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니,어이없는 건 오히려 이 쪽인데.’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핑크빛 냥젤리로 충분한 것을 그런 쓸데없는 이유를 붙이시다니.”
조디악의 은테 안경이 엄격하게 반짝,빛났다.
‘아니,쓸데없는 게 아니라 그게 핵심 아니야?’
조디악이 대리 상단주인 이유가 타르칸의 상단임을 숨기기 위 해서다.
‘그게 쓸데없는 이유라면 넌 바로 해고당할 텐데?’
“냥젤리의 귀여움을 무시하는 겁니까?”
핑크 냥젤리의 귀여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서늘하게 빛나는 안경알 너머로,회청색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도 귀엽다고는 생각하 는데……”
왠지 모를 조디악의 박력에 아리스티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말랑말랑할 것 같아서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그런데요?”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에 조디악의 얼굴이 충격 으로 물들었다.
“보신 적 없으시다고요?! 그럴 수가...!”
그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에서 40일간 생존한 사람을 보듯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당장 보러 가시죠!”
“아니.”
타르칸이 조디악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일 얘기나 하자고,응?”
그제야 조디악의 눈에 이성이 라는 게 돌아왔다.
“이런 실례를.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비전하.”
그가 정중하고도 절도 있는 자세로 아리스티네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응,괜찮아.”
아리스티네는 사과를 받아들였다. 자신은 괜찮았다.
하지만.
‘괜찮은 건가 여기……’
상단이 문제였다.
모든 거래처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군다면 거래 끊고 도망갈 것 같은데.
‘이름이 이래서 계약서에 상단 명이 나와 있지 않았던 건가.’
계약서에는 타르칸의 상단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의아해서 물어봤는데,이상하게 계속 상단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다.
뭔가 싶었는데 그런 이름이라면 숨길만 했다.
‘애초에 왜 그런 이름을 통과 시킨 거야? 조디악은 바지 사장이고 실질적인 주인은 타르칸이니까 본인이 정하면 됐잖아?’
아리스티네는 떨떠름한 기분으 로 소파에 앉았다.
상단 이름에 대한 고찰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용건부터 꺼냈다.
“오늘 여기 온 건 시장 반응을 직접 살펴보고 싶어서야.”
아리스티네의 말에 조디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럴 것같아서 미리 자료를 준비해 놨습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철 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서류철에는 분홍빛 고양이 육구가 그려져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육구를 바라보다가 심호흡하곤 서류철을 넘겼다.
‘아무리 바지 사장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다른 데랑 계약 하는 게 나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첫 번째 페이지를 살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핑크핑크 냥젤리’라는 상호명 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리된 서류였다.
보기도 편하고,직관적이라 이해도 쉽다.
고공 행진하는 매출 그래프를 본 아리스티네는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조디악을 향한 불신이 눈 녹듯이 녹고 신뢰가 싹 텄다.
‘암,비즈니스의 기본은 신뢰지!’
“판매 개시 첫날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특이 사항은 병원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메스를 볼 수 있냐고 물어 봤던 것입니다.”
메스의 고객층은 병원이다.
때문에 상단에서는 지점에 상품을 진열하지 않고 외판을 돌았다.
판매 개수 단위부터가 다르니 병원에 물건을 보이고 계약을 체결한 후,수량에 맞춰 병원에 입고시키는 게 기본적인 거래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녹이 슬지 않는 철이라고 하니 흥미를 가진 거겠지.”
아리스티네의 말에 조디악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는 “그것도 있지만” 하고 말을 받았다.
“비전하께서 만드신 물건이라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응?”
조디악은 아리스티네의 되물음 에 의뭉스러운 미소로 답하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각 지점에 메스를 구경할 수 있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오,그거 좋네.”
아리스티네는 감탄했다.
그냥 판매를 위탁했을 뿐인데, 시장 반응을 보고 그에 맞춰 새로운 전략을 준비하다니.
의심한 게 미안할 정도로 조디악은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떡밥을 주면 사람들의 관심은 더더욱 깊어질 거고,병원에서도 환자의 이목을 신경 써서 더 우리 메스를 구매하려고 하겠지.”
게다가 직접 눈으로 스테인리 스 스틸의 성능을 확인한 일반 사람들 역시 열광할 것은 당연 했다.
“혹시 진열은 어떻게 해 놨어? 물에 담가져 있는 채 진열되어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게 더 시각적으로 효과적이니까.
