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선철이 없다고?”
아리스티네가 황당하다는 얼굴 로 되물었다.
아니,어떻게 다른 것도 아니고 철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도무지 구할 수가 없어서……”
리트렌이 보이지 않는 꼬리와 귀를 추욱 내린 채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리스티네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리트텐이 죄송해할 건 아니지.”
그녀는 대장간과 이어진 창고 문을 열어 보았다.
메스가 담긴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주문량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생산량은 이게 전부야?”
“남아 있는 철로 더 만들 수 있겠지만,지금 생산 속도로 봤을 땐 내일이 한계입니다.”
“내일이라고.”
아리스티네가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톡톡, 그녀의 손가락이 초조하 게 제 팔꿈치를 두드렸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설마 철을 못 구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상단과는 연락해 봤어?”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렇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예, 상단 쪽에서도 갑작스럽게 공급이 뚝 끊겨서 곤란하다고하더라고요.”
철괴 소진이 일정한 만큼,당연히 매주 선철이 들어오도록 핑크핑크 냥젤리 상단과 주문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오늘이 입고일인데 철괴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철괴 공급처에서 재고가 없다면서 거래를 일방적으로 엎었다고,상단 측에서 정말 죄송하다며 몇 번이나 사과했습니다.”
“공급처에서?”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물량을 빼 간 것 같습니다.”
“우리 쪽과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서 달라고 한다고 그대로 줘?”
“담당 직원이 공급처에 담판을 지으러 갔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소용없을 거야. 그렇게 쉽게 내줄 거면 애초에 재고가 없다고 엎지 않았겠지.”
아리스티네는 후,입으로 바람 을 내뱉었다.
‘……핑크핑크 냥젤리가 타르칸의 상단이라는 걸 알면 못 그러겠지만.’
지금 대외적으로 핑크핑크 냥 젤리는 이렇다 할 뒷배 하나 없는 상단이다.
타르칸의 주거래 상단이라 어 느 정도의 명망은 있지만,그뿐.
타르칸이 소유했다는 것과 타르칸이 애용한다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거기다 이 일을 꾸민 흑막이 따로 있을 테니.’
왕후.
철괴 유통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이다.
“다른 철괴 유통처는?”
“상황이 다 똑같습니다. 재고가 없어서 다들 휴업한다고.”
“누군가가 선철을 다 사재기한 후 독점해 쥐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어쩌지요. 주문은 밀려들고 있 는데……”
대장장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리스티네는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듯 입을 열었다.
“왕후가 작정한 이상 일이 힘들게 되었어.”
대장장이들은 홈칫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모두 은연중 스키엘라 공작을 비롯한 왕후파에서 일을 꾸몄을 거라곤 짐작했다.
하지만 선뜻 그 말을 먼저 꺼 내긴 저어됐다.
그 탓에 서로 의견을 나눌 때 이야기가 빙빙 돌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가 먼저 왕 후 이야기를 꺼내면서,오히려 편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스키엘라 공작가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광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장장이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시중에 유통된 선철만 사재기해서 회수하고,본인들이 광산에서 캐낸 철을 풀지 않는 것으로 간단하게 선철 시장을 독점했겠네.”
‘철괴 유통처 입장에서는 슈퍼 갑 님의 말이었겠고.’
철광산 소유주인 스키엘라 공 작가에서 거래를 끊겠다고 하면 철괴 유통처는 밥줄이 끊기는 거나 다름없다.
회유와 압력을 동시에 넣었을 테니 뒷배 없는 상단은 포기하 자 싶었을 거다.
이미 계약상 판매 완료된 선철을 다른 곳에 팔아넘겼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당연히 신뢰도가 깎이겠지만, 그래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 겠지.
다른 철괴 거래처들도 모두 같 은 결정을 내렸으니 혼자만 신 뢰가 깎인 것도 아니었다.
모두 신뢰가 깎인 거라면,결국은 안 깎인 것과 같다.
‘거기다 잘만 하면 왕후 쪽에 연줄도 댈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거고.’
아리스티네가 입매를 늘여 웃 었다.
‘꽤나 똑똑한 계략이었네.’
왕후나 스키엘라 공작이 이렇 게 예리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니.
고작해야 메스에 관련해서 의료 소송 논란이나 키울 줄 알았는데.
‘내가 방심했어.’
