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리스티네를 담은 튀르콰이즈 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흰다.
하미르는 함께 있던 사람을 내버려 두고 아리스티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비전하.”
“안녕,제비 씨.”
아리스티네의 말에 그는 한숨을 내쉬듯이 웃었다.
“여전히 제비인가요. 우연히 만났는데.”
히마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문사처럼 부드럽게 생겼다고 해도 그는 아이루고 사람이라, 키가 큰 그의 그림자가 아리스티네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가 만든 그림자 안에서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긴 백금발이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스쳤다.
“우리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여름의 물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목소리.
아리스티네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산뜻하게 한 발 물러나서는 조금 서운한 얼굴을 한다.
시무룩한 얼굴이 그녀를 가까 이서 내려다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비전하와 우연히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가 가느다랗게 웃었다.
정말로 만날 줄 몰랐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였다.
만날 줄은 알았지만,여기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날 다시 만날 거라고 확신했어?”
“운명을 느꼈으니까요.”
아리스티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제비 같은데.”
“친구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잖아요.”
하미르가 아리스티네의 머리카락에 묻은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러니까 운명이지요.”
그가 꽃잎을 빙글 돌리며 미소 지었다.
“그런가?”
“그럼요.”
당연하다는 듯 웃는 하미르를 보고 결국 아리스티네도 가늘게 떴던 눈을 풀고 웃었다.
‘친구.’
그 단어의 울림이 좋았다.
아리스티네 역시 정말로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친구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름.”
“네?”
“이름 알려 줘.”
친구가 되어도 좋다고 수락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미르는 입술을 늘여 미소 지
‘원래는 가명을 댈 생각이었지만……’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리스티네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루,입니다.”
그건 하미르가 어렸을 때의 아명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가 누구에게도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 ”
“네.”
“그냥 불러 본 건데.”
“알아요. 듣기 좋네요.”
아리스티네는 조금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자기 이름이 듣기 좋다고 말한 건가?
‘물론 어감이 나쁘진 않지만……. 따지고 보면 평범하고 흔한 이름 아닌가.’
그녀의 두 번째 친구는 나르시시스트인 모양이었다.
‘뭐,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것 보다는 좋아하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저 멀리 우두커니 선 사람이 시야 끝에 걸렸다.
하미르와 함께 있던 동행인이었다.
“안 가 봐도 돼?”
“네,괜찮아요.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거든요.”
그가 웃으며 등 뒤를 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동행인은 움찔하더니 곧 자리를 떴다.
“자,이제 됐죠?”
아리스티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쫓아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산책할래요? 운명적인 사이가 된 기념으로.”
하미르가 제안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엔 그가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무시했었다.
‘제비라고 생각했으니까. 혼자 쉬고 싶기도 했고.’
아리스티네는 시간을 가늠했다.
어차피 마력석이 공수될 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운명적인 사이가 아니라 친구 사이겠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아리스티네는 하미르를 살짝 흘겼다.
그러는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 가 떠올라 있었다.
솔직히 친구가 생겨서 약간 들떴다.
하미르가 팔을 내밀어서 아리스티네는 그 팔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정원을 산책했다.
하미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리스티네의 보폭에 맞추었다.
타르칸과 달리 에스코트를 하는 데에 익숙한 품새라,아리스티네는 킥킥 웃었다.
“그런데 넌 뭐 하는 사람이야?”
왕의 정원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거기다 아까 헤어진 동행인의 태도로 볼 때 지위도 꽤 높은 것 같았고.
‘대귀족 중 하나일까?’
환영 연회에서는 보지 못했다.
하미르는 아무런 동요 없이 미 소 지었다.
“행정 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행정 관료?”
“네.”
이것 역시도.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사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정말 문사였다니.
“어느 가문이야?”
그 질문에 하미르가 걸음을 멈췄다. 아리스티네 역시 멈춰 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녹음이 만들어 낸 그늘이 그의 얼굴에 레이스처럼 드리웠다.
하미르가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비전하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가문이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가문?”
무슨 대답이 이렇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리스티네는 입을 다물었다.
‘왕후파에 소속된 가문일까.’
“알고 싶어요?”
하미르가 낮게 물어 와서 아리스티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가문을 알게 되면 이 관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모르는 채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나를 속이고 있지도 않고.’
아리스티네에게 접근해 뭔가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다면 제 가문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 지 않았을 터다.
“친구가 되는 데 배경은 필요 없으니까.”
하미르가 웃었다.
그 말 기억해 둘게요.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폐하를 알현하러 오신 거예요?”
“응.”
“무슨 일이었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리스티네는 하미르를 올려다 보았다.
부드러운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응,괜찮아.”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일이
아리스티네가 나간 즉시 네프테르는 칙서를 썼을 거다.
시일을 다투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으니까.
‘마력석 광산에 있는 하미르에게도 곧 연통이 가겠지.’
어쩌면 이미 연락을 받고 왕도에 있는 측근들과 불티나게 통 신을 주고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력석을 팔아 달라고 했어.”
아리스티네가 붙잡고 있는 하미르의 팔이 잠깐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미소를 머금곤 물었다.
“마력석을요?”
“응,나한테 필요하거든.”
