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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92화 (92/183)

92화

“부부 사이니까.”

열린 창을 통해 바람이 불었다.

열대야를 몰아내며 부는 여름 밤의 바람은 습습하고 온유했다.

찌르르,풀벌레 소리가 호젓한 공기 사이로 울렸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손을 맞잡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특별한 사이인 여자는 너 밖에 없어.

황금빛 눈동자가 호소한다.

“첫날밤에는 있다고 했잖아.”

어째서인지 투정 같은 말이 나왔다.

이게 아닌데. 그냥 그래 없구나,하고 말아야 하는데.

그에게 연인이 있든 없든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닌데.

그런데 왜.

“없었어.”

이 말이 이렇게 가슴에 박혀 드는 걸까.

“너뿐이야.”

타르칸이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왜 그때는 있다고 했어?”

“그건......”

타르칸은 답지 않게 난처한 얼 굴이었다.

“그렇게 말해 두는 게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감정.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속이 꼬이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자길 사랑할까 봐 그랬다는 거야?’

아리스티네는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그에게 연인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그런 이유로 거짓말했다고 하니 더 화가 났다.

‘아니,나도 이 결혼에 연애 감정 같은 거 싹 다 배제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처음부터 이 정략혼이라는 사업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자고 말했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는 건 자유였고,타르칸을 사랑할 리 없으니까.

타르칸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초조한 듯 말했다.

“그냥,너를 잘 몰랐으니까.”

아리스티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특이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 이렇게 엉뚱하고,고집 세고,말은 잘 듣지도 않고,오해나 하고,이렇게나一.

이렇게나 사랑스러울 줄은.

‘사랑스럽다고?’

타르칸은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기함했다.

사랑스럽다니.

제가 아리스티네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나는……’

혼란으로 떨리는 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촛불의 불빛과 그림자로 오묘하게 물들어 있었다.

매끄러운 뺨은 완만한 곡선을 그렸고, 불만에 차 살짝 비죽이고 있는 입술은 평소보다 도톰했다.

긴 은발은 주흥색과 노란색 빛을 머금은 채 바람에 사라락 흔들렸다.

무엇보다 자신을 직시하는 그녀의 눈동자.

새벽하늘 같은 보랏빛 눈동자는 어둑한 방 안에서도 별처럼 빛났다.

사랑스럽다.

두근,심장이 뛰었다.

타르칸은 넋을 놓고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사랑스러웠다.

아리스티네의 모습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깨달은 순간에는 사랑스러워서 견 딜 수가 없었다.

깨달은 사실에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사실을 말해?”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까지 귀여워 보인다면 눈에 단단히 무언가가 씐걸까.

“거슬리는 여자한테.”

덧붙인 말에 타르칸은 움찔해서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손잡은 채 살짝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졌다.

아리스티네가 입고 있는 침의의 치맛자락이 타르칸의 단단한 허벅지에 스쳤다.

바람결에 반투명한 레이스 커튼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쓸었다.

“아리스티네.”

타르칸의 목소리는 낮게 쉬어 있었다.

“네가 거슬려.”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말이 왜 이렇게까지 상처가 되는 걸까?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소리도 얼마든지 들었는데.

자신은 타르칸을 괜찮은 파트 너라고 생각했는데,그는 전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것 때문에?

“네가 나를 의지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

타르칸이 조용히 말했다.

아리스티네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네게 중요한 걸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해도 그래.”

“타르칸.”

“늦게 들어오면 초조하고,아프면 화가 나.”

“..............”

“선을 딱 긋고 절대 침범하지 말라고 내칠 때는一.”

말을 하며 아리스티네의 손을 쥐고 있던 타르칸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새하얗게 드러난 아리스티네의 팔을 타고 움직인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스쳐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정말 거슬려.”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싸 쥔 채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어루만져서 아리스티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어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타르칸의 콧날이 그 녀의 뺨에 스치고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피부를 데 우고,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뒤덮었다.

아리스티네는 어쩐지 호흡이 가팔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그의 숨소리가 가팔라지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뜨거워서 정확하게 생 각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연인이 없어. 불륜하는 것도 아니야.”

타르칸이 속삭였다.

“정략혼이어도 결혼은 결혼이지.”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며 내리뜬 그의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길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부부야”

아리스티네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음,그야…… 우리가 진짜 부부인 건 아니잖아.〉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정략혼을 했다고 해도 진짜 부부가 되는 건 맞지. 하지만.〉

〈너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있잖아.〉

나는 네 남편이라고,좀 더 나를 의지하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렇게말했다.

대답 없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초조해진 타르칸이 속삭였다.

“아리스티네,넌 진짜 내 아내야.”

그의 엄지가 아리스티네의 턱을 쓸었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을 지나친다.

“하나뿐인.”

그건 선언보다는 제발 허락해 달라는 청에 가까워서 아리스티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타르칸은 미소 짓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지금껏 그녀가 봤던 그 어떤 표정보다 지금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 하나뿐인 진짜 남편이고.”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혼할 때를 생각하라고,이러지 말고 밀어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물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멍멍하게 들려서, 제대로 의식에 닿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타르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게 좋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눈동 자가 꼭 햇살 같아서.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한 궁에 혼자 웅크리고 있던 그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잘 잤어?”

아리스티네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빡였다.

옆으로 누워 팔을 벤 채 그녀 를 바라보고 있던 타르칸이 미소 지었다.

아침이라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섹시했다.

