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복잡해진 아리스티네의 머릿속과 달리 마력로 설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마법사들의 영창과 함께 푸르고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고,수식이 전개되며 평범했던 제련 시설이 새로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와……”
아리스티네는 감탄하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사실 마법사들이 이런 규모의 구축을 행하는 것을 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제왕안으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확실히 직접 보는 건 달랐다.
찌릿한 마력의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자,번쩍번쩍한 제련 시설이 완성되었다.
열댓 명의 마법사들이 일시에 주저앉아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허억,헉……. 완성입니다.”
“괜찮아?”
“시,시간을 다투는 일이라고 하셔서 허억,특별히……”
아리스티네는 가슴이 뭉클했다. 일 잘하는 외주 인력은 정말 최고였다.
“경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두 배로 쳐주도록 할게.”
피골이 상접했던 마법사들의 얼굴에 한순간에 생기가 돌았다.
그야말로 마법이 일어난 것 같 았다.
‘역시 돈은 만병통치약이군. 마법사도 이렇게 임시 고용하고, 돈 많이 벌어 둔 보람이 있어.’
이것의 바로 돈의 맛이었다.
마법사의 인건비는 비쌌지만, 마법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마력로를 만들었으면 몇 달은 걸렸을 터였다.
대장장이들이 수거했던 메스 날을 넣어 마력로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성공입니다!”
리트렌이 활짝 웃으며 “비전하!”라고 외치며 달려왔다.
꼬리를 붕붕 흔드는 대형견의 모습에 아리스티네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들과 마법사들 모두 기쁨에 잠겨 환호했다.
“이걸로 선철이 입고되지 않는 동안에도 메스를 만들 수 있겠군요!”
“메스 날 위주로 유통하면 무리 없을 것 같습니다.”
“밤새 수식을 설계한 보람이 있네요.”
“이걸로 비전하께서 세상을 구하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도 없어졌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세계를 구한다는 설정은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아리스티네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사실 세간에 도는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걱정했는데 이걸로 그것까지 일단락될 것 같습니다.”
마법사 대표가 목소리를 낮춰 아리스티네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문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제자 놈들이 선동당해서 철은 본디 검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는데 메스를 만든다고 난리입니다.〉
〈메스를 대량으로 만드느라 선 철이 부족해져서 유통이 원활하지않다고 .... 사정을 아는 놈들인데 왜 그러는지.〉
〈녹슬지 않는 철같이 좋은 것을 만들었으면서 그걸 혼자 독점해 메스를 만드는 데만 쓰고 있다면서……. 하여간 죄송합니다.〉
선철을 주러 온 볼라튼이 사과 할 게 있다면서 했던 말이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러다 제국처럼 유약해지겠다’는 말도 돌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를 겨냥한 말이었다.
제자들이라고 해도 모두 뜻대 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 볼라튼이 사과할 문제는 아니었다.
‘리트렌에 대한 질투가 있었겠지.’
볼라튼의 제자들 외에도 왕후에게 뒷돈을 먹은 사람들 역시 그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예상했어.’
메스에 대한 반응이 워낙 뜨거운지라 별별 말이 다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무리 안 좋은 말이 나와도 전체적인 여론은 아리스티네의 편이었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선철이 아니라 고철을 제련해 만든다는 게 알려지면 선철 부족과 메스가 하등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네,오히려 고철을 재활용한다는 것을 높게 사겠지요.”
“일단 지금은 마력로를 다른 곳에 구축하지 말아 줘.”
마력로에 대해 알려지면 당연히 마법사들에게 의뢰가 들어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비전하께 마력로 설계에 대한 권한이 일부 있으니 따라야지요.”
마법사 대표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미소 지었다.
‘일부’라고 말하는 건 자기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였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계산이 빠른 모습이 싫진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웃으며 마법사들 이 원할 말을 해 주었다.
“다른 마법사들과는 마력로에 관해 거래하지 않을게.”
“후후,감사합니다. 저희 측에서도 비전하께서 명하실 때까지 마력로 수식과 설계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마법사 대표,아세나가 빙긋 미소 지었다.
두 여자 사이에 훈훈한 사업 분위기가 흘렀다.
아리스티네는 스테인리스 스틸도,마력로도 혼자 독식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풀 생각이었다.
