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77화 (77/183)

77화

왕후는 당장 아비인 스키엘라 공작을 궁에 불러들일 계획을 세웠다.

궁인에게 연통을 넣으라고 한 후,벌써부터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모든 근심과 걱정이 네 한 마디에 날아가는구나.”

“모후의 심기가 평안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왕후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성한 아들을 바라봤다.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 니라,이렇게 수완과 능력을 갖춘 자가 왕좌에 올라야지 않겠니?”

왕후는 아들의 손을 꼬옥 붙잡고 짙게 미소 지었다.

“네가 아니면 또 누가 제왕에 어울리겠니? 그 천것?”

왕후가 피식,비웃었다.

“네겐 비할 바가 아니지. 그 천것의 아내도.”

선철을 구할 수 없게 된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왔다.

‘감히 내게 기어오른 대가를 치를 때야.’

Chapter 24. 그냥 귀여워서

“와, 바깥은 정말 덥구나.”

찌는 여름이었다. 아이루고의 여름은 실바누스와 또 달랐다.

더 쨍하고 더 투명하고 더 선명했다.

“햇빛 냄새.”

볕도 잘 들지 않는 유폐궁에서는 햇빛 냄새는커녕 여름 한낮에도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아리스티네는 크게 숨을 들이 마시며 여름의 냄새를 한껏 즐겼다.

타르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다 떨어져.”

“아,응. 고마워.”

타르칸과 아리스티네가 타고 있는 마차는 뚜껑이 없고,천에 살을 덧대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차양을 단 버루시 (barouche) 였다.

시원하게 탁 트여 있어 여름에 적합했지만,자칫 잘못하다간 떨어질 수 있다.

아리스티네는 내밀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고 나서도 타르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지만,아리스티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그의 손이 아니라 나타나기 시작한 번화가로 향해 있었다.

“우와,나 이렇게 사람 많은 곳 처음이야……”

아리스티네는 챙이 넓은 새하얀 모자를 살짝 매만지며 감탄 했다.

타르칸은 힐끗 앞을 봤다.

거리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번화가에서 이 정도면 평범한 축이었다.

“웨딩 퍼레이드 땐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땐 바리케이드도 처져있었고,내가 사람들 사이를 걸을 일은 없었잖아.”

아리스티네가 뭘 모른다는 눈으로 타르칸을 바라봤다.

“지금은 저 속에 내가 간다는 게 중요한 거지.”

잔뜩 설레고 들뜬 얼굴이라 타르칸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가라앉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거리를 걷는 것조차 이렇게나 기대하다니.

아리스티네가 어떻게 살아왔는 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평소 하는 모습을 보면 유폐당 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던하고 구김이 없어서 그 괴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이윽고 마차 관리소에 마차가 멈췄다.

타르칸이 먼저 내리고 그가 손을 잡아 줘 아리스티네는 폴짝 내렸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튜닉 자락이 허공에 팔락팔락 흩날렸다.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올려다 보며 개구지게 웃었다.

“오늘은 나름대로 잠행이니까.”

확실히 궁에서는 이렇게 기품없이 폴짝 뛰어내릴 순 없다.

타르칸은 피식 웃곤 “마음대로” 하고 답했다.

“뭐,잠행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다 알아보겠지만.”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쪽였다.

지금 아리스티네는 어깨가 드러나는 새하얀 민소매 튜닉에 은장식이 달린 가죽 허리띠를 찼다.

신발은 끈이 교차되며 종아리 까지 길게 올라오는 가죽 샌들을 신었다.

튜닉의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형식이라 아래에 따로 치마를 입진 않았다.

단순하지만 하나같이 질 좋은 소재였다.

차림새만 보면 유복한 민가의 소녀가 간단히 마실을 나온 것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는것이다.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한다고 해 도 인종 자체가 다르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누가 봐도 잠행을 나온 왕자비라고 생각할 터.

“거기다가 동행인이 보통 사람이어야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새초롬히 눈짓했다.

원래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같이 궁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몰래 밖으로 나가는 것인 만큼,무칼리와 함께 다녀오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건지 타르칸이 갑자기 나타나선 함께 가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아리스티네는 거부했다.