“아,서류 맨 마지막에 메스 코너의 사진을 첨부해 놓았습니다.”
조디악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서류를 넘겼다.
“본래라면 직접 메스 코너를 보여 드리고 안내해 드리는 게 맞겠지만,안전 문제상……”
일반 백성을 손님으로 하는 가게 안에 갑자기 왕자 부부가 돌 아다니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냐, 괜찮아. 편히 구경할 수 있게 문 닫고 가게를 비우겠다 는 걸 내가 거절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맨 마지막 장을 넘긴 아리스티네의 손이 멈칫했다.
“……이게 메스 코너 사진이라고……?”
“예,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조디악이 자랑스레 말했다.
사진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 자가 흔들렸다.
“이건 메스 코너가 아니라,나 를 홍보하는 흥보관 같은데....?”
사진 속의 메스 코너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냥 가게 안에 있는 매대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아예 방이 따로 있었다.
고급스러운 벨벳 룸에는 투명한 유리관에 담긴 메스가 조명 을 받은 채 한편에 있었다.
‘너무 구석 아냐? 정중앙에 있어야지.’
하지만 정중앙에는 이미 자리 하고 있는 게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사진이 붙어 있는 패널이었다.
커다란 사진 네 장이 패널의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모두 타르칸과 함께 있는 사진 이었다.
결혼식 본식에서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맹세의 키스를 하는 사진.
웨딩 퍼레이드 때 황금 마차 위에서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뺨을 움켜쥐고 웃던 사진.
마차 사고 후,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공주님 안기로 안은 사진.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품에 폭 안긴 채 거대하고 새까만 군마를 탄 사진.
그리고 남은 공간 역시 사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결혼식과 웨딩 퍼레이드 때 사진은 물론이고,대장간에 있는 사진과 메스를 들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대체 언제 찍은 거지?’
사진을 넣기 힘들 정도로 작은 공간에는 메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메스 코너이니 예의상 적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 였다.
“아니,이게 무슨……”
심지어 메스의 건너편에 마련된 벨벳 소파 위에는 아리스티네의 등신대가 앉아 있었다.
“이건 왜……”
“아,거긴 비전하와 함께 사진 찍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인기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지요.”
아리스티네는 할 말을 잃었다.
메스 판매를 위탁하며 계약을 처리할 때,궁에 찾아온 상단 사람이 메스 홍보에 아리스티네의 사진을 써도 괜찮은지 물었다.
단순히 메스를 왕자비가 만든 것이라 흥보할 때 한 컷 쓰겠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이건.......
“당장 이 사진들을一.”
“덕분에 전 지점의 통합 매출 이 1,400퍼센트 향상했습니다.”
떼라는 소리를 하기 전에 조디악이 말했다.
아리스티네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1,400퍼센트라고?’
그러면 14배? 이 사진으로? 그게 가능한 수치인가?
“처음으로 매그놀리아 상단을 앞질렀어요.”
매그놀리아 상단은 왕후의 친정인 스키엘라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전통적이고 유서 깊은 가문만큼이나 오래된 상단.
아이루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단이다.
“아시다시피 저희 상단은 마수에 관한 물품이 주거래 품목이고 주 수입원이죠.”
상단은 그것만으로도 흑자였다.
귀하고 비싼 물품이었고,마수의 사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곳은 핑크핑크 냥젤리 상단이 유일하니까.
‘으,그걸 생각하니 이름이 더 이상하게 느껴져.’
마수의 사체보다는 뭔가 달콤한 솜사탕 같은 걸 팔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방면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싶었지만,생필품이나 식료품같이 일반적인 물품은 항상 다른 상단에 비해 뒤처졌어요.”
매그놀리아는커녕 다른 대규모 상단들에게도 밀렸다.
신생 상단의 한계였다.
타르칸이 상단주라는 게 알려 졌으면 좀 달랐겠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비전하의 사 - 아니,메스를 보러 오면서부터 일반 물품도 폭발적으로 잘 팔리기 시작한 겁니다.”
‘방금 사진이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중간에 재빨리 메스라고 말을 바꿨지만 이미 들켰다.
아리스티네의 의심 어린 눈동 자에 조디악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비전하,이건 다분히 상업적인 관점에서 가장 효과 있는 마케팅을 추진한 겁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 고,조디악은 강조했다.
“내 사진을 걸어 놓는 게 사회 과학적인 관점에서 효과적인 마케팅이라는 거야?”
