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가끔 조디악이 키우는 고양이 보러 오면 되지! 얼마든지 보러오라고 했고.”
아리스티네가 싱긋 웃었다.
타르칸의 왼쪽 눈썹이 까딱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양이 이야기하면서 너무 친해진 것 아닌가.
“걘 고양이랑 일에 미친 놈이야.”
“그래?”
“절대 정상이 아니라고.”
“일에 미친 건 좋은 거 아냐? 메스 열심히 팔아줘서 고맙더라.”
안 좋은 점을 말했는데 어째서 인지 호감도만 더 올라갔다.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신나서 흥흥,콧노래를 부르는 아리스티네가 그렇게 얄미울 수없다.
“평화의 천사님.”
놀리듯 그렇게 부르자,아리스티네가 그를 획 돌아봤다.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평화의 여신님?”
“타르칸!”
바로 성을 내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어느새 타르칸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평화의 천사니,여신이니. 아픈 이들의 구원자니.
아리스티네를 부르는 말들이 우스웠다.
타르칸이 아는 아리스티네는 엉뚱하기 짝이 없어 생각이 어 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다.
가늘고 약한 주제에 겁이 없어 묘하게 행동파인데다가,눈치가 빠른가 하면 다음 순간엔 하나도 없다.
거기다가 고집은 또 어찌나 센 지.
‘사람을 변태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어느새 그는 피식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리스티네의 이런 일면을 모르겠지.
숭고한 뜻을 품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할 거다.
‘사실은 은근 허당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타르칸의 금 빛 눈동자는 꿀처럼 녹녹하고 달콤하게 풀어져 있었다.
두 사람을 힐끔대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질 만큼.
“그래서 천사님,하고 싶은 거 없어?”
“없는데요,변태님.”
아리스티네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진짜로? 궁에서 상단주를 만나도 되는데 일부러 바깥에 나온 거잖아.”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입을 다 물었다.
타르칸의 말이 맞다.
왕궁은 굉장히 넓고 볼 것도 많았지만,그래도 항상 바깥의 세상이 궁금했다.
어떻게 알았어?”
“글쎄.”
타르칸이 팔을 내밀며 말해와 아리스티네는 못 이기는 척 그 팔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하고 싶은 건?”
“……나 그러면,저 핫도그 먹고 싶어.”
소박한 바람이었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이동할 때마다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길을 터 주었다.
꼬치를 굽던 상인이 멍하니 가판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니,근데 일단은 잠행 중이시잖아? 누가 봐도 타르칸 전하와 아리스티네 전하시지만! 어쨌든평복차림이시잖아?’
상인이 번뇌하는 사이 메뉴판을 본 아리스티네가 중얼거렸다.
“……종류가 많구나.”
제왕안으로 핫도그를 먹는 걸보고 너무 맛있어 보여서 밖에 나가면 꼭 먹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종류가 많을 줄 은 몰랐다.
‘대체 뭘 먹어야 하는 거지.’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바쁘게 메뉴판을 훌는것을 보고 타르칸이 말했다.
“모차렐라 소시지 핫도그. 설탕,케첩,머스터드 전부 다 뿌려서.”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바라봤다.
“너 치즈 좋아하잖아. 그리고 단것도 좋아하고.”
“응. 잘 아네?”
치즈도 단것도 전부 이곳에 와서 처음 먹어 본 것들이었다.
한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타르칸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타르칸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 핫도그가 나와서 아리스티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핫 도그를 호호 불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짭조름하고 달콤하고 매콤한,자극적인 맛이 혀를 감싼다.
거기에 쭈욱 늘어나는 고소한 치즈가 더해지자 순식간에 행복 해졌다.
‘맛있어!’
아리스티네의 뺨이 말랑하게 풀리는 것을 본 타르칸이 피식 웃었다.
어떠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는 얼굴이었다.
신이 난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타르칸, 나 저기 레모네이드도 마셔 보고 싶어. 파란 거.”
