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신경질과 짜증이 가득하던 왕후의 얼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하미르가?”
“예,폐하.”
궁인이 대답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왕후의 관심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다른 궁인들이 아니라,문 간으로 향하게.
그 생각대로 왕후는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문을 봤다.
사실 하미르,라는 이름이 나오고 나서부터 그녀의 머릿속에서 화풀이 대상인 궁인들은 까마득하게 잊혔다.
“지금 어디 있느냐? 이제 막 도착했으니 궁에 있으려나?”
왕후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문간을 서성거렸다.
“내가 찾아가 봐야……. 아니 지, 먼 여행에 지쳤을 테니 일단 쉬게 놔두어야겠지?”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당장 하미르의 궁으로 달려가고싶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 다,폐하.”
궁인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미르 전하께서 바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이냐?”
왕후의 얼굴에 기쁨이 번져 나갔다.
“아니,그래도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구나. 마지막 포털을 이용했다고 해도 포털에 도착하기까지 고된 이동을 했을 텐데.”
“피로하시더라도 왕후 폐하의 얼굴을 가장 먼저 뵙고 싶어서 오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우리 하미르가 효심이 참 깊지.”
왕후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사실 하미르가 곧장 왕후에게 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노한 왕후가 궁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하미르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궁인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가는 어떤 불벼락이 내릴지 모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궁인들은 눈치 빠르게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왕후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방으로 가자꾸나. 여긴 너무 햇살이 강해.”
“알겠습니다,왕후 폐하.”
마법의 힘으로 한여름의 더위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방 안은 시원했다.
연분흥빛 뽀얀 장미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은 투명하게 빛났 고,그 한가운데에는 소담하게 핀 수국이 새하얀 화병에 꽂혀 있었다.
톡톡,왕후는 기대와 초조가 반쯤 섞인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드디어!’
왕후는 자리에서 냉큼 일어나 문간으로 다가갔다.
“하미르,내 아들!”
“모후 폐하.”
하미르가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백금발이 사라락 흘러내리며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
모발이 어두운 보통의 아이루 고인과 달리 하미르는 밝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타국의 귀족인 외조모의 피 때문이다.
그 탓에 얼굴도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섬세해서,학자나 문사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전체적으로 인상이 부드러웠지만,한 올 한 올 그린 듯 세밀한 생김새가 오히려 날카롭게도 보였다.
“어서 오렴. 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니?”
하미르는 테이블까지 왕후를 에스코트하며 답했다.
“포털을 이용했는데 힘들 리가요.”
“그래도 마력석 광산에서 포털 까지는 또 길게 이동했을 거 아니니. 오겠다고 한 지 꽤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아 걱정했단다.”
하미르는 대답 없이 미소 지으 며 왕후의 의자를 손수 빼 주었다.
왕후는 그 다정한 행동에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미르까지 착석하자 궁인들이 차를 내왔다.
“피곤하진 않니?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 쉬어야지.”
“괜찮습니다,모후.”
하미르가 매끄럽게 웃었다.
“힘들 것도 없었습니다. 광산에서 인근 포털까지 길이 멀다 해도 실바누스에서 여기까지의 길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음찔,찻잔을 들어 올리던 왕후의 손이 살짝 멈칫했다.
하미르는 신경 쓰지 않고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실바누스의 황녀가 포털이 아니라 구식 마찻길을 이용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탁,왕후가 소리 나게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차 맛이 떨어졌는지 그녀는 잔 에 입도 대지 않았다.
“하,그러게 말이다. 황제의 눈 밖에 나 포털도 이용하지 못하는 게...”
감히 자신에게 기어오르려고 한다.
왕후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실바누스 황제가 반대했나요? 소문은 다르던데요.”
그 말에 왕후가 기가 막힌 웃음을 지었다.
“왜,그 황녀가 전쟁으로 피해 당한 백성들을 직접 눈에 담기 위해 일부러 그런 고된 길을 택한 거라고 하디?”
“거기에 백성들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몸이 고된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까지 더해서요.”
이외에도 많았다.
왕후의 손톱이 까드득,장미석 테이블을 긁었다.
“그게 그 구석까지 그렇게 소문이 퍼졌어?”
치욕적이었다.
저 소문이 나게 된 계기가 왕후 자신이었으니까.