‘아니,섹시하지는 않지.’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건…… 그냥 수분 부족으로 인한 성대 근육의 경직 현상일 뿐이야.’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 지만,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반투명한 레이스 캐노피에 투과된 아침 햇살은 부드럽게 타르칸을 내리찍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까만 머리카락과 밤새 흐트러진 침의가 나른함을 더했다.

안 그래도 벌어져 있는 옷깃이 더 벌어져 있어서 타르칸의 탄탄한 대흉근이 햇살 아래 드러 났다.

살짝 흘러내린 옷깃 사이로 도드라진 무언가가 보일락 말락해서, 아리스티네는 눈을 획 돌렸다.

‘우와..........’

아리스티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잘 잤냐고 묻는,한 마리의 맹수같이 나른하고 섹시한 남편이라.

아침에 일어날 맛 나겠다.

아침부터 힘이 아주 그냥 불끈 불끈 솟을 기세였다.

아리스티네는 이래서 다들 결혼을 하는 건가,무심코 생각했다.

언제나 타르칸과 함께 아침을 맞았는데 오늘은 유독 그의 미모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왜 이러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타르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뒤덮었다.

“더 자. 아직 과로한 게 풀리지 않았을 거 아냐.”

그의 손길 한 번에 아리스티네 는 너무나 쉽게 그의 곁으로 딸려 갔다.

아리스티네의 등에 타르칸의 맨가슴이 닿았다.

‘와……’

아리스티네는 눈을 깜빡였다.

따끈따끈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가슴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애꿎은 이불을 쥐었다 폈다.

원래도 좁은 침대라 몸 한 군데는 붙기 마련이었지만,고작해야 팔이었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붙은 건 처음이었다.

‘이게 부부인가.’

새로 배웠다.

레이스 커튼 덕에 그늘진 햇살은 딱 좋은 정도로 보드라웠다.

거기다 따뜻한 몸에 감싸여 있으니 절로 노곤노곤해지는 기분 이라,아리스티네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타르칸도 더 자라고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수마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지금 한가하게 타르칸과 누워서 뒹굴거릴 때가 아닌데.

“왜 그래?”

아리스티네가 꿈지럭거리자 타르칸이 상체를 살짝 들며 물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반 쯤 잠에 취해 풀어져 있었다.

‘으............’

아리스티네는 신음을 홀리며 벌떡 일어났다.

‘이게 미인계라는 거구나. 위험했어.’

아리스티네는 식은땀을 닦았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인데 왜 이렇게 동요하는지 모르겠다.

“더 안 자?”

“그럴 시간이 어딨어. 일해야지.”

타르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으로 부산스레 침대에서 내려가는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남편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는 아리스티네는 “너도 어서 일하러 가”라는 냉정한 말만 남기고 침실을 나섰다.

홀로 덩그러니 침대 위에 남은 타르칸은 쳇, 하고 혀를 찼다.

‘안 통하나.’

아리스티네가 가슴에 묘하게 집착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옷깃을 더 열어젖혔건만.

쉽지 않은 여자였다.

* * *

아침보다는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라,아리스티네는 아침 식사를 생략하고 바로 대장간으로 갔다.

마력로 설비를 구축을 진행할 마법사들이 이미 와서 일하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해 줘서 고마워.”

“비전하께서 의뢰하신 일인데 당연히 최우선으로 해야죠.”

“평화의 여신님을 도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이 일에 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뒤에서 대장장이들과 회의하던 마법사들이 외쳤다.

‘아니……. 영혼은 필요 없는데’

그런 건 줘도 곤란하다.

아리스티네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다들 의지가 아주 대단합니다. 비전하를 돕는 일이라 기쁘 게 일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저희 마법사들에게 항상 고무되는 일이지요.”

마법사 대표가 웃으며 이해해 달라는 듯 말했다.

“마력의 열과 압력을 사용해 용광로를 대체할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아니, 별거 아닌데……”

순수하게 자신이 생각해 낸 방법이 아니라서 아리스티네는 민 망했다.

“마력석을 에너지원으로 해서 열과 압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미 흔한 기술이지요. 하지만 그걸 제련 과정에 접목시킬 생 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생각해 내신 게 별게 아니면 대체 뭐가 특별하겠습니까.”

“으음……. 고마워.”

부정하면 더 열변을 토해 낼 기세라,아리스티네는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접목시켰다고 하지만 지구에 있는 걸 그대로 가져온 거라서……’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때였다.

“마력석이 도착했습니다!”

대장장이의 외침에 아리스티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기다렸던 소식이지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포털을 이용해 아무리 쾌속으로 온다고 해도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오다니?

“이전에 왕궁에 들여왔던 마력 석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태껏 채굴한 마력석의 상당 수가 왕궁으로 이송되었었다.

그 중 일부를 가져왔단 소리였다.

“시간이 급한 걸 알고 부왕 폐하께서 신경 써 주셨나 보네.”

아리스티네의 말에 마력석을 가져온 관리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법사들이 마력석을 가져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슬쩍 아리스티네에게 다가 왔다.

“저,비전하.”

“응?”

“외람되지만,오해를 풀어 드리고 싶어서……”

“괜찮아. 뭔데 그래?”

“아무래도 이런 배분 관리는 실무자가 하지 않겠습니까.”

관리의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 이 커다래졌다.

실무자.

그렇다면…….

“하미르 왕자님께서 보내신 거라고?”

“예,비전하. 전하께서 신경 써서 보내신 거랍니다.”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설마 하미르가 손을 써서 이렇게 빨리 마력석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훼방을 놓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리스티네는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뭐지?’

남편은 됐고 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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