타르칸의 궁에 와서는 꽤 많은 음료를 접했지만,파란색 음료는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레모네이드도 손에 넣고 이어서 닭꼬치와 초코 바나나 크레이프,바닐라 콘 아이스 크림까지 섭렵했다.
타르칸은 “좀 다 먹고 다른 거 사라” 하고 말했지만,아리스티네가 손짓하는 것을 전부 다 사 주었다.
결국 타르칸의 손에는 길거리 음식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되었다.
“손이 크니까 좋구나.”
손가락 세 개로 레모네이드 컵을 잡은 걸 보고 아리스티네가 감탄했다.
“내 남편이 이렇게 유능할 줄 이야.”
타르칸은 어이없는 웃음을 홀렸다.
그를 짐꾼으로 쓰는 것으로 모자라 이런 칭찬이라니.
다른 사람은 결코 그에게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었다.
“이제라도 인정해 줘서 다행이군.”
타르칸이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숙여 타르칸이 들고 있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쭉 빨았다.
“아,시원하다.”
더위를 날려 주는 청량한 맛이었다.
“너도 마셔 봐. 덥잖아? 엄청 시원해.”
아리스티네의 말에 타르칸의 시선이 레모네이드를 향했다.
컵의 한가운데에는 빨대가 꽂혀 있었다.
당연히 빨대는 하나였다.
“……이걸 나보고 마시라고?”
“안 더워? 좀 시긴 한데 그래도 맛있어. 시원해서.”
아리스티네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타르칸의 시선이 다시 빨대로 향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지만,그는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몇 번이고 빨대에 닿았던 걸 생생하게 기 억했다.
‘아니, 아니지. 아니야.’
왜 자기 혼자 의식하는가.
아리스티네가 아무렇지 않듯 자신도 아무렇지 않다.
타르칸은 빨대에 입술을 댔다.
꿀꺽,레모네이드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때, 시원하지.”
“ 응”
타르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시원한진 모르겠다. 맛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스티네가 들고 있던 닭꼬 치도 내밀었다.
“이것도 맛있어. 살짝 매콤해.”
타르칸은 그것 역시 받아먹었다.
매콤하다고 했는데,맛을 잘 모르겠다.
“여기 음식들 궁에 비하면 맛 없는데,그래도 맛있다?”
아리스티네가 빈 꼬챙이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느냐며 돌아보는 시선에 타르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빈손으로 아리스티네의 머리를 꾹 눌렀다.
“나도 맛있었어.”
타르칸은 입맛이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이런 길거리 음식 따위 전혀 맛없어야 하는데,이상하게 맛있다.
무슨 맛인지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으면서.
“근데 다른 사람하고는 이러지 말아라.”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머리 위에는 타르칸의 손을 얹은 채였다.
“당연히 안 그러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아리스티네가 답했다.
여름 햇살 아래에 보랏빛 눈동자는 색이 더 연하고 투명했다.
타르칸은 왜인지 명치가 흑 내려앉는 것 같았다.
덜컹,하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린다.
다른 사람하고는 당연히 안 이런다니,그건一.
그 말은.
“이거 좀 품위 없는 짓이잖아. 오늘은 뭐 어쨌거나 잠행이니까.”
아리스티네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있지만,어쨌거나 ‘전하!’ 하면서 무릎을 꿇진 않으니까.
잠시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던 타르칸이 하아,한숨을 쉬며 손을 뗐다.
이런 여자인 걸 알고 있었다.
Chapter 25. 제비세요?
신문이 난리였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무려 평복을 한 채 길거리 데이트를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왕자 부부 비밀 데이트?
성숙한 시민 의식, 다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해 줘
왕자 부부의 커플 패션 알아보기
서로 먹여 주는 왕자 부부의 다정한 한때
왕자 부부가 다녀간 노점상 리스트
때 아닌 성수기? 노점상, 기쁜 비명
‘아니,가십지도 아니고 주요 일간지에서 이런 기사를 내보내는 게 정상인가.’
아리스티네는 어이가 없었다.
일간지가 이 정도이니 가십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긴 아예 소설을 써 놨다.
애초에 데이트도 아니었다.
‘외근 업무였지.’