일부러 아리스티네를 공격하기 위해 구식 마찻길을 들먹이며 힘들진 않았냐고 물었다.
-네가 제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결국 황제에게 인정받지도 못한 쭉정이잖니그런 뜻을 담아서.
하지만 그때 아리스티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조곤조곤 답했다.
〈전쟁으로 흐르던 피를 멎게 하기 위한 여정인데 어찌 힘들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으로 인해 양국 백성들의 삶이 많이 황폐해졌더군요. 그게 제 마음을 아프게 했지,몸이 고 단한 것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포털은 편하지요. 하지만 몸이 조금 고생하더라도 실바누스와 아이루고를 직접 두 눈에 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후의 공격을 받아친 것으로 모자라 그걸 이용하기까지 했다.
구식 마찻길로 온 건 아리스티네를 괴롭히려는 황제의 뜻이 아니라,그녀가 백성을 돌아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스스로 택한 길이라고.
덕분에 아리스티네는 누구보다 평화를 생각하고,백성을 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네프테르까지 아리스티네의 편을 들어 주었으니,그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왕후는 괜히 아리스티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신세만 됐다소문이 날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이렇게 알게 되니 기분이 더러웠다.
“사실과는 조금 다른가 보군요.”
“조금? 완전히 다르지. 그딴 큰 뜻 따위는 없고,그저 황제가 황녀에겐 자격이 없다며 포털 개방을 거부했을 뿐이야.”
하미르가 흠,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황제의 눈 밖에 나 어려서부터 유폐당한 천더기 황녀라는 소리는 듣긴 했지만요.”
“그래,혈통은 중요하지. 하지만 환경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왕후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 며 말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황녀 따위,진짜 온전한 황녀라고 할 수도 없지.”
하미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왕께서 타르칸의 약점을 상쇄해 주기 위해 맺어 준 신부이니 모후께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황녀가 굉장히 마음에 안 차시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찬다고?”
왕후가 “하!” 하고 웃었다.
“그 천더기가 따박따박 말대꾸 하며 거슬리게 구는 것까진 애교로 봐줄 수 있단다.”
하미르의 귀환으로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걔가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 지 아니?”
“무슨 일 있었나요?”
“있다마다!”
왕후는 하미르에게 아리스티네가 만든 의료용 메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미르는 미소 지은 채 그 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이렇다 할 변화는 떠오르지 않았다.
“……래서 이게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이 올지. 그 천더기 때문에 타르칸을 향한 여론은 나날이 좋아지기만 하고 있어.”
“의외군요.”
“그래,설마 그 천더기가 정치적 수완이 있을 줄이야.”
왕후가 혀를 찼다.
하지만 하미르가 놀란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의료 메스를 시장에서 성공시키다니.’
하미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온화한 얼굴로 왕후를 바라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모후.”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겠니.”
왕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의료 사고가 나지 않는 건 지. 하다못해 조작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건 하미르 역시 궁금했다. 어머니의 성격을 봤을 때 진작에 조작하고 남았을 텐데,왜 그러지 않는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천더기가 배운 것도 없으 면서 잔머리만 잘 돌아가서 말이다.”
왕후가 하,하고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의료 과실 공방을 의식했는지 메스를 판매할 때 주의 사항을 구두와 문서로 이중 설명 한다더구나.”
“설명한 걸로 책임이 면해지지 않을 텐데요.”
그야 의사 측에 책임이 커지겠지만,왕후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다.
자그마한 티끌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할 힘이 있다는 뜻이다.
“설명을 들었고 그 내용을 숙지했다는 자필 확인과 서명도 받는다고 하더구나.”
히미르는 속으로 호오,하고 감탄했다.
“거기다 이 주의 사항을 위반해서 생기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의사에게 있다는 서명도.”
그런 철저한 준비를 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단순히 철저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준비가 아니다.
번뜩이는 지성이 황녀에겐 있었다.
“주의 사항을 지켜도 메스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책임을 의사에게 지우는 게 부당하다고 걸고넘어지면 되지 않나요?”
왕후의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시험 결과를 붙여 놨어.”
“시험이요?”
“그래, 메스의 안정성 시험 결과.”
왕후가 머리 아프다는 듯 관자 놀이를 꾹 눌렀다.
그녀는 설명하는 대신 궁인에게 눈짓했다.
궁인이 공손하게 하미르에게 관련 서류를 바쳤다.
