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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88화 (88/183)

88화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전사들과 우미루 그리고 궁인들은 기함했지만, 티도 못 내고 숨을 죽였다.

흉포한 기운이 타르칸에게서 넘실대며 뿜어져 나왔다.

폭풍 전의 깨질 듯 아슬아슬한 고요.

그 고요를 깨트리고,타르칸이 느릿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타,타,타르칸 전하……”

디오나가 부들부들 떨면서 바 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비전하께서 뭔가 오,오해 하셨나 봅니다. 저는 절대……”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까지 찾아와서 한 말이었잖아.”

아리스티네가 왜 그러냐며 끼어들었다.

가만히 있자니 자신을 거짓말 한 사람으로 몰아가지 않는가.

“무,무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언제……!”

“그치,듀란테?”

아리스티네의 말에 듀란테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디오나는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녀가 타르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아,아니에요,아니,아니에요. 전하,제발……”

“우와,대단하네.”

우미루가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까 지금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에 찾아가서 신랑이 내 애인이니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거잖아?”

우미루가 디오나를 향해 웃었다.

언제나처럼 유쾌한 미소인둣 했지만,새파랗게 날 선 적의가 배어있었다.

“그 결과 우리 비전하께서 굳 이 어제 아무 일 없었다는 걸 변명하고 있고.”

우미루가 피식 웃었다.

진짜 애인이었어도 본처한테 그딴 망언을 하면 어이없었을 터다.

그런데 디오나는 타르칸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비, 비전하께서 멋대로…….아니에요. 저는 그런 말 같은 건……”

디오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타르칸의 옷깃을 꽉 붙들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시선은 없었다.

차라리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 돌아왔다면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타르칸은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아리스티네.

저 여자를 보느라 자신이 이렇게 울며불며 매달리며 빌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디오나.”

내리깐 부름에 디오나가 흠칫 했다.

이 목소리는 무칼리였다.

아까 봤던 무칼리의 표정이 걸 리긴 했지만,그래도 그라면 이 상황에서 자신을 버릴 리 없다.

“무칼리 오라버니,저 너무 억울해요!”

디오나가 그렇게 외치며 무칼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칼리의 얼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연민,안쓰러움,책임감.

응당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데,왜.

무칼리는 명백하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기막힌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힐난하는 얼굴.

그 옆에 있는 자칼렌과 듀란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경멸하는 눈초리.

“아니야......”

디오나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럴 순 없다.

전사들은 모두 자신에게 친절해야 했다.

‘그렇게.........’

디오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큰 잘못도 아니잖아!’

어차피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사랑할 리 없다.

명목상의 정략혼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에 타르칸의 곁에 있는 건 자신일 터였다.

‘그걸 좀 더 빨리 알려 주는 게 뭐가 어때서!’

다들 다른 나라의 황족,그것도 적대국의 황족보다는 자신을 아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편을 들어 줘야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전사들에 게서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싸늘한 시선이었다.

“왜……”

웅얼거리면 어깨를 움츠린 디오나가 홱 몸을 돌려 타르칸에게 말했다.

“타르칸 전하,이 디오나가 어려서부터 전하께 얼마나 헌신적이었습니까. 저희 오라버니도 그렇고요.”

죽은 오라버니를 입에 담으며 디오나는 타르칸에게 매달렸다.

타르칸 때문에 제 오라버니가 죽었으니 아무리 그라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타르칸의 시선은 여전히 단 한 사람에게 향한 채였다.

“아리스티네.”

“응?”

아리스티네는 조금 어정쩡한 기분으로 타르칸의 부름에 답했다.

디오나를 신경 쓰는 모습이라,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제야 보랏빛 눈동자가 온전히 타르칸을 향했다.

타르칸은 힘주어 한 글자,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난 이 여자와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힐끗,디오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디오나의 얼굴 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으음……’

아리스티네는 순식간에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타르칸이 잡은 손에 힘을 줘서 아리스티네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을 종용하듯 조용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그래……”

어쩔 수 없이 아리스티네는 대 답했다.

