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타르칸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아마 너무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시녀들은 타르칸을 보고 웃으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전하,오늘은 저희 둘이 밤 시중을 들어 드리려고 해요.〉
〈부디 마음껏 기뻐해 주셔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밀착하는 데도 타르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망설임이 드나 싶어 서 그녀들은 타르칸의 귀에 바람을 후,불어넣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이루고의 왕이 되실 분인데. 왕이 되면 후궁도 여럿 들이실 것 아니신가요? 조금 시기가 빨라진 것뿐이 어요.〉
〈황녀님도 다른 남자랑 노는데 전하께서도 그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순간이었다.
타르칸의 금안이 벼락처럼 번뜩였다.
〈악!〉
시녀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온몸이 아팠다. 맞은 건 아니었다. 끌려 나간 것뿐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두려움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 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침실 밖으로 쫓겨나 바닥에 패대기쳐진 상태였다.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행동에 뭐가 잘못된 건지.
분명 타르칸에게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스르릉,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타르칸이 검을 빼 든 것이다.
달빛 아래 새파랗게 빛나는 검 날을 본 시녀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감히 주인을 능멸한 죄를 치러야지.”
뻣뻣하게 굳어 버린 팔다리로 시녀들이 엉금엉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칼날이 그녀들의 목에 다가왔다.
“아니,치를 수나 있을까? 너희의 목숨 따위로도 갚을 수 없는데.”
피식 웃은 타르칸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순간이었다.
“타르칸.”
부드러운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아리스티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팔을 토닥였다.
타르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자신보다 더 분노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괜찮다고 자신을 토닥이는 건가.
“화,황녀님!”
“사,사,사,살려 주세요……!”
시녀들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 된 얼굴로 아리스티네의 치맛자 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지금 나한테 살려 달라고 하는 거야?”
아리스티네는 황당한 기분에 되물었다.
“우와, 너네 정말 대단하구나?”
그 말에 시녀들은 수치심을 느꼈지만,지금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저희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당연히 살려 줄 거야. 내가 왜 너네를 죽이겠니?”
그 말에 시녀들의 얼굴에 희망 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그러면一.”
“존경하는 내 아버지께서 알아서 처리할 텐데.”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희망이 깃들기 시작하던 얼굴 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꺼멀게 죽어갔다.
황제가 어떤 자인지는 시녀들 이 가장 잘 알았다.
자신의 친딸을 사지로 몰아넣은 자가 아니던가.
“물론 그 전에 사람들의 심판을 받아야겠지만 말이야.”
아리스티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인들을 비롯해 궁에서 거하 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 경멸에 찬 눈으로 시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칸과 있었던 소소한 일도 기사화되는데 이런 일은 어떻겠 는가.
“그렇게 나 대신 주목받고 싶어 하더니 잘됐네.”
아리스티네가 달빛처럼 환하게 웃으며 시녀들을 내려다봤다.
“꿈을 이룬 걸 축하해.”
“비전하!”
디오나가 황급히 방 안에 들어 섰다.
“소식 들었어요. 괜찮으신 건가요?”
그녀가 바닷빛 눈동자로 걱정스럽게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아리스티네는 다소 놀라 디오나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이렇게 급히 찾아올 사이던가?
“네가 이렇게 날 걱정해 줄 줄은 몰랐는데.”
움찔, 디오나가 아리스티네의 기색을 살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설마 내가 시녀들에게 바람을 넣은 걸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무표정하고 매끈한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 듯 읽을 수가 없었다.
디오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 며 말했다.
“당연히 걱정하지요.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럴걸요?”
“흠......”
아리스티네는 비음을 흘리며 턱을 괴었다.
그렇게나 걱정해 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언질도 없이 아침 댓 바람부터 날 찾아온 건 오버인데.’
조금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저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데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애매모호한 반응에 디오나는 똥줄이 탔다.
“거기다가 저는 비전하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지 않습니까. 생판 남보다는 훨씬 더 걱정하지 요.”
디오나가 친밀한 척,아리스티네의 팔에 손을 얹었다.
