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84화 (84/183)

84화

아리스티네의 시야 끝에 무언 가가 들어왔다.

어릴 적,학교에서 갔던 현장 학습.

전생의 자신은 친구와 도시락 을 뭘 싸 왔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품에는 하등 관심도 없고 친구와 손을 꼭 잡은 채 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적혀 있는 설명 따위는 읽어 보지도 않고 획 지나친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왔고,지금의 아리스티네는 장면을 멈춰 그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

‘찾았다!’

아리스티네의 동공이 흑 좁아 들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몇 번이나 설명을 읽었다.

‘좋아,이거면……’

그때,욕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수면 거울을 흐 트러트리곤 욕실 문을 바라봤다.

‘뭐지?’

“문을 열어.”

타르칸의 목소리였다.

낮으면서도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

‘타르칸이 여기 왜……?’

생각하기 힘들었다.

너무 집중했던 여파일까? 머리가 조금 멍했다.

“하,하지만 전하!”

“비전하께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왕자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희가 책임질 거냐?”

궁인들이 막아서는 목소리,타르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뭔진 몰라도 말려야..’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는 데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좀 춥다.’

으슬으슬한 찬 기운에 오한이 들어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드러난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비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소리 높여 묻는 목소리에 아리스티네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응,들어……”

입술이 바들거려서 발음이 이 상했다.

“비전하?”

재차 묻는 목소리에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대답했다고 생각했는 데,안 들리는 걸까?

목소리가 작은지 큰지도 모르 겠다.

아리스티네는 다시 몸을 일으 키며 더 큰 목소리로 답했다.

“들,흐윽……”

몸에 힘을 주는 순간,정수리에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솟고 머릿속에 얼음을 집어넣은 것처럼 떵 하고 차가웠다.

‘일어나기 힘들어.’

부들부들 멸리는 몸을 보며 아리스티네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이상하잖아.’

이렇게까지 일어나기 힘든 건 확실히 이상하다.

그냥 목욕하다가 물이 식은 정 도인데 왜 이렇게…….

“비켜.”

멍한 정신에 타르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리스티네는 잘 가눠지지 않는 고개를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아까보다 상태가 현저하게 나 다.

그녀가 겨우겨우 문을 바라봤 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누군가가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시야가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티네!”

다급한 부름과 동시에 아리스티네는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대답해야 하는데.’

궁인들의 부름에도 욕실 안쪽 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적어도 궁인들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타르칸의 귀에는 아리스티네의 희미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곧 꺼질듯 가날픈 목소리였다.

초조해진 타르칸은 궁인들을 제치고 다급하게 욕실 문을 열었다.

아리스티네는 물속에서 욕조 턱 위로 팔을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채 엎드려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둣,고개를 들기 위해 몇 번이나 바르작거 린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들린 순간,타르칸은 심장이 무너져 내 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되었다.

사람이 저렇게 하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리스티네는 새하 였다.

입술에도 뺨에도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는데 스르록,아리스티네의 눈이 감기며 보랏빛 눈동자가 사라졌다.

가느다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저러다가 단단한 욕조에 어디 라도 부딪치면 큰일이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타르칸 은 이미 아리스티네를 안아 들고 있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몸이 반 응해 비호처럼 움직인 것이다.

가느다란 몸은 축 늘어진 상태 에서도 한없이 가벼웠다.

동시에 얼음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차가웠다.

타르칸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사람 몸이 이렇게 차가워도 되 는 건가?

타르칸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차가울 때가 어떤 때인지 알았다.

전장에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며,잃으며 견뎌내야 했던 온도였다.

“비전하!”

기겁한 궁인들이 재빠르게 다 가왔다.

아리스티네의 상태를 확인한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커다란 타월로 아리스티네의 몸을 덮는가 하면 바깥에 달려 나가 화로를 준비했다.

“전하,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일단 비전하를 이리로.”

궁인들이 타르칸에게 깊게 절하며 말했다.