타르칸과 디오나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흘러가는 흐름과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눈치챘다.

과대망상증인지 허언증인지 아무튼 그간 디오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망언을 했다는 걸.

타르칸은 애매하게 대답한 아리스티네가 계속해서 디오나를 바라보자 속이 탔다.

혹시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아리스티네에게 눈을 맞추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특별하게 여겼던 적도 없고, 열렬했던 적도,절절했던 적도 없어.”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다시 디오나를 향해서 타르칸은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 쥐었다.

이마가 맞닿을 둣 가까운 거리.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서로의 얼굴뿐이다.

“모비께서도 디오나를 며느리로 생각한 적 없다.”

타르칸의 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꿰뚫듯 바라봤다.

아리스티네는 그 시선에 관통 당한 것처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진짜 아니야.”

“..............”

“대답.”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디오나와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어.’

그 사실이 어쩐지 봄날의 구름처럼 느껴졌다.

“응……”

아리스티네의 입술에서 흘러나 온 말에 타르칸이 미소 지었다.

햇살이 물든 것 같은 미소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약간 차게 식은 표정이 됐다.

심각한 상황인데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은 둘만의 세상에서 꽁냥 꽁냥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럴진대 디오나는 어떻겠는가.

그녀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뺨을 놓아주며 매끄러운 머리칼을 쓸 었다.

그 다정하고 내밀한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티네는 지금 편한 복장에 머리카락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고 있지 않아서 더 은밀해 보였다.

타르칸의 손에서 풀려나 아리스티네는 주변을 살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디오나를 보고 깜짝 놀 랐다.

‘와……”

그런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소 요염하고 어른스러웠던 구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타르칸의 말 한 마디,한 마디가.....”

난리 날 만했다.

‘솔직히 진짜 쪽팔릴 것 같아.’

아리스티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디오나를 바라봤다.

그 동정 어린 시선에 디오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누가 너더러 동정해 달래?!”

디오나가 벌떡 일어나 아리스티네에게 달려들었다.

아니,달려들려고 했지만 아리스티네에게 닿지도 못했다.

듀란테가 디오나의 팔을 붙들었기 때문에.

“이,이거 놔!”

디오나는 흥분해서 몸을 뒤틀었다. 눈에 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지금도 모멸스럽게 박혔다.

디오나는 그렇게나 바랐던 동정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스티네에게 받는다는 것에 격노했다.

정작 타르칸이나 무칼리나 다른 전사들은 자신을 저렇게 벌레 보듯 바라보고 있는데!

아리스티네가 자길 동정해 봤자 오히려 더 화나기만 한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나를 동정해!’

디오나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듀란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듀란테에게 붙들려 있는 디오나를 보고 음,하고 생각했다.

‘진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디오나가 망언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건 딱히 아리스티네에게 스트레스 주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디오나가 뭘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귀찮아했 을 뿐이다.

오히려 디오나와 타르칸이 연인 관계라면 그 점을 협상 카드 로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만 했다.

디오나가 알게 되면 더 속 터져 하며 모멸감을 느낄 일이었다.

그렇게나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사람에게 정작 자신은 라이벌은 커녕 아무것도 되지 못하다니.

그것만큼 허무하고 모욕적인 일은 없었다.

‘뭔가 위로라도 해 줘야 하나?’

디오나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는 아리스티네는 열심히 고민했다.

실제 연인인 줄 착각할 만큼 두 사람이 가까워 보였다거나, 같이 있으면 잘 어울린다거나.

그런 말을 하면 속을 달렐 수 있지 않을까.

아리스티네는 최대한 온화한 얼굴로 디오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두 사람이 정말 사귀는 줄 알았어. 그 정도로 둘이 친해 보였고... 어쨌든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으니 타르칸에게도 꽤 특별하다는 느낌?”