이 시점에서 마력석을 요구하는 건 누가 들어도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아리스티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성 들여 손질한 넝쿨을 타고 피어난 유백색 장미가 아름다웠다.
하미르는 햇살이 물든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입 을 열었다.
“마력석은 하미르 왕자가 관리하는 거 아니었나요?”
“응,그렇다고 하더라.”
“그런데 왜 폐하께 부탁하셨어요?”
“응?”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어 하미르를 바라봤다.
“하미르 왕자에게 말했어도 됐잖아요.”
하미르의 눈동자가 아리스티네 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차근차근 낱낱이 해부하는 둣한 시선이었다.
“하미르 왕자에게 마력석을 팔아 달라고 말했으면 들어줬을 까?”
하미르가 멈칫하더니 깊게 미소지었다.
“그건 아니죠.”
“그렇지?”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으며 눈짓했다.
결과가 뻔한데 내가 왜 하미르 에게 부탁하겠어?
一같은 시선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죠.”
고집스러운 목소리는 어쩐지 골이 나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걸음을 멈추고 하미르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 고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미르 왕자도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잖아요.”
여름의 빛깔처럼 또렷한 목소 리였다.
새파란 시선이 아리스티네에게 오래 머물렀다.
‘어라?’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미르를 보며 고개를 가웃했다.
‘왜 얘가 아쉬워 보이지?’
하미르에게 말하지 않고 네프테르에게 간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보였다.
‘왜?’
아리스티네가 미처 파악하기 전에 하미르가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뭘 했어요?”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같이 느껴졌지만,아리스티네는 순순히 대답했다.
“카드 게임 했는데 재밌더라. 나 처음 해 봤거든.”
“이겼어요?”
“어땠을 거 같아?”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여름 햇살 아래 투명하게 빛났다.
하미르의 우아한 눈매가 가늘 어졌다.
바람이 아리스티네의 머리를 흩트려 놓아서,하미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넘겨 주었다.
“다음엔 나랑 해요.”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Chapter 28. 사랑스러운
아리스티네는 쭈욱 기지개를 켜며 침실로 들어갔다.
바쁜 하루를 보낸지라 피곤했다.
그녀가 네프테르와 이야기하는 사이,리트텐은 전기로,아니,마력로 공정을 위한 준비에 들어 갔다.
제련 공정에 관해서는 리트렌이 훨씬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도맡아 진두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하미르와 산책을 마치고 난 뒤,아리스티네는 저녁 식사를 하고 리트렌의 보고를 들었다.
리트텐은 보고하면서 내내 울상을 짓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강아지 귀가 추욱 처지고 꼬리가 말려 있는 느낌이라,아리스티네는 의아했다.
보고에 따르면 마력로를 위한 설비는 차근차근 잘 진행되고 있었다.
기존의 설비를 개량하는 데다가 마법사의 마법으로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일도 길게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지?’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리트렌이 각오를 마친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전하,혹시 제가 못미더우신 겁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아리스티네는 펄쩍 뛰었다.
세상에 리트텐만큼 믿음직스러운 직원이 어디 있겠는가.
달래 보아도 리트텐의 말린 꼬리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응.〉
〈왜 제겐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역시 저는 의지할 구석이 없는 놈이라…….〉
아리스티네는 황당했다.
지금 설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시무룩해하는 건가.
〈과로셨다면서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까 비전하께서 일 얘기를 하실 때 말리긴커녕 고개만 끄덕이고……. 애초에 과로이신 것도 다 제 탓입니다. 제가 알아서 잘했으면 비전하께서 고생하실 일도 없었는데…….〉
심각한 어조의 리트텐에게는 무척 미안하지만,아리스티네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풋,하고 웃어 버려서 상처받은 대형견을 달래 주느라 애를 먹었다.
아리스티네가 건강하고,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리트렌의 꼬리는 힘을 되 찾았다.
‘은근히 손 가는 직원님이라니까.’
어째서인지 자신의 주변에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밖에 없다.
‘그중에서 최고는 내 남편님이고.’
아리스티네는 탁, 하고 침실 문을 닫았다.
세상에서 가장 손 많이 가는 남자가 침대 위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칸의 얼굴을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났다.
‘디오나와는 연인이 아니었지.’
하지만 첫날밤,연인에게 순결을 지켜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인이다.〉
아예 직접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의 연인이라는 여자는 또 누구일까.
그 의문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잠시 일하느라 밀어 두었을 뿐,언제나 아리스티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같이.
‘아니,그게 누구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흩트렸다.
‘좋은 밤.”
그녀는 여상히 인사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아리스티네.”
타르칸은 복잡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없는 듯한 표정.
하지만 동시에 주저하면서도 기대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디오나와 아무 사이도 아냐”
아리스티네는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했더니.
“응,안다고 했잖아.”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뻗었다.
곧장 손을 마주 잡아 오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어느새 이렇게 서로의 살을 맞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침대에 앉은 채,서 있는 아리스티네와 두 손을 마주 잡고서 타르칸은 입을 열었다.
“디오나뿐이 아니야. 나는 그 어떤 여자하고도 아무런 사이가 아냐”
그가 고개를 들어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봤다.
“유일하게 있다면 너지.”
촛불의 빛에 젖은 황금빛 눈동자가 들리지 않는 말을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부부 사이니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