〈하지만 타르칸은 너무 눈에 띄는걸.〉

얼굴도 얼굴이지만, 아이루고인들 중에서도 타르칸은 피지컬이 남다르다.

커다랗고 견고한 견갑근과 대흉근,그에 비해 꽉 조여진 허리. 그리고 길게 뻗은 팔과 다리.

수십 걸음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법했다.

〈무칼리도 눈에 띄잖아.〉

그렇게 말하며 타르칸이 무칼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무칼리가 땀을 뻘뻘 홀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예! 저도 엄청 눈에 띕니다. 제가 가장 눈에 띕니다!〉

아리스티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사람들이 알아보더라도 왕자랑 장군은 온도가 다르잖아.〉

누가 보면 무칼리가 외출할 때마다 잠행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알겠다.

하지만 타르칸은 물러나지 않았다.

〈무칼리나 나의 문제가 아닐텐데? 네가 평복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나?〉

〈윽…….〉

정곡을 찔려 아리스티네가 신음을 홀렸다.

그 말이 맞다.

실바누스와 아이루고의 관계가 회복되고 수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이루고에 실바누스 인은 극히 드물었다.

그냥 실바누스인이 지나가기만 해도 눈에 될 텐데,하물며 아리스티네는 누구나 한번 뒤돌아볼 만큼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얼굴도 잘 알려졌으니.

〈누구랑 가나 똑같아.〉

〈아니, 그래도 너랑 가면 더 눈에 띌 것 같은데.〉

아리스티네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결국 어깨를 으쪽였다.

〈뭐,아무래도 상관없나. 이러 나저러나 잠행 나온 왕자비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니까.〉

사람들 틈에 녹아드는 것을 꿈 꿨었지만 이미 물 건너간 듯싶 었다.

왕자 부부의 행차라고 알리면 일이 켜지니 그냥 ‘누구나 알아 보겠지만 어쨌든 잠행’을 하기로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 두 사람은 함께 궁 밖으로 나온 것 이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을 힐끔 바라봤다.

그는 검은 비단 가운을 대충 여며 자줏빛 천으로 된 허리띠로 묶어 고정했다.

항상 패용하는 검은 그 허리띠에 아무렇게나 꽂았다.

느슨한 옷차림이었지만 새까맣고 매끄러운 털을 가진 맹수처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리스티네는 휴,한숨을 쉬었다.

‘이미 포기했지만,그렇지만!’

너무 눈에 띄는 타르칸을 보니 슬픔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눈에 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부는 마차 관리소에서 기다 리기로 하고,두 사람은 시종이 나 호위를 대동하지 않고 광장

으로 나갔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의 열기까지 더해지자,정말 여름날이라 는 느낌이었다.

푸른 하늘이 청량했다.

아리스티네는 활기찬 거리를 둘러보며 걷다가 음,하고 미묘한 신음을 홀렸다.

‘사람들이 반경 열 걸음 이내로 들어오지 않아……’

두 사람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생긴 것 같았다.

‘보통 그렇게까지 주변을 둘러 보면서 걷지 않으니까 조금 늦게 눈치채도 좋잖아.’

아리스티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허어어억!” 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 르겠다는 표정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홀린 둣 아리스티네에게 다가왔다.

“지,진짜로 비,비,비전……아,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인지 그는 화들짝 놀라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그대로 뒤돌아 멀어졌다.

“뭐지?”

“그러게.”

타르칸은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주변을 짝악 둘러보았다.

제 아내에게 넋을 놓고있던 사내놈들이 흠칫 놀라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고 그는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별 뜻은 없고 그냥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 그런 것뿐이다.

“사람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타르칸이 팔을 내밀었다.

“사람이 많으면 뭐 해. 아무도 우리한테 다가오지 않는데.”

아리스티네는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 순간,사람들 틈에서 끅, 하고 개구리가 눌린 것 같은 비명 이 들렸다.

‘뭐지?’

아리스티네는 뭔가 싶어서 그 쪽을 바라봤다.