사실 아리스티네의 생각이 옳았고,하미르의 개입으로 방향이 달라진 거였지만,그녀가 알 순 없었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다른 나라의 철광석을 수입하면……”
“아니,그럴 순 없어.”
대장장이의 의견에 아리스티네 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을 준비한다고 생각할 거니까.”
“전…… 쟁이요?”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단어에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철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다.
아이루고에서 대량의 철을 사들였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지금 기껏 마련된 평화 무드를 단번에 깨트리고 국제 정세를 긴장시킬 것이다.
실바누스 제국의 주도 아래,각 나라에서 아이루고를 힐난할 것이다.
‘역시 야만인이라 피를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피를 보려 한다고 하겠지.’
공식적으로 외교 압박이 들어 올 터.
‘그리고 모든 것은 이 일을 벌인 내게 화살로 돌아오겠지.’
왕후 쪽에서도 그걸 알 거다.
그걸 알아서,아예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거다.
‘정말 노련한 수야.’
비록 정적이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의 수완이었다.
‘거기다.’
왕후파는 모르겠지만 아리스티네만 아는 게 하나 더 있다.
‘황제에게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줄 수도 있어.’
아이루고가 먼저 전쟁을 준비하니 당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명분.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써먹을 순 있겠지.’
아리스티네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그러면……”
불안한 얼굴을 한 대장장이들 을 둘러본 아리스티네가 싱긋 미소 지었다.
마치 그들을 안심시키듯이.
“어차피 이런 선철 독점은 오래 못 해.”
확실히 거침없던 아리스티네의 질주를 단번에 끊어 놓은 굉장한 수였다.
‘하지만 동시에 왕후에게도 위험한 계책이기도 하지.’
이런 주요 물자,그것도 군사력과 관련된 걸 독점하는 행태를 어느 통치자가 좋아할까?
왕뿐만 아니라,다른 귀족들도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강행했다는 건……’
첫째로 그 모든 사항을 감수할 만큼의 효과가 있어서다.
실제로 지금 아리스티네의 독주를 단번에 막지 않았는가.
그리고 둘째는.
‘문제점을 제기하거나 불만을 토해낼 귀족들을 사전에 잠재웠다는 뜻이지.’
이미 굵직한 대귀족 여럿과는 사전 협의가 끝났을 거다.
동조하지 않은 대귀족도 있겠지만,그 수에서 밀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독점을 오래 끌지는 못해.’
대귀족들과의 협의 과정에서도 기간을 제한했을 거다.
그러니 며칠 눈감아 주겠다고 수락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기한 없는 독점 을 눈감아 주겠다고 했을 리는 없다.
다른 물건을 독점해서 시장을 교란해도 말이 나오는 게 당연 하다.
하물며 철은 군사 물자였다.
독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왕후에게 오히려 안 좋다.
아이루고 왕,네프테르 역시 이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고.
“문제는 아주 잠깐만 공급에 차질이 생겨도 우리에겐 치명적 이라는 거야.”
이미 각 병원에 메스를 입고하기로 한 날짜가 있다.
지금 상황으로선 도저히 그 날짜에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거래의 기본은 신뢰다.
심지어 아리스티네의 사업은 이제 막 시작한 신생 업체.
한두 군데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거래처에서 펑크가 난다면?
당연히 이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왕후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한탕 하려 했다거나,돈 욕심 에 눈이 멀어서 감당할 수 없는 주문량을 받았다거나,사람을 희 망 고문 한다거나.
어떤 말이든 따라올 것이다.
이미 사건은 일어났고,거기에 덧붙일 말이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까.
아리스티네가 만든 메스를 사용한 병원들에서는 수술 시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는 87퍼센트나 낮아졌다.
수술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들이 새 메스에 대해서 엄청난 기 대를 품게 되는 건 당연했다.
지금 새 메스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기존의 메스로 수술합시다 -라고 하면 받아들일 환자가 어디 있겠는가.
‘줬다가 뺏는 기분이겠지.’
절박한 만큼 원망할 대상을 찾 기 마련이다.
‘왜 메스가 준비되지 않았냐’부터 따지면 당연히 아리스티네 쪽에서 메스 공급을 제대로 못 했다는 결론이 날 터.
“왕후 쪽에서 철광석을 일부러 독점했다는 것을 고발하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중거를 찾는 순간 이미 늦었겠지.”