딱히 세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얼마의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넘기는 게 장기적으로 더 돈을 많이벌겠지!’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라마다 수도에 한 채씩 건물주가 될 거야!’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아주 허황된 꿈도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는 다시 공정이 돌아가기 시작한 대장간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 * *
같은 시각,타르칸은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전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봤다.
‘디오나가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심경이 복잡하시겠지……’
‘찬트라의 여동생이 설마 그랬을 줄이야.’
깊은 침묵이 흐른 후,드디어 타르칸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리스티네를 사랑하는 것 같다.”
‘엥?’
‘지금 그게…….’
‘무슨 당연한 소리……?’
왜 저렇게 심각하신가 했더니 설마 그 고민 중이셨단 말인가.
“다들 반응이 왜 그러지?”
“아니,그게. 이제 와 새삼스레……”
“누가 봐도 두 분께서는 알콩달콩 연애 중이셨으니까요.”
“특히 주군께서는……”
정말 질투의 화신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타르칸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예? 저,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는데요.”
“아니,그 전에 거.”
“누가 봐도 두 분께서는 알콩달콩?”
이번에는 타르칸의 광대가 움찔했다.
전사들은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을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평소 아부하는 사람을 단칼에 쳐내던 그분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들은 영혼 없이 입을 움직였다.
“두 분 전하께서는 그야말로 천생 연분이십 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두 분께서 함께 계시면 장관입니다.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럴 때마다 타르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역시 그렇군.”
중얼거린 그가 턱을 쓸며 미간 을 찌푸렸다.
“그런데 정작 아리스티네는 별 생각 없는 것 같단 말이야.”
“비전하께서 그런 부분에서 조금 느리시긴 하지요. 자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럼 자각하시게끔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칼렌의 말에 타르칸이 눈을 번쩍 떴다.
“자각하게끔?”
“예,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든다거나……. 아니면 비전하께서 유독 좋아하시는 면모를 계속 어필해도 괜찮지요. 좋아하는 면이 계속 보이면 호감이 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괜찮은 것 같군.”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책사라 그런지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
‘아리스티네가 좋아하는 면모 라.’
타르칸은 그간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리스티네가 유독 눈을 빛내던 것. 먹을 거나 사업 이야기나 아니면…….
‘내 가슴……’
타르칸은 무심코 드러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엄청 빵빵하게 잘 부풀어 오른 따끈따끈한 빵이었어. 감촉이 진짜 끝내줬는데.〉
사람 가슴을 실컷 만진 후 꿈 꾸듯 몽롱하게 말하던 아리스티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파서 정신없을 때도 그랬지……’
어찌나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손놀림으로 가슴을 더듬던지.
“크홈, 홈홈.”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얌전히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전사들은 주군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웃했다.
귀가 새빨간 게 어디 안 좋으 시나 싶었다.
Chapter 29. 독에 든 쥐
선철을 독점하는 왕후파의 계락은 이득은커녕 손실만 내고 끝났다.
열심히 일해 준 대장장이들 덕분에 메스를 입고하는 데엔 아무런 차질도 없었고,고철을 재활용한다는 점이 기사화되며 흥보까지 됐다.
왕후 쪽에서 고철 재활용에 대한 위생 문제를 지적했지만,바로 반박해서 오히려 아무 문제 없다는 사실만 널리 알리게 됐다.
게다가 주요 물자를 독점한 스키엘라 공작은 왕에게 경고를 받았다.
메스의 사용으로 인한 수술 감염률 하락이 거국적으로 나타나자,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혼인 자체가 대륙적인 관심사였기에 아리스티네가 메스를 만들었다는 사건은 이미 타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선 행사와 같은 이벤트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수치적으로 명확한 결과를 내자 여기저기서 접선해오기 시작했다.
야만의 나라라고 불리는 아이루고에서 엄청난 의료용 메스를 만들었다는 것에 반신반의했지만 곧 메스의 실물을 보고 감탄 했다.
〈아이루고는 도검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메스를……!〉
〈정말 녹이 슬지 않는군요.〉
〈하긴,아이루고는 원래 야금 술이 뛰어났죠. 비전하를 만나 서로 좋은 상승효과가 나왔네요.〉
이전까진 종주국인 실바누스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루고를 폄하했던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실바누스와 아이루고가 화해한 데다가,사람의 목숨과 밀접한 의료용 메스를 수입하고 싶은 입장이다 보니 태도가 변 했다.
