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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81화 (81/183)

81화

“그렇죠?”

남자가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고마워.”

아리스티네는 미소와 함께 답했다.

권력자를 향한 아부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정말인데요.”

남자가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뻗었다.

“이런 색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 리가 없죠.”

여름 햇빛에 찬란하게 부서지 는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쥐었다.

남자의 손끝에서 은발이 사라락 흩어져 내렸다.

“눈동자도 사진과 다르네요. 굉장히 오묘한 색이에요. 새벽하늘 처럼.”

“고마워. 너도 잘생겼어.”

아리스티네의 칭찬이 의외였는 지 선명한 푸른색 눈이 흑 커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가 푸 흐,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노란 오후의 햇빛이 그의 얼굴 에 나른히 내려앉으며 그의 얼 굴을 더 부드럽게 덧칠했다.

“아,감사합니다. 비전하의 마 음에 들다니 기분이 좋네요.”

남자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 로 말했다.

“그거 다행이네. 난 이만 가 볼게. 새똥 조심하고.”

아리스티네는 남자에게 인사했다.

남자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알았다.

하지만 조금 이따 대장간에 가 봐야 해서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남자에게 말을 건 것도 새똥을 맞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뿐이니까.

아리스티네가 바로 자리를 뜨려 하자 남자의 얼굴에 언뜻 흥 미가 비쳤다.

“이 시간에 자주 산책 나오세요?”

그 말에 돌아서려던 아리스티네가 남자를 보았다.

“그건 왜?”

남자가 매끄럽게 웃었다.

“나오면 비전하를 될 수 있나 해서.”

아리스티네는 “홈” 하며 고개 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타지에서 외롭지 않으세요? 친구를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

‘역시.’

남자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속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했는데 틀림없다.

사모님 외롭지 않으세요? 우리 친구가 되어 볼까요.

제왕안을 통해서 꽤 들어 본 말이었다.

‘뻔하지,뭐.’

지금 눈앞의 남자도 비슷한 소 리를 하고 있었다.

판단을 내린 아리스티네는 주저 없이 물었다.

“너,제비니?”

남자, 하미르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채 여유롭게 행동하는 그였으나,지금 이 상황에서는 제 페이스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제비라면 여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돈을 뜯어내는 한량 아닌가.

제비 취급을 당한 건 태어나 처음이다.

당연하다.

그는 아이루고 왕의 적장자였으며,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자이기도 했다.

제왕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존재.

그런데 제비라니.

평생 그와 연이 없는 단어였다.

“미안한데,난 관심 없거든. 돈 버는 걸로도 바빠서.”

눈앞의 황녀는 그의 속도 모르고 귀찮다는 둣 말했다.

“돈……?”

남편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타르칸인데 돈을 버느라 바쁘다니.

아리스티네는 하미르의 되물음에 아차,했다.

‘제비들은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건데 돈 이야기를 하다니.’

이래선 떼어 내긴커녕 오히려 더 달라붙게 생겼다.

메스 사업이 성공하자마자 귀신같이 돈 냄새를 맡은 제비가 달려들 줄이야.

‘사회란 이렇게 무섭고 냉혹한 건가.’

코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각오를 단단히 한 아리스티네가 하미르에게 말했다.

“게다가 집에 돌아가면 토끼같은 남편과 여우 같은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어.”

“토끼........”

하미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 렸다.

지금 제 남편-그러니까 타르칸을 무려 토끼에 비유한 건가.

하미르는 제 이복동생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아이루고인다운 놈이었다.

야성적이고,거칠고,날것 그대 로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

‘그런데 토끼라고……’

상상 속 타르칸의 머리 위에 토끼 귀가 뿅,하고 돋아났다.

‘황녀…… 엄청난 사람이구나.’

그것도 참 여러모로 엄청난 사람이 었다.

“너도 날 비전하라고 불렀으면 알잖아? 나 유부녀인 거.”

하미르가 무슨 상상을 하든 아리스티네는 제비를 퇴치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양심이 있으면 유부남이나 유 부녀는 건들지 않는 법이다.

‘아,그러고 보니 제비는 사모님만 노렸던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제비에게 양심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나는 생각 없어.”

아리스티네는 완전히 선을 그었다.

“나는 순수하게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요. 비전하가 궁금 해서.”

하지만 제비는 끈질겼다.