“저번에 화내고 돌아가서 네가 이렇게 날 생각하는지 몰랐어.”
디오나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때 화를 냈던 건 타르칸의 앞에서 변비니,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니 하며 자신을 똥쟁이 취급했기 때문이다.
파라락,눈앞에 스치는 기억에 디오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스티네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때 그건……”
“알아,화장실이 급해서 그런 거.”
아리스티네가 다 안다는 듯 디오나를 토닥거려 주었다.
이쯤 되니 디오나는 아리스티네가 진심인지,아니면 놀리는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창피하고 화가 났다.
디오나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리스티네를 향해 웃었다.
“이 디오나는 항상 비전하를 생각한답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안 놀라는 사람이 없을 일이었지.”
로잘린을 충동질해 놨으니 시녀들이 일을 칠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부부 침실에 속옷 차림으로 숨어들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어찜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생판 남이었어도 황당할 텐데 비전하의 친정 시녀라는 자들 이……”
디오나는 아리스티네보다 더 흥분해서 시녀들을 비난했다.
“정말 천박하고 상스러워요. 그 런 짓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것도, 그걸 실행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워요.”
분기탱천한 디오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리스티네가 툭 한마디 던졌다.
“너도 참 고생이다.”
디오나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아니지?’
그러나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아리스티네의 말은 명확했다.
시녀들을 이용해 타르칸을 유혹하게 만든 주제에,아무 관계도 없는 척 욕하는 걸 참 애쓴다고 비꼰 게 틀림없다.
내막을 알고 있는 아리스티네에게는 자신이 원맨쇼 하는 걸 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스럽고 창피했지만,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안 거지? 증거는 없을 텐데……’
식은땀이 비죽비죽 솟았다.
아리스티네는 갑자기 말이 없 는 디오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남친이 인기 많아서 고생이라고 한 건데 왜 저러지?’
고생을 알아줘서 울컥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아리스티네가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디오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힘내렴.”
빨개졌던 디오나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하얘졌다.
‘아주 날 가지고 놀고 있어!’
정말 어떻게 하면 사람을 가장 화나게 비꼴 수 있는지에 대해 도가 텄다.
분노와 모욕감으로 디오나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리스티네는 바르르 떠는 디 오나를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감격에 차 떠는 것을 보니 내 위로가 통한 모양이야.’
물론 그녀의 그런 태도가 디오나를 더 화나게 했음은 당연했다.
“아,그런데 디오나.”
디오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아리스티네를 노려봤다.
“시녀들이 재밌는 소리를 하더 라고.”
디오나는 옳다구나,싶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걱정했는데 겨우 시녀들이 증언했던 거였어?’
그러면 이야기가 쉽다.
시녀들과의 대화에서 디오나는 책잡힐 만한 건더기를 남겨 두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네가 자기들을 도와줬다던데.”
“네에?”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디오나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는 둣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그런 말을 들은 것 자체 에 모멸감이 든다는 둣 고개를 돌렸다.
“……왜 저를 걸고넘어졌는지 알 것 같아요.”
디오나는 일부러 주먹을 꽉 움 켜쥐었다.
“저는 시녀들이 설마 타르칸 전하를 유혹할 생각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찌나 진실된 어조로 말하는 지 정말로 무관계한 피해자인 것 같았다.
“비전하를 보필하는 것을 고민 하는 줄 알고,타르칸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들을 귀됨해 준 것 뿐이에요.”
빠져나갈 구멍쯤은 당연히 마련해 뒀다.
“비전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 했어요. 시녀들도 그렇게 말했고요.”
‘자,어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적어도 겉보기에는.’
디오나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봤다.
증거가 없는 걸 아리스티네가 분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 데 웬걸,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럼 증언할 수 있겠지?”
“네?”
디오나는 깜짝 놀라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증언. 시녀들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말이야.”
“어,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요?”
디오나의 입이 다물렸다.