아이루고 왕이 원하던 것이었다.
메스보다도 더 폭발적인 관심을 받는 건 스테인리스 스틸이었다.
스테인리스 스틸의 이름을 정하는 건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문제는 리트텐이 추린 이름 후보였다.
여신께서 내리신 축복의 철
순백 천사님의 순백철
강철의 여신님
아리스티테는 목록이 적힌 종이를 그대로 구겨 버릴 뻔했다.
그녀는 리트텐의 심미안을 의 심하며 제출된 이름 목록을 다 가져오라고 했다.
그 목록에 적힌 건
우리 비전하 만만세
결혼해 주세요
2세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
이게 강철 이름 공모인지 편지 쓰기인지 모를 것들이 이어졌다.
아리스티네는 목록의 첫 페이 지를 채 읽지 못하고 그대로 내
려놨다.
머리가 아파서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타르칸은 아주 재밌다는 얼굴로 “리트렌이 고른 후보 중에 투표한다며?” 하고 말했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한 게 틀림 없었다.
괘씹한 남편이었지만,어쨌거나 이미 국민과 약속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쓸 수 없는 이름이라,아리스티네는 어쩔 수없이 결정했다.
‘꼼수를 써야지!’
-하고.
치사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신이 어쩌네,천사가 어쩌네 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 이름으로 정해졌다가는 쪽팔려서 사업할 때 차질이 생길 것이다.
다행히도 투표 방식에 대해선 공지하지 않았다.
원래는 훌륭한 직원들과 투표 할 생각이었지만 아리스티네는 혼자서 투표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티네는 리트렌을 반협박 하여 자신이 정한 이름을 후보에 올렸고,일인 투표 를 했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스테인리스 스틸의 이름이 정해졌다.
스텐.
상상력 하나 없는 이름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역시 익숙한 게 최고다.
지구의 것을 가져왔으니 하나 쯤은 그 흔적을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고철을 재활용하는 마력로에 관해서도 산업체 단위로 관심을 보였다.
일부러 마력로 설비를 다른 곳에 오픈하지 말라고 아세나에게 부탁했던 건 바로 이걸 위해서였다.
아리스티네는 기쁘게 그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와중 디오나가 타르칸의 궁에 출입을 금지당했다.
사실 더 엄중한 벌이 내려질 예정이었지만 아리스티네가 만류했다.
디오나의 오빠인 찬트라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디오나에게 엄벌이 내려진다는 말에 전사들은 어쩔 수 없이 동요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전우에게 애정과 부채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로서는 디오나에게 큰 유감은 없었기에 타르칸에게 근신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전사들을 규합하는 게 더 합리 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사들은 한층 더 감격한 얼굴 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저렇게 자애로우신 분을...............〉
〈평화의 여신이셔서 이리 관대 하신 건가.〉
〈그나저나 타르칸 전하께서 결정을 번복하시다니. 역시비전하께서는 ….〉
아리스티네는 대강 그들의 말을 홀려 넘겼다.
슬슬 전사들의 오버에 익숙해지려 했다.
어쨌거나 꽤 괜찮은 일상이 홀러갔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一.
〈아리스티네.〉
밤이었다.
타르칸은 밤마다 한층 더 습기 있는 목소리로 아리스티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럴 때면 아리스티네는 어깨 와 등줄기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원래 나란히 누워서 잤는데, 어째서인지 요즘 타르칸은 침대가 좁다면서 옆으로 누워서 붙어 잤다.
자세 탓에 탄탄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가슴이 자꾸만 아리스티네의 팔에 닿았다.
가끔씩 타르칸이 뒤척이면 가슴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졌다.
문제는 감촉이 너무 좋아서 잠 깐만 정신을 놓으면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손이 간다는 거였다.
잠에서 깼는데 손이 타르칸의 가슴 위에 가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따끈따끈하게 부풀어 오른 빵을 먹는 꿈을 꾸는 빈도가 늘어 났다.
‘요 손! 요 나쁜 손!’
아리스티네가 제 손을 내려다 보며 꾸짖을 때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