그땐 이미 왕후 쪽에서 선점을 풀었을 시기일 거다.
뒤늦게 여론이 뒤바뀔 수 있겠지만,그동안은?
여론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 메스 이외의 다른 것도 비난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나빠진 여론은 다시 되돌아오기 힘들다.
“그럼 어찌해야……”
“나를 믿고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아리스티네가 대장장이들을 향 해 빙긋 웃었다.
이 절망 속에서도 그 웃음은 눈 속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리트텐을 포함한 대장장이들은 멍하니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좌절하고 분 노할 사람은 아리스티네였다.
리트렌이 열심히 만들긴 했지만, 모든 것은 아리스티네가 계 획하고 만들어 낸 토양에서 나왔다.
그녀가 생각하고 일구고 가꿔 낸 모든 것들이 권력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티네는 침착하게 차근차근 하나하나 살피며 해결 방법부터 모색하고 있다.
화내거나 소리치거나 울분을 토하지도 않는다.
그에 반해 자신들은 오늘 와야 할 선철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상단과 연락하며 어찌나 분노하 며 날뛰었던가.
차마 아리스티네의 앞에선 입 에 담을 수조차 없는 걸쭉한 욕설을 지껄였다.
대장간에 있던 대장장이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아리스티네 를 바라보았다.
이 자그마하고 가녀린 사람이 그들보다 강인했다.
* * *
“아리스티네.”
타르칸이 어깨 보호구를 떼며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앞에 앉은 채 종이에
현재 상황을 정리해 나가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었다.
“타르칸?”
보호구도 덜 땐 것을 보니 훈 련 중에 급하게 왔나 보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빠르게 자 신에게 다가오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타르칸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일 있냐고?
그건 그가 그녀에게 해야 할 소리였다.
“선철을 다른 곳에서 다 선점 해 갔다며.”
“응,그랬더라고.”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마수의 사체를 손에 쥐고 시장에 풀지 않으면 돼.”
그의 얼굴이 꽤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아리스티네는 살짝 웃었다.
“응,그러면 그쪽도 꽤 곤란해 지겠지.”
스키엘라 공작가가 세계 최대 규모의 철광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쪽은 세계 최대의 마수체 공급처 였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걸 예상했을걸?”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쏙였다.
“나를 물자로 압박하는 전략인데,당연히 남편인 네가 가진 물자를 통해 반격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을 거야.”
아리스티네는 “상대도 꽤 똑똑한 것 같으니까” 하고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면.”
“응,대비해 놨겠지. 아마 보름 정도 선점을 풀지 않고 버틸 거야.”
보름.
짧다면 짧은 순간이다.
철이 생필품인 것도 아니니 그 정도로는 국민의 생활에 큰 타격은 없다.
하지만.
“보름이면 충분하니까,날 무너 뜨리는 데엔.”
안 그래도 주문량보다 메스 물량이 한참이나 부족한 차다.
아직 계약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계약한 것만이라도 해결해야 한다.
‘만약 이 광경을 제왕안으로 미리 봤다면……
“후,진작 알았으면 미리 마련 해뒀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타르칸이 획 몸을 돌렸다.
“어디 가?”
“산책.”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타르칸의 팔을 잡았다.
“왕후한테 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앞을 가로 막듯 섰다.
“가지 마.”
타르칸을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흔들림없이 고요하고 단단했다.
“내 사업이고,내가 할 수 있어.”
그 말에 타르칸이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 온다.
“나는.”
네 남편이야.
“.....네 사업 파트너잖아.”
타르칸이 단어를 물어뜯둣이 내뱉었다.
“응,그치만 이건 엄밀히 말해 너랑 별개의 사업체지.”
아리스티네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다.
처음 아리스티네를 봤던 날, 어딘지 만들어진 것 같다고 느꼈던 미소.
타르칸은 하,하고 웃었다.
그 말이 유독 선명하게 박혔다.
맞는 말이었다.
“이 정도는 나 스스로 해결해 낼 수 있어.”
“그래,해결할 수 있겠지.”
타르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 듯 낮았다.
아리스티네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진 계속 옆 에서 지켜본 그가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나를 조금 더一.”
의지해도 좋잖아.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선연한 욕망에 타르칸은 입을 다물 었다.
“타르칸.”
아리스티네가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네게는 항상 고마워.”
고맙다는 말이 이토록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거였나.
타르칸은 사납게 웃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