〈지금 타르칸 전하께서 비전하 께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건 오로지 밤일 때문이에요.〉
〈남자들은 그렇잖아요? 뒤로 빼느라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여자를 찾기 마련이죠.〉
〈타르칸 전하의 취향인 란제리 말이에요.〉
자신이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 가 눈앞이 어찔했다.
아리스티네는 물론이고 타르칸 까지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게 들키면 끝장이다.
‘어떻게……. 시녀들이 그런 것까지 말했나?’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야 했다.
사람들도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시녀들보다 자신의 말을 더 믿을 것이다.
‘하지만… 황녀가 이렇게 나 오는 걸 보면 혹시 다른 증거라도 있는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응? 증언,해 줄 거지?”
아리스티네의 말에 디오나는 마른침을 꿀끽 삼켰다.
하지만 여기서 중언을 안 해 준다고 하는 게 더 이상했다.
만약 아리스티네에게 물질적인 증거가 없고, 시녀들의 말만 듣고 떠보는 것이라면.
‘여기서 내가 거절하면 오히려 내 잘못을 시인하는 거나 다름 없어.’
“……네,당연하지요.”
결국 디오나는 목이 졸리는 심 정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왕자비를 보필하는 친정 시녀의 정체?!
★감히 주인의 남편을 탐낸 시녀들
★왕자비의 시녀, 속옷 차림으로 부부 침실에 숨어들어
★브로디 가고 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시녀들이?
★궁인들의 증언, “평소에도 왕자비 무시 도를 지나쳐”
★평화를 위한 왕자비의 인내
발행되는 모든 일간지는 전부 다 아리스티네의 시녀들이 저지른 만행을 대문짝만하게 다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분노했고,시녀들은 잡아 죽일 역적이 되어 있었다.
파렴치한 시녀들, 과연 누구인가 시녀들의 신상 공개
이에 맞춰 삼류 가십지에서는 시녀들의 개인사부터 시작해서 가문에 관한 것까지 온갖 것을 조사해 다루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가문의 사업 비리나 탈세까지 잡아내 사람들을 더 분노케 했다.
‘평화의 천사를 위협하는 악랄한 것들!’
‘우리 가련하고 연약한 비전하를 저 못된 것들이!’
‘우리 비전하를 지켜 드려야 해!’
보통 아랫사람인 시녀들에게 핍박받은 것은 약간 수치스러운 일이다.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물 론 있지만,얼마나 무능하면 아랫사람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냐고 뒷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평화를 사랑하시는 비전하께서 국가적인 마찰로 번질 것을 염려해 이 일을 홀로 견뎌 내시었다.
‘어쩜,그 여린 몸으로……’
‘겉으로는 티 한 번 내지 않으시고 정말 심지가 굳으시지.’
신문의 논조,궁인들의 증언, 전사들의 증언 등등.
모두 아리스티네에게 호의적이었고,그걸 받아들이는 일반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달리 자그마 하니 빛의 요정 같은 왕자비에 게 홀딱 반한 상태였다.
섬세한 선을 가진 아리스티네는 사람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 했다.
게다가 그들은 웨딩 퍼레이드 에서 아리스티네가 위험했던 아찔한 순간을 함께 겪었다.
심지어 얼마전 시녀인 브로디가 아리스티네를 해치려고했던 건도 있었다.
그들의 보호 본능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요,황녀님.”
로잘린이 당당하게 미소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녀가 가져온 신문에는 로잘린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었다.
홀로 충심을 다해 왕자비를 보필한 시녀, 로잘린
충의는 있었다
실바누스의 마지막 기개, 로잘린
마이너한 신문사의 기사였다.
다른 신문은 전부 아리스티네와 일을 저지른 시녀들에게만 집중한 것에 반해 로잘린이 실리다니.
‘직접 인터뷰했구나.’
아리스티네는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 구석에 예니카리나의 패션 기사가 있어서 더 재밌었다.
그녀는 로잘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냥에 성공한 개를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쓸었다.
로 잘린은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진녹색 눈동자가 기대와 탐욕으로 얼룩진 것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미소를 지었다.
자,사냥을 마친 개는一.
‘솥에 들어가야지.’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