“그리고 직접 이야기해 보니 더 궁금해지네요.”

하미르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 울이며 입술을 늘였다.

색이 열은 백금발 몇 가닥이 그 움직임에 따라 얼굴 위로 흘 러내렸다.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일순 멍하게 쳐다볼 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에게는 통하 지 않았다.

“응,제비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아리스티네가 말하며 단호하게 웃었다.

졸지에 제비 취급을 받은 데다 가 아니라고 말해도 듣지 않으니 화날 만한데,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하미르의 눈동자에는 흥미만 더해졌다.

“이런,어떻게 하면 믿어 주실 지.”

짐짓 안타까워하는 음성에 아리스티네는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이대로 헤어져서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하미르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건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자신이 왕궁에 돌아온 이상 아리스티네와는 반드시 또 만날 수밖에 없다.

엉성한 작업을 거는 제비가 아 니라 1왕자 하미르로서 대면하 게 되겠지.

그때 아리스티네의 표정이 궁금했다.

“내가 하미르 왕자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면 믿어 줄래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리스티네가 하미르를 바라봤다.

귀찮아하던 아리스티네의 눈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알고 싶지 않아요? 비전하의 토끼 같은 남편의 정적인데.”

섬세하고 우아한 하미르의 눈 매가 유혹하듯 나붓이 휘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딱 잘라 말했다.

“비밀과 약점은 다른 말이지.”

“하지만 비밀이라는 건 숨기고 싶어 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비밀을 알아내서,뭘?”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었다.

“협박하라고?”

하미르는 대답 없이 짙게 미소 지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아리스티네가 갸웃하며 물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아. 또 원하는 게 있으면 싸워서 쟁취해야 하지.”

아리스티네는 언제든 싸울 준 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랏빛 눈동자가 다시 하미르 를 향했다.

“내가 먼저 비겁한 수를 써서 뒤통수칠 생각은 없어.”

담백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하미르는 미소 지었다.

흠결 하나 없는 매끄러운 미소 였으나,그 완벽함이 오히려 위 화감을 주었다.

“정치 싸움에 비겁한 것과 비겁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시다 니.”

순진하셔라.

뒷말은 삼킨 채 눈매를 사르르 접었다.

“순진한 것도,멍청한 것도 아니야.”

아리스티네는 하미르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집어내 말했다.

“그런 수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 자신에게 확신이 있기 때문이야.”

하미르가 멈칫,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바라본다기보다는 낱낱이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금빛 속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 가 선명히 빛났다.

보석一튀르쿠아즈 같은 눈동자 였다.

아름답고,차갑고,무기질적인 눈동자.

“물론 하미르 왕자가 이쪽의 약점을 쥐고 비겁한 수를 쓴다면一.”

아리스티네가 불끈 주먹을 치켜들었다.

“진정한 더티 플레이가 뭔지 보여 줄 거야.”

꽤 단단한 어조였다.

하미르의 미소가 일순 멈칫했다가,더 깊어졌다.

더티 플레이가 뭔지 보여 주겠다니.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사람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저 아래에서부터 웃음이 나왔다.

‘그거 기대되네요.’

하미르는 속으로 대답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해 주는 정보를 믿을 순 없지.”

“나는 정말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는데요.”

하미르는 재밌다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있 었을 뿐이지만,지금은 달랐다.

“그럼 좋아요. 다시 만나지 않으면 나를 믿는다고 했으니까.”

그냥 채우든,채우지 않든 상관없는 얕은 호기심이 아니게 되었다.

“오늘 만남은 이걸로 끝이고, 나는 비전하를 찾아다니지 않을 거예요. 물론 이곳에 오지도 않을 거고.”

이렇게 끝내기 싫어졌다.

“대신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면 친구가 되 는 걸로.”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스토킹하는 거 아냐? 우연인 척 막.”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의심하 고 경계하는 모습에 하미르가 웃었다.

“하하,안타깝지만 나도 바쁜 몸이라 비전하를 따라다닐 시간은 없어서.”

미심쩍은 눈으로 하미르를 바 라보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진짜 우연이라면.”

“약속한 겁니다.”

“응”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자,하미르는 “그럼” 하고 인사한 뒤 멀어졌다.

그렇게나 질척였던 것에 비하면 산뜻한 퇴장이었다.