타르칸의 진짜 연인인 디오나가 보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아니,제 남친이 알아서 해 주겠지.’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티네는 나무 그늘 아래에 발라당 누웠다.
파릇한 잔디 위에 그녀의 은발 과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흐트러졌다.
무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이렇게 그늘 아래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좋다……’
아리스티네는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금빛 햇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기사가 나고 난 뒤,궁인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응흐흐,웃으 며 쳐다봐서 피신을 나온 참이 었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풀 향기를 가득 싣고 온 여름 바람의 감촉을 즐겼다.
메스를 만들고 나서부터 이렇 게 여유로웠던 적이 있었는가.
‘물론 현장은 바쁘겠지만.’
이게 바로 사장이기에 가능한 사치였다.
살며시 눈을 떠 고개를 트니 박새가 포르르 날아가는 게 보 였다.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어디선가 이 광경을 봤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것도 최근에.
‘뭐였지?’
아리스티네의 머리는 빠르게 기억 속 장면을 끄집어냈다.
얼마 전,중앙 정원에 있는 폭포를 구경하다가 제왕안으로 보 게 된 장면이었다.
지금 보는 것과 똑같은 날씨 에,똑같은 하늘에, 똑같은 박새 -박새가 생긴 게 거기서 거기 이지만-가 날아가는 게 수면 거울에 비쳤다.
그리고 그 귀여운 박새는…….
찍,똥을 쌌다.
사람 머리 위에.
느긋하게 정원 산책을 즐기다가 봉변을 당한 피해자가 불쌍 했다.
장면은 그걸로 끝이었다.
날아가던 새가 사람 머리 위에 똥을 찍 싸고 튀는 장면이 전부 라니.
‘그런 것 따위 보고 싶지 않 아.’
그렇게 생각해 봤자 제왕안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유용한 장면도 많이 봤지만,이렇게 정말 쓸데없는 장면도 많이 보게됐다.
‘오늘 날씨랑 너무 비슷해서 그런가. 생각이 나네. 그 사람 잘 씻었을까.’
뭐,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일 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근데 구름 모양도 똑같은 것 같은데?’
설마 지금 아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피해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머리카락은 아주 밝은 백금발이었다.
체모가 어두운 아이루고인들에 게서는 보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공교로운 우연이 있을 리가.’
피식 웃곤 아리스티네는 상체 를 일으켰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
정원을 산책하는 남자를 발견한 아리스티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머리카락은.....
‘백금발?!’
정수리에 새똥이 없는 것만 다를 뿐, 똑같은 색이었다.
체격도 제왕안으로 봤던 피해 자와 비슷했다.
‘아니,옷이 똑같잖아?’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자유롭게 창공을 유영하는 박새는 점점 남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벌떡 일어났다.
“저기!”
아리스티네의 외침에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심해!”
남자가 뭐지,하는 표정으로 멈춰 섰고,그 순간.
찍.
박새가 쾌변하고 날아갔다.
남자는 제 눈앞에서 빠르게 낙하하는 무언가를 보고 시선을 내렸다가 표정을 굳혔다.
구두 앞코를 살짝 비껴서 새똥이 떨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갔으면 머리에 맞았을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에게 다가온 아리스티네가 물었다.
“괜찮아?”
남자는 그제야 아리스티네에게 생각이 미쳤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담은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파랑이 인 호수처럼 흔들렸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맞아.”
되돌아오는 반응에 정신을 차린 둣 화들짝 놀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런 실례를.”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체격이나 전체적인 생김새로 봐서는 아이루고인이 맞는데,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밝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아니면 아이루고인치고 섬세한 얼굴 때문일 수도 있다.
거친 선을 가진 아이루고인에 비해 남자는 확실히 세밀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탓에 학자나 문사처럼 보였다.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서 아리스티네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뭘 은인씩이나.”
“저런 것에서부터 구해 주셨는데, 당연히 은인이지요. 머리에 맞았다면 어찌 됐을지.”
남자가 잔디 사이의 이물질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건…… 끔찍하지.”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으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답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