타르칸은 궁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화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전면으로 들어오는 유리창 앞에 황동 화 로가 몇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화로 속에서 마법의 불꽃이 확 피어올라 순식간에 방 안을 따 뜻하게 덥혔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꽉 안은 채 장의자 위에 앉았다.

정신을 잃은 채로도 아리스티네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어도 저히 혼자 눕혀 둘 수가 없었다.

궁인들이 몇이나 달려들어 아리스티네의 머리를 말렸다.

“궁의를,아니 우미루를 불러 와.”

예,전하.

대답한 궁인이 빠르게 방을 나가고,다른 궁인이 도톰한 배스 로브를 들고 왔다.

지금 아리스티네의 몸에 두른 타월은 이미 축축해져 두르고 있지 않느니만 못했다.

“전하,잠시.”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품에서 떼어 놓는 것이 탐탁잖았지만, 결국 궁인에게 그녀를 내주었다.

궁인들은 아리스티네에게 조심스레 배스로브를 입히고,장의자에 뉘었다.

두툼한 겨울 이불까지 꺼내 덮은 후,혈액 순환을 돕기 위해 달라붙어서 팔다리를 주물렀다.

타르칸은 초조한 기색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 안이 이렇게 후끈후끈한데, 아리스티네의 혈색은 돌아올 기 미가 안 보였다.

“우미루는 아직인가?”

그 물음과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비전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우미루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장의자 위에 누워 있는 새하얀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 고 기함했다.

“내,나의 비전하께서……”

타르칸의 미간이 움찔했다.

몹시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그 것보다는 치료가 우선이었다.

“목욕하다가 쓰러졌다.”

“예, 오면서 궁인에게 어찌 된 일인지 들었습니다.”

우미루는 빠르게 다가와 아리스티네의 이마와 뺨을 만지고 심박을 확인했다.

외과의지만 그녀는 웬만한 내 과의보다도 실력이 나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독 증상은 없어요.”

그 말에 타르칸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혹시 아리스티네가 독을 먹은 건 아닐까,그걸 가장 걱정했다.

그래서 궁의가 아닌,우미루를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내과적인 부분에서는 궁의가 우미루보다 더 뛰어나겠지만,믿을 만한 자일지는 미지수다.

“그럼 왜 이러는 거지?”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는 건 혈액 순환에 좋지 않아요. 현기증이 난 상태에서 찬물에도 장시간 있었으니……”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이렇게 쓰러진다고?”

타르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한겨울에 얼음처럼 낙하하는 폭포수를 맞으며 수련을 했다.

타르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랬다.

고작 그런 걸로 앓아누운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전하나 전하 곁에 있는 무식, 아니,훌륭한 전사분들과 비교하면 안 되죠.”

우미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식은 물에 계셨다고 이렇게 쓰러지시다니요.”

궁인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겨울이면 몰라도 지금은 한여름이잖아요.”

한여름에 찬물에 좀 있었다고 이렇게 창백해져선 쓰러진다고?

누가 보면 눈 속에 파묻힌 사람을 구출해 낸 줄 알 것이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실바누스인은 약하니까요.”

우미루가 그들의 불안을 일축했다.

“거기다 피로가 쌓였어요.”

스테인리스 스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리스티네는 거의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워낙 체력이 약하신 분인데 제대로 쉬지도 않으셔서 피로가 많이 누적됐어요.”

메스를 출시하고 난 뒤 조금 쉬나 싶었는데 바로 철괴 선점 문제가 터졌다.

“그 상황에서 물이 식고도 한참 지날 때까지 목욕하시니 탈이 날 수밖에요.”

“그런……”

궁인들은 헬쑥해진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게 꼭 자신들의 탓 같아 가슴에 돌이 얹힌 듯했다.

목욕한 지 오래되어도 나오지 않아 몇 번 비전하를 불렀다.