오늘 만남은 이걸로 끝이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둣이.

‘홈……. 이상한 사람이네.’

빨리 끝내고 싶어서 남자의 제안에 좋다고 대답한 거긴 했다.

‘하지만.’

정말 제비가 아니라면 친구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나 친구가 무칼리 한 명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울해졌다.

‘아니, 진짜 한 명뿐인가?’

아리스티네는 당황해서 그간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리트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는 직원이었다.

상사가 친한 척 들러붙으며 주말에 어디 가자,뭐 하자 이러면 꼰대라고 했다.

‘꼰대는 안 돼. 꼰대는 되지 말 자!’

우미루나 조디악이 떠올랐지만,친구라고 해도 되는가?

‘해도 되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다.

‘지인과 친구 사이의 단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인간관계를 수면 거울로 배운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 였다.

아리스티네는 끙,하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여름 하늘은 쨍한 푸른빛으로 눈에 시리도록 박혔다.

그래도 아름다웠다.

아리스티네가 보지 못했던,높다란 담에 막혀 있지 않고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

‘친구 많아지면 좋겠다.’

* * *

“하미르 오빠!”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온 예니 카리나가 답삭 하미르에게 안겨선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여전히 어리광쟁이구나.”

“치,그럼 안 돼?”

“안 되긴.”

예니카리나가 킥킥 웃으며 하미르의 팔에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녹음이 우거 진 숲속을 거닐었다.

“오빠가 없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알아?”

“그랬겠지. 타르칸이 결혼했으니까.”

그 말에 바로 떠오르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예니카리나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반편이!”

씨근덕거리며 외친 예니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반편인 줄 알았는데 꼬리 아흡 달린 여우야. 혼자 고고 한 척하면서 할 건 다 한다니 까?”

예니카리나가 콧김을 흥,뿜으 며 하미르를 올려다봤다.

“걔가 얼마나 예니카를 괴롭혔 는지 알아? 부왕 앞에서도 먹.... ”

그녀는 흥분해서 그간 아리스티네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다 털어놓았다.

“거기다가 웬 메스를 만들어 서……

투덜거리던 예니카리나가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빠가 그 황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방법을 알려 줬다며!”

하미르는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모후를 만나서 말했던 게 어제인데,예니카리나가 알고 있다는 건 벌써 행동에 들어갔다는 뜻 이다.

‘모후께서 그간 꽤 안달 나셨나 보군.’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하미르의 머릿속에 아까 만났던 아리스티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우리 오빠야!”

예니카리나가 와락 하미르를 끌어안았다.

이걸로 그 여우가 활개 치고 다니는 건 끝이다.

“꽤 고심해서 메스를 만들었나 본데,그게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지는 꼴을 보면 웃기겠다,그 치?”

저절로 킥킥 웃음이 나왔다.

황녀가 절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게 왜 예니카한테 기어올라선……”

그렇게 말하던 예니카리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하미르를 올려다보자 그는 여 느 때와 같은 미소를 걸친 채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예니카리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미르 오빠,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팔을 당기며 묻자 그제야 하미르의 시선이 예니카리나를 향했다.

“오랜만에 본 건데 딴생각이나 하고. 예니카 말은 듣지도 않고. 예니카 너무너무 섭섭해.”

예니카리나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미안,미안.”

하미르가 웃으며 예니카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니카리나는 잠시 그 손길을 받다가 흥,하고 말했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고마워.”

대답하는 하미르를 슬쩍 올려다본 예니카리나가 불쑥 물었다.

“그렇게 웃는 걸 보니 좋은 일 이 있었나 봐?”

하미르의 시선이 예니카리나를 향했다.

“예니카한테도 알려 줘.”

예니카리나가 어리광을 피우며 하미르에게 매달렸다.

“ 음........”

하미르는 잠시 나무 사이로 날 아가는 새를 보았다가 입을 열 었다.

“신기한 사람을 봐서.”

“신기한 사람?”

예니카리나가 미간을 찌푸렸

자신의 오라버니는 항상 미소 를 머금고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대하지만,사실 타인에게 관심 따위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다니?’

“응,생각하고는 달라서.”

그래서인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하미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니카리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말인즉슨,만나기 전에도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다는 뜻이렷다.

자신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여자야?”

“응,여자.”

그것도 유부녀.

하미르가 깊게 미소 지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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