그게 말이 되는가.
“데이터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조디악이 서류를 들이밀었다. 서류의 숫자를 확인한 아리스티네는 윽,하고 신음했다.
“메스를 가운데 두는 것보다 비전하로 가득 채워 두는 게 훨씬,훨씬! 효과가 있어요.”
그 말대로였다.
아리스티네의 반발을 예상한 건지,조디악은 메스 코너-라고 해야 할지 아리스티네 사진 코너라고 해야 할지-를 꾸린 전 후의 매출 변화를 도표로 만들 어 놨다.
그걸 보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이게 왜 효과가 있어?’
아리스티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으음,이거 미끼 상품 전략이랑 비슷한 건가?’
손해를 감수하고 한 품목-예 를 들자면 우유-의 가격을 원가급으로 책정하고,그걸 미끼로 소비자를 유인해 다른 물건까지 쇼핑하게 하는 전략.
그 우유가 아리스티네의 사진인 셈이었다.
우유처럼 팔진 않지만,어쨌거나 소비자를 유인하니까.
“대체 왜 유인이 되는 거지? 내 사진을 그렇게까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신문에서도 볼 수 있잖아.”
“비전하께서는 뭘 모르시는군요. 집에서 신문지로 보는 것과 나와서 보는 건 또 다르죠.”
조디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 와서 사진 패널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 벤치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누가 그것만 찍고 돌아가요. 메스하고도 찍어요. 평화의 여신이 인류에게 내려 준 선물이라면서.”
“뭐라고……”
왠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기가 빠져나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매출 1,400퍼센트 향상!”
조디악이 외쳤다.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왜인지 조디악의 얼굴이 화폐 단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넘어가면 안 돼!’
생각해 보자.
이런 사진을 잔뜩 내걸고 사람을 유인하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할까?
‘응,벌어야지. 14배라고. 대략 반액을 더 추가하고 거기서 또 〇이 하나 더 붙는 거야.’
간단한 답이었다.
‘생각해 보니 딱히 나쁜 게 아니잖아?’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그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민들에게 내 이미지가 이렇게 좋으면 정치 싸음에서 더 유리하잖아? 이걸 통해서 그 좋은 이미지가 강화될 수 있어.’
괜히 처음에 자신의 홍보관이 라고 생각했던 게 아니다.
아리스티네는 합리화를 시작했다.
다시금 서류의 숫자를 확인한 그녀가 숙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건 메스 판매 매출이 올랐다는 게 아니라,상단의 매출이 오른 거잖아?”
“그렇지요.”
“결국 내게 이득은 없는 거잖아.”
메스 홍보도 되고 정치적으로 이점도 있었지만,일단 그 사실은 접어 두었다.
아리스티네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조디악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이 자료를 준비하면서 비전하께 보상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었군.”
“아무렴요. 그래서 상승 폭을 생각해서 이 정도 금액은 어떻습니까.”
조디악이 숫자를 적어 보여 주 었다.
아리스티네의 눈에 번쩍 빛이 들어왔다.
14배나 매출이 늘어서 그런지, 조디악이 꽤 후한 가격을 책정해 주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저쪽이지.’
아리스티네는 홈,하고 소파에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
“글쎄,역시 사진을 이렇게 많이 거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후우,알겠습니다. 그럼 이거는....”
조디악이 숫자를 찍찍 긋고 새 로운 숫자를 적었다.
“흐음,글쎄……”
“알겠습니다! 이게 마지막! 대신 반년 정도는 걸 수 있게 봐 주셔야 합니다.”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었다.
“거래 성립.”
“감사합니다.”
아리스티네와 조디악이 악수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굉음과 동시에 타르칸의 발이 흑자단으로 만든 테이블을 찍었다.
두껍고 강고한 흑자단이 나뭇 결을 따라 쩌적 금이 갔다.
그 위에 있던 서류가 무참히 구겨지며 밟힌 건 당연한 일이 었다.
“타,타르칸 전하.”
사색이 된 조디악이 타르칸을 불렀다.
“치워.”
타르칸의 목소리는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목울음처럼 낮고 위협적이었다.
“감히.”
내 아내가 다른 사람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게 해?
타르칸의 금안에서 번쩍이는 번개처럼 불꽃이 튀었다.
진짜 아리스티네가 아니라 아리스티네의 사진을 크게 뽑아 만든 등신대였을 뿐이지만,타르 칸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