“세상에……. 봤어? 두 분께서 팔짱을……. 끄읍!”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 니……”

끄허엉,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나왔다.

“함께 잠행 나와서 데이트하시나 봐.”

“방해하지 말자.”

“방해하지 말자면서 왜 자꾸만 따라가?”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발이 말을 안 들어.”

사람들이 옹성거리는 사이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일단 데이트부터 오해였지만, 대체 왜 저들이 저렇게 감격하는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 주친 사람들이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응원합니다.”

“잘 어울려요.”

“행복하세요.”

“2세는 빠르게.”

“허니문 베이비 기대합니다.”

그러고는 엄지를 척 치켜드는 것 아닌가.

대체 이 사람들 뭐지.

황당해하는 아리스티네와 달리 타르칸은 그녀를 좀 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저기서 끅,꼭 개구리가 눌린 소리가 났다.

“가지.”

타르칸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루고는 참 국민성이 특이한 것 같았다.

일단 염원했던 잠행은 진작 글렀으니 원래 목적했던 상단에 가서 볼일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신 걸 환영합니다. 타르칸 전하,비전하.”

왕자 부부가 내방한다는 말에 아침부터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상단주가 정중하게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비전하.”

그는 미소 지으며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디 은혜를.”

아리스티네는 그에게 손을 내 주었다.

상단주는 짧게 손등에 키스하 고는 뒤로 물러났다.

우아하고 예의 바르고 산뜻한 사람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고 넘긴 머리칼이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었다.

타르칸의 부하 중에서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아리스티네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심 우미루 같은 사람이 상단주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그는 절도 있게 안쪽을 손짓하 며 앞장섰다.

따라서 걸음을 옮기는데,그가 아차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점잖게 고개를 숙인 그가 자신

을 소개했다.

“저는 핑크핑크 냥젤리 상단의 대리 상단주, 조디악입니다.”

반짝,그가 쓰고 있는 안경이 예리하게 빛났다.

‘……뭐?’

그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아리스티네는 뒤늦게 반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 무슨 핑크 냥젤리 어쩌고 그런 것 같은데.

아리스티네는 긴가민가하며 조디악을 쳐다봤다.

그는 가느다란 웃음을 머금은 채,흐트러짐 없는 정중한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 들었구나.’

그 얼굴을 보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못 들어도 그렇지, 그런 이상하고 해괴한 이름으로 듣다니.

‘이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은 타르칸이라고.’

다른 상단이 그런 이름을 붙여 도 여긴 절대 아니다.

“미안,잘못 들었어. 상단 이름이 뭐라고?”

“핑크핑크 냥젤리 상단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조디악의 얼굴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움도,수치심도 없었다.

“어,음……. 내가 계속 이상하게 듣는 거 같은데. 상단 이름이 핑크핑一.”

“그 이름 맞으니까 그만해.”

타르칸이 얼굴을 구기며 짓씹 듯 말했다.

핑크 어쩌고를 직접 입에 담은 조디악보다 그가 더 부끄러워 보였다.

아리스티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그럼 네가一.”

“내가 정한 거 아니야.”

으득,타르칸이 이를 갈며 걸 음을 옮겼다.

아리스티네는 얼떨떨하게 멈춰 서 있다가 재빨리 그를 쫓아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어오면서 얼핏 본 상단의 문양이 핑크빛 발바닥 젤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왜 그런 이름을 정한 거야?”

“저놈한테 물어봐.”

타르칸이 조디악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디악은 여전히 정중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응접실의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비전하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리스티네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실제 상단주의 아내이기도 하지만,아리스티네는 이곳에 거래처 사장으로서 온 것이었다.

거래는 이미 텄고 성공적이었지만,어쨌든 첫 만남.

‘테스트인가.’

그녀의 보랏빛 눈이 진지해졌다.

“음,아무래도 상단의 실소유주가 타르칸이니까. 그 점을 숨기 기 위해서인가? 아무도 타르칸의 상단이 설마 그런 이름을 쓸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조디악은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을 내비쳤다.

“그냥 귀여워서지요.”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엄청난 실망감과 어이없다 는 감정으로 가득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