시험 책임자의 이름을 본 하미르는 웃음을 깨물었다.
‘영리하군,황녀.’
우미루.
아내가 만든 상품에 대한 안정성 시험을 남편의 직원이 하다니.
보통이라면 짜고 치는 카드 게임 아니냐고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미루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재 외과의.
전사의 나라인 만큼,아이루고에서 가장 인기 많고 존경받는 의사는 외과의다.
마수와 대적하느라 입은 영광 스러운 상처를 치료하며 전사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의조차 포기한 수술을 집도해서 39시간의 대장정 끝에 성공한 걸 모르는 자는 없다.
우미루에게는 감히 무너트릴 수 없는 권위와 명예가 있었다.
또한,모든 의사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리스티네와 어떤 관계도 없는,객관성이 보장된 의사보다 우미루가 시험을 책임지는 것을 더 신뢰할 거다.
‘그리고 그 별난 성격도 유명 하고 말이지.’
결코 권력이나 친분 때문에 거 짓으로 시험 결과를 쓸 사람이 아니었다.
청렴한 사람이어서 그렇다기보 다는 그냥…… 정말 이상한 사 람이었다.
어쨌거나 아이루고에 연고 하나 없는 황녀가 섭외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서류를 넘겨 보던 하미르의 얼굴에 미약하나마 재밌다는 표정 이 떠올랐다.
‘새로운 메스를 사용해 수술할 때 기존 메스 대비 감염 사망률 감소에 대한 예상 리포트까지 있잖아?’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누구나 확신하더라도,구체적인 수치가 나오는 건 느낌이 확 다르다.
의사뿐만 아니라 의술에 문외한인 일반 국민들도 이 수치를 보면 솔깃할 것이다.
‘이런 시험으로 의료 공방 문제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동시에 홍보까지 했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기존 메스와 차원이 다르게 안전한 메스.
의사들이 쓰지 않더라도 환자들부터가 챙길 것이다.
이 병원은 어떤 메스를 사용하는가,하고.
그러면 환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의사들은 새로운 메스를 쓸 수밖에 없다.
하미르가 검지를 튕겨 서류를 툭 두드렸다.
“확실히 이러면 의료 사고로 묶긴 힘들겠습니다.”
“그게 잔꾀만 잘 부리지 뭐니.”
왕후의 말에 하미르가 웃었다.
‘글쎄요,과연 이게 잔머리만 잘 굴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까?’
하미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는 정식으로 제왕학을 배웠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과거를 조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만약 정말 유폐당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게 맞다면一.’
하미르의 튀르쿠아즈빛 눈동자 가 다시 서류를 향했다.
우아한 눈매가 예리하게 가늘어진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웃으며 왕후에게 말했다.
“모후께선 너무 의료 과실에만 집중하신 듯합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 놓으며 다리를 꼬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따로 있는 데요.”
“쉬운 방법이 따로 있다고?”
왕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역시 그 천것의 아들과 달리 그녀의 명민한 아들은 금방 해결책을 찾아냈나 보다.
“어서 말해 보렴.”
“이 메스의 가장 큰 특징은 녹이 슬지 않는다는 강철로 만들 었다는 거죠.”
“그래,그 대단한 걸 대체 어떻게 만들어 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왕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디자인을 베껴 이쪽도 똑같은 걸 만들려고 해도 저 신비한 철을 만드는 법을 모른다.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몰라도 상관없다니,그건 앞으 로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될 텐데.”
“그게 뭐로 이뤄져 있든 어쨌거나 강철이잖습니까.”
“그 말은.....”
왕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철광석부터 시작해서 철괴를 다 선점하면 되지요.”
하미르가 봄볕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왕후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과 기쁨이 퍼져 나갔다.
“역시 하미르,내 아들이야.”
그녀가 만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왕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었는데도 찻물이 향긋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그 천더기 황녀가 새파랗게 질려선 전전긍긍하는 꼴을 보게 되겠어.”
어쩌면 철을 좀 팔아 달라고 제게 싹싹 빌지도 모른다.
철을 독점하는 일.
그건 왕후에게 굉장히 쉬운 일 이었다.
권력이 있고,다른 귀족이나 상단과의 연결점이 강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루고, 아니,대륙 최대 규모의 철광산이 친정 스키엘라 공작가의 소유였으니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