하지만 ‘방해하지 말라’거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뭔가에 몰두한 채 대답하듯 웅얼웅얼하는 목소리라 방해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 썼다.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계신데 그걸 깨트리고 싶진 않았다.

목욕물이 식을 게 신경쓰이긴 했지만,한여름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게 그 결과였다.

“연약하신 분이라는 건 진작에 알았는데……”

“저희가 비전하를 제대로 보필 하지 못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요”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궁인들이 타르칸의 앞에 납작 엎드려 치죄를 청했다.

자신들의 안일함이 비전하를 저렇게 만들었다.

타르칸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 거리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아리스티네를 본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 었다.

피를 보고 싶다고,난폭하게 날뛰는 짐승이 그의 안 어딘가에서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마침 먹음직스러운 희생양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동공이 흑 좁아들며 맹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졌다.

잔혹한 기분에 목이 말랐다.

그에게서 짙고 흉포한 살기가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오려는 순간,가날픈 목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타르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전부 안으로 갈무리됐다.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하고 온화했다.

사람들의 목덜미에 오싹 돋은 소름만이 뼈를 얼릴 정도의 엄청난 살기가 한순간 있었다는 걸 증명할 뿐.

타르칸은 누워 있는 아리스티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아리스티네?”

기도처럼 간절함이 담긴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책임 소재는 나중에 가리고 일단은 비전하의 병간호에 집중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미루의 말에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미루는 궁인들에게도 말했다.

“비전하께서 안정을 취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세요.”

“하,하지만 저희의 잘못으로 비전하께서 이렇게 되셨는데,어찌 감히…”

궁인들은 황공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은 죄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들락날락하면 편히 쉬실 수 없겠지요. 특히 실바누스 시녀들 일이 있었으니 더더욱.”

아리스티네가 익숙하게 여기는 궁인들이 간호하는 게 좋다는 뜻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리스티네를 위한 것이라는 말에 궁인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 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니,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는데……”

우미루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의욕이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저체온증이 심각 하니 체온을 올려 줘야 해요.”

우미루가 화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에 화로를 여러 개 틀어놓고 있으니 방 안은 후끈거리 다 못해 찜통 같았다.

“대처는 잘하셨어요. 하지만 비 전하의 체온이 회복되는 속도가 너무 더뎌요.”

이렇게 더운데도 아리스티네는 여전히 창백했고,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화로를 더 가까이 둘까요?”

“하지만 장시간 너무 가까이 곁에 두면 피부에 저온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데……”

궁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몸을 보하는 약을 드시면 좋겠는데 일어나시질 않으니……”

우미루가 혀를 찼다.

‘링거를 맞힐 수 있겠지만 궁의들에게 수액을 받아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다행히 아리스티네를 노린 독살 시도는 아니었지만,사건이 또 어떻게 흐를지 모른다.

아리스티네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이용하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이럴 때는 민간요법을 써야죠.”

우미루가 타르칸을 향해 말했다.

“민간요법?”

“네.”

그렇게만 대답하고 우미루는 민간요법이 뭔지 설명하지 않았다.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 민간요법이 뭔데?”

“모르시겠어요?”

우미루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 웃음은 타르칸을 더 짜증 나게 만들었다.

“난 의사가 아니야.”

“의사가 아니셔도요. 사람의 체온이 떨어졌는데 그 체온을 올릴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우미루가 은근하게 웃으며 타르칸을 위아래로 훌었다.

무례한 시선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걸 따지는 자가 아니었다.

타르칸 역시.

아니,타르칸은 그런 시선을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우미루가 말하는 민간요법이 뭔지 깨달았기 때문에.

‘설마.’

몸을 몸으로 데워 주는 것.

한마디로 서로 옷을 벗은 채 끌어안아서 체온을 나눠 주는 것이다.

타르칸은 저도 모르게 아리스티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미루는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부부 사이잖아요. 거리낄 것도 없을 텐데.”

침대도 부쉈으면서.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