효율을 포기한 것이다.
오로지 아리스티네가 마음 놓고 이곳을 활보하게 하기 위해서.
“비전하를 신경 쓰고 챙겨 주신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더 놀라운 건..”
“주군께서 그런 섬세한 생각을 하셨다는 거지.”
타르칸과 섬세라니, 그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주군께서 변하셨어……”
“섬세해지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다 비전하 덕이지.”
다들 아리스티네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비전하께서 ‘내게’ 주신 초콜릿 퍼지 먹어야지!”
“아,‘내게’ 주신 것 말이지?”
커다란 어른들이 투닥투닥하며 서로 자기가 초콜릿 퍼지를 받 은 것이라 아웅다응했다.
* * *
“비전하께서 타르칸 전하께 초콜릿 퍼지와 솔티드 캐러멜 라테를 보내셨어요.”
“어머,저런. 전하께서는 단것 이라면 질색하시는데.”
궁인의 말에 디오나가 입가를 가리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지금 디오나에게 왕자비 부부 에 대해 알려 주는 궁인은 원래 디오나를 왕자비로 밀었던 궁인 이었다.
물론 타르칸이 이미 혼인했으니 물 건너간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궁의 주인인 아리스티네보다 디오나를 더 따랐다.
“비전하께서는 타르칸 전하에 관해 아주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나 봐요.”
“역시 디오나 님께서 전하와 혼인하셨어야 했는데……”
“디오나 님만큼 타르칸 전하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없지요.”
궁인들의 말에 디오나는 짐짓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미 두 분께서 결혼하셨는데 그런 말은……. 평화를 위해서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하길 바라 야지.”
궁인들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 쉬었다.
이들은 모두 타르칸을 향한 디오나의 연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타르칸 전하만을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순수하고 해맑은 연정일까.’
“그나저나 이 일로 타르칸 전하와 비전하의 사이가 멀어질까 걱정이네.”
디오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타르칸 전하께서는 그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 손대지 않은 것이지만,비전하께서 오해하실 수도 있잖아.”
아내가 처음으로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 고 무시한다면.
‘당연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지.’
타르칸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 줄 만큼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리스티네가 기분 상한 티를 내든,내지 않든 ‘신경 쓰기 귀 찮은 일’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결국 틈이 생기고,그 틈은 점점 벌어져 메울 수 없는 균열이 될 것이다.
‘아주 좋아.’
디오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고민되는 척 입매를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멍청한 시녀들을 이용하길 잘했어.’
타르칸이 싫어하는 것을 알려 줬더니 아리스티네에게 쪼르르 가서 타르칸이 좋아하는 것이라 알려주다니.
‘정말 속이 빤히 보인다니까.’
사실 그날,디오나는 거의 처음부터 시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제가 타르칸에게 더 잘 어울린다며 떠들어 대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 들이 얼마나 유용할지 몰라도 일단 써먹어 보자 싶었는데,생각 이상의 결과야.’
“아,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데 궁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네,타르칸 전하께서 전부 다 드셨거든요.”
“지금 그게 무슨……”
디오나는 궁인들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타르칸 전하께서 초콜릿 퍼지 와 솔티드 캐러멜 라테를 드셨다고?”
“그것도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대요.”
“거짓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디오나는 아차 했다.
이들은 디오나에게 호의가 가득한 궁인들이라 그녀를 안타까워했지만,그뿐이다.
실제로 디오나를 도와 흉계를 꾸밀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디오나를 따르는 이유가 마음 깊고 배려 넘치는 척하는 그녀의 내숭 때문이었기에.
디오나는 내숭을 떨며 애써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론 그게 사실이면 참 좋겠지만,전하의 식성을 워낙 잘 아니까 믿기지 않네.”
“그렇죠.”
“저희도 처음에 듣고 깜짝 놀랐어요.”
궁인들이 동조하며 웃었다. 하지만 디오나는 함께 웃기 힘들었다.
그녀는 부채질하는 척 얼굴을 가렸다.
‘설마 타르칸 전하께서 황녀를....’
뇌리를 스친 생각을 지우듯 재 빨리 부정했다.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분명 타르칸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어떤 일이 있어도 타르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고작 어렸을 때 한 번밖에 본 적 없으면서.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어떻 게 자랐는지조차 모르는데도.
‘내가 아무리 전하의 곁을 지켜도....’
그 첫사랑인지 뭔지의 망령이 타르칸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확실히 아리스티네를 대하는 타르칸의 태도가 남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해서가 아니야.’
디오나는 단언했다.
‘타르칸 전하께서 그렇게 쉽게 첫사랑을 놓을 리 없으니까.’
그건 다오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비참하고 처절할 만큼.
타르칸이 지금 아리스티네에게 꽤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딱 하 나다.
첫날밤.
으득,디오나의 이가 저절로 갈렸다.
그날을 엉망으로 망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타르칸과 아리스티네는 첫날밤에 무려 침대를…….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에 디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거나 지금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조금 특별히 대하는 것은 오로지 육체적 욕망 때문이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맛보는 쾌락에 빠져 집착하게 될 수 있다고.
그 글을 보고 디오나는 타르칸 을 침대로 넘어트릴 계획을 세웠지만,좀처럼 성공하질 못했다.
주변의 시선과 체면을 신경 쓰며 함락하기엔 타르칸은 너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였다.
결국 시간이 지나 타르칸은 다른 여자가 주는 쾌락에 빠져 있다.
‘체력도 없어 보이는 그 가느 다란 황녀보다 내가 훨씬 더 잘 맞을 텐데.’
그걸 보여 주고 싶었지만,여태까지 애써 쌓아 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백성들에게도 세기의 부부를 파탄 낸 불륜녀라고 손가락질당할 거고.’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기엔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때마침 실바누스 시녀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한번 여러 여자들이랑 난잡하게 놀아 보면 황녀 따위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
훗,디오나가 입술을 할으며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타르칸이 다른 여자들과 관계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 한 명을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것보단 나았다.
‘괜찮아.’
디오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맨 마 지막이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