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내 메스 사업에 논란이 생기면 너한테까지 피해가 가잖아.”
네프테르가 걱정했던 것도 이것이었다.
〈리네,실패하면 왕후가 움직일 거다.〉
아리스티네는 진지하게,심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네프테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경고이기도 했으며,각오를 시험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一.
‘날 걱정하시는 말이었어.’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무언가가 슬며시 번진다.
〈널 한번 믿어 보마.〉
네프테르는 아리스티네에게 믿고 맡겨 보겠다고 했다.
딱히 네프테르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아버지가 생겼으면,하고 바랐 던 것은 아주 어릴 적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그의 믿음에는 보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타르칸에게도.’
그가 좋은 파트너인 만큼,아리스티네 역시 그에게 좋은 파트너이고 싶었다.
피해 같은 거, 절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보랏 빛 눈동자를 보며 타르칸은 이를 악물었다.
“폐 끼치고 싶지 않다고?”
“응.”
“넌 지금 이걸 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커졌다.
타르칸은 하하,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리스티네의 표정을 보면 대답을 알 수 있었다.
폐 끼쳐도 돼.
너는 내게 얼마든지 폐 끼쳐도 돼.
귀찮게 해도 돼.
왜 모르는 건가.
왜 그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까.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눈치를 살피더니 사과했다.
“미안.”
왜 사과를 하는 거야.
그게 더 싫었다.
“나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겨서. 네가 곤란한 것도 이해해.”
하나도 곤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잘 해결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타르칸을 바라보는 아리스티네 의 눈동자가 결의로 가득 차올 랐다.
“같이 축하 파티 하자.”
웃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타르 칸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년 정말 거슬리는 여자야.”
그 말을 끝으로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지나쳤다.
타르칸의 팔목에 닿았던 아리스티네의 손이 떨어져 나간다.
타르칸은 그 빈 온기를 느끼면 서 턱에 힘을 주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서서히 아리스티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내가…… 그랬어?’
타르칸에게 자신은 거슬리는 사람이었구나.
“하……”
아리스티네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일로 타르칸의 신경이 날카로운 건 알겠다.
그래서 쭉 반응이 이상했던 거고.
그래도 사과하면 이해해 줄 알았다.
뾰족 세웠던 날을 누그러트릴 거라고.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좀 괜찮은 파트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거슬리는 여자라니. 그에게 그런 존재였던가.
‘하긴,애초에 나 말고 디오나랑 결혼하고 싶었겠지.’
타르칸과 결혼한 건 아리스티네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그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달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나는 타르칸에게 너랑 결혼하길 잘했다느니,그런 말까지 했으니까.’
“으아아아.”
너무 무신경했다.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거슬렸을까.
거기다 괜히 사업하겠답시고 일이나 벌이고 결국 문제가 생겼으니.
“타르칸에게는 내가 그랬구나.”
아리스티네는 마른 웃음을 삼 켰다.
어차피 곧 이혼할 남편이다.
그러니 타르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 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아리스티네는 이마를 감싸 쥐 었던 손을 내렸다.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시선이 낮게 내리깔렸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 만이 일렁거리며 빛을 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열렸다.
“역시 메스 생산에 문제가 생긴 게 잘못이야. 왕후 짜증 나!”
진짜 짜증 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겨 내자!’
이겨 낼 수 있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에서 침울한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자세가 되어 테이블로 돌아갔다.
‘일단 관련 사항을 마저 다 정 리하고,해결 방법을 모색하자!’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걱정한다고,우울해한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 였다.
궁인들이 조심스레 방 안에 들 어왔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비전 하.”
“괜찮아. 무슨 일이야?”
“비전하,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올 사람이 없는데? 아리스티네 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의문을 읽은 궁인이 조 용히 답했다.
“카탈라만에서 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비전하.”
카탈라만 대장간의 도장인,볼 라튼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리스티네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만류했다.
“볼라튼 공이시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그가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무척 신경쓰였다.
‘설마 리트렌을 데려가려고 온 건 아니겠지?’
스테인리스 스틸을 개발한 리트렌은 그야말로 가장 각광받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대장간의 수치라고 놀림당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어 느 곳에서도 그를 데려가고 싶 어 했다.
‘에이, 아닐 거야.’
단 한 번 만나 봤을 뿐이지만, 아리스티네가 본 볼라튼은 그렇 게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와 귀하신 분의 시간을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볼라튼이 자리에 앉으며 바로 말을 꺼냈다.
“일전에 개인적으로 선물을 제작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용건에 놀랐지만, 아리스티네는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볼라튼 공의 선물인데 누구나 설레어 하며 기다리고 있을 걸요.”
“아쉽게도 비전하를 위한 선물이 완성되진 않았습니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그 말을 하려고 방문했다는 건가?
어차피 볼라튼의 호의에서 시작된 말이었고,기한은 정해 두 지 않았으니 늦어져도 상관은 없었다.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티네는 예의를 차려 말했다.
“천천히 주셔도 괜찮아요. 설레는 날이 늘어나는 거니까.”
“비전하께서 괜찮으셔도,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볼라튼에게서 돌아오는말이 심상잖았다.
격정적인 그의 태도에 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라 볼라튼을 바 라보았다.
“카탈라만의 도장인으로서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은 것 같아 서 굉장히 불명예스럽군요.”
그의 얼굴은 침통하고 엄중했다.
“아니……. 그냥 나중에 주셔도……”
“아닙니다! 이 불명예는 말로 만 씻을 수 없는 법이죠!”
그렇게 말한 볼라튼이 자신을 따라온 다른 대장장이에게 눈짓 했다.
시선을 받은 대장장이가 문밖 을 향해 손짓했다.