“그랬던 적 따위 한 번도 없어.”

즉각적이고 단호한 부정이 타르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디오나는 머리가 획 돌 것 같은 기분으로 아리스티네를 노려 봤다.

‘지금 나 망하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절대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분노가 지나치니 오히려 머리가 차게 식었다.

이렇게 난동 부려 봤자 자신만 손해다.

디오나는 바닥에 푹 주저앉아 방울방울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너무하십니다,전하!”

바닷빛 눈동자에 가득한 물기 가 안타까워 보였다.

“타르칸 전하의 곁에서 내내 보필해 온 저를 냉대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 오라버니는.......”

디오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우리 오라버니만은 그렇게 모 르는 체하지 말아 주셔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리스티네 에게 눈이 먼 타르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무칼리나 자칼렌의 마음은 움직일 터였다.

전사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타르칸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디오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디오나.”

아니나 다를까 타르칸이 그녀를 불렀다.

‘역시.’

디오나는 최대한 처연한 표정 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전하……”

“네 오라비 덕에 지금 당장 널 감옥에 처넣지 않고 있는 줄 알아라.”

“예……?”

디오나는 타르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아니었다.

타르칸은 전사들을 의식해서 자신을 달래주어야 한다.

그런데,왜.

“감히 나의 비를 능멸한 죄, 네 목숨으로 갚아도 부족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타르칸의 눈동자는 온기 한 점없이 칼날처럼 서늘했다.

“저,저는……”

디오나는 도움을 요청하듯 주 변을 바라봤다.

그러나 무칼리와 자칼렌마저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아니다.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타르칸을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이 안쓰러워 죽겠다는 둣,죄책감에 물들어 있어야 하는데..!

“디오나,더 이상 네 오라비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거라.”

무칼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먹칠…… 이라뇨?”

무칼리의 옆에 있던 자칼렌이 한숨을 푹 내쉬며 거들었다.

“지금 찬트라의 명예에 누를 끼치고 있어. 감히 비전하께 무슨 망발을 저지른 거냐.”

“저,저는……”

디오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디오나,이 결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야.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혼사다. 그런데 두 분 전하의 사이를 이간하다니.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 거냐.”

듀란테의 힐난까지 더해지자 디오나는 더는 견딜 수 없어졌다.

현실을 부정하는 생각만 계속 해서 어지러운 머릿속에 떠다녔다.

이게 아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다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는가.

‘그것도 갑자기 굴러온 황녀 때문에!’

꺼져 가던 디오나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화르록 타올랐다.

“다들 너무하세요!”

그녀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저는 그냥.... ..그냥 타르칸 전하를 사랑했을 뿐이라고요! 그게 잘못이에요?”

“디오나!”

“다들 제가 어려서부터 타르칸 전하만을 봐오고 사랑했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저에게는 타르칸 전하뿐이었어요!”

디오나의 목에 핏대가 올라왔다.

“타르칸 전하를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 저뿐이니까……! 전하에 대해서도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전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고요!”

다들 그렇게 말했다.

영애들도 디오나가 타르칸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입을 모았다.

‘황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디오나가 척 아리스티네를 삿대질했다.

“생판 남으로 살아와 타르칸 전하께서 뭘 좋아하시는지도 모르는 이딴 녀一!”

철썩!

강한 마찰음과 함께 디오나의 고개와 몸이 동시에 획 돌아갔다.

디오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화끈거리는 뺨이 믿기지 않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왼 뺨을 움켜쥐었다.

뜨겁다. 따갑다. 욱신거린다.

‘지금 정말로 나를 때린 거야? 찬트라 오라버니의 동생인 나를……?’

디오나는 고개를 쳐들고 무칼리를 노려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비전하께 사과드려라.”

무칼리가 깎아지른 바위처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왼뺨의 아픔도 잊혔다.

‘사과하라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저 여자한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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