‘뭐지?’
아리스티네가 의문을 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볼라튼이 말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부족하나마 이거라도 받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 누군가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수레?’
아리스티네의 눈이 흑 커졌다.
“설마..!”
그녀의 시선이 볼라튼을 향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 빛났다.
볼라튼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맞습니다.”
아리스티네의 앞에 수레가 멈춰 섰다.
섬세하게 연마된 수레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어 굉장히 아름 다웠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수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상자를 열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 안에 가득 담긴 것이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아……
철괴였다.
수레 안에는 똑같은 상자가 총 다섯 개 실려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떨리는 손으로 철괴를 쓸었다.
이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얼마나 사람에게 힘을 주는지 모른다.
지지 않을 거라고,이겨 내자 고 생각했지만 역시 기운이 빠졌나 보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을 받자 가 슴속에서부터 용기와 의지가 샘 솟았다.
“볼라튼 공……”
아리스티네는 감격한 눈으로 볼라튼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정도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실 테지요.”
그 말대로다.
생산해야 하는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 정도로는 하루 주문량도 못 채운다.
“그렇다고 해서 볼라튼 경의 도움이 작아지는 건 아니지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볼라튼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은 모두 흐물흐물 녹은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다른 곳도 아닌 카탈라만의 대장장이인 만큼,그들은 왕족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왕족들은 까다롭고 쉽게 만족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리스티네는 작은 도움에도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하하,부족하실 테니 더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더 있다고요?”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화악 밝 아졌다.
“예,하지만……. 부족하실 겁 니다.”
볼라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 졌다.
그로서도 아리스티네를 더 도 와주고 싶었지만 이게 한계였다.
“전부 대장간에 갖다 놓도록 해.”
“예,도장인.”
대답한 대장장이들은 아리스티네에게 깊게 예를 표한 다음 수레를 끌고 방을 나갔다.
“정말 볼라튼 공과 카탈라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아리스티네의 말에 볼라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비전하 께 약속했던 게 늦어져서 제 명 예를 지키기 위해 철괴를 가져 왔을 뿐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리스티네는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보구나.’
굳이 명분을 대야 하는 이유.
‘왕후겠지.’
대장간은 철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철광산을 가지고 있는 스키엘라와 관계가 틀어지면 타격이 클 것이다.
일인자 카탈라만의 자리를 다른 대장간들이 넘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데도 나를 도와준 거야.’
정말 감격스럽고 고마웠다. 하지만.
‘왜?’
그런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전하를 돕는지 궁금하신가 보군요.”
볼라튼이 미소 지으며 먼 곳을 바라봤다.
“비전하께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빚이라니요?”
“예,제가 못난 스승인지라,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제자 놈을 잘 이끌어 주지 못했죠.”
“아……”
리트렌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루 앞보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을 보고 탈선했다며 많이 꾸짖기도 했습니다.”
커 가는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자신과 다른 길을 간다며 헛 짓거리만 한다고 생각했다.
주름진 볼라튼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하지만 스승으로서 탈선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쇳물이 든 딱딱한 손이 쿵,제 허벅지를 쳤다.
볼라튼은 리트텐을 끊임없이 지지하고 도와주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리트렌과 그 의 재능을 아꼈다.
“리트텐의 재능을 꽃피워 주셔서,그 애를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볼라튼이 아리스티네에게 고개 를 숙였다.
“고개를 드세요, 볼라튼 공.”
아리스티네는 다가가 그를 일 으켰다.
“제가 아니라 리트텐이 잘한 거예요. 그리고 그가 그런 실력자가 된 데에는 본인의 재능과 의지도 있지만,볼라튼 공의 가 르침도 있지요.”
“비전하……”
아리스티네가 생긋 웃으며 그 의 손을 다독였다.
“왜 다들 비전하께 구원의 여 신이라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그 날 비전하께서 카탈라만에 오시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아 찔합니다.”
볼라튼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리트렌은 그날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을 거고,많은 것이 지금 과 달라졌겠지요.”
“저도 그랬을 걸 생각하면 아찔 하네요.”
리트텐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 이었다.
“……비전하께 사죄드릴 게 있습니다.”
갑자기 심각해진 볼라튼의 얼 굴에 아리스티네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사죄라니요?”
* * *
목욕을 하고 싶다는 말에 궁인 들은 따뜻한 물에 긴장을 푸는 입욕제를 듬북 넣어 주었다.
궁인들을 모두 물린 채 아리스티네는 잠시 입욕을 즐겼다.
볼라튼 덕분에 급한 불은 꼈다.
‘하지만 정말 급한 불만 꼈어.’
볼라튼이 돌아간 즉시 대장간에 가서 확인한 결과,계약한 물량을 전부 소화해 내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야.’
이 사태를 완전히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는 보장은 없으니 그것까지 대 비해서.
‘할 수 있어.’
다짐하듯 생각하고,아리스티네는 물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수면이 흔 들리고,어느새 잔잔해진 수면에 전생-한국에서의 삶이 비쳤다.
전생을 보는 건 의지대로 제어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도 움이 되는지 모른다.
‘제발.’
아리스티네는 기도하듯 염원했다.
전생의 자신이 한 번 스쳐보기라도 했어도 좋다.
인식조차 하 지 못하고 지나쳤어도 좋다.
‘지금의 나는 잡아낼 수 있으 니까.’
수면 거울에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완전히 몰두해서 수면을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목욕물이 다 식었다.
궁인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밖에서 불렀으나, 아리스티네에 겐 들리지 않았다.
차가워진 물속에서 미동도 않 고 오래 있는 바람에 그녀의 입 술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아리스티네는 스스로의 상태를 미처 몰랐지만,그녀는 곧 쓰러 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