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94화 (94/183)

94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상념을 뚫고 들린 질문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었다.

“앗,미안. 내가 사람을 앞에 두고……”

지금 아리스티네는 오랜만에 하미르와 만나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궁에 산책로로 조성된 숲길은 조용하고 운치가 있었다.

숲길 가운데에는 피크닉을 즐 길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되어 있어서 두 사람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미르는 왠지 얼굴이 붉은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사업 성공을 축하드려요. 스텐과 마력로까지……. 선철이 부족했던 악재가 오히려 호재가 되어 돌아왔네요.”

“고마워,루.”

“그나저나 돈 많이 버셨겠어요? 그렇게 돈 벌고 싶다고 하시더니.”

그야 완전 많이 벌었지!”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당당히 폈다.

메스 판매뿐만이 아니라,스텐 제조법과 마력로 설비에 대한 로열티를 받기 시작했다.

‘특허료로 먹고사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벌리는 거 최고시다.

물론 스텐 로열티는 리트렌과, 마력로 로열티는 아세나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나누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다른 대장장이들에게도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 주었다.

“마력석이 제때 수급되어서 참 다행이네요.”

“응,나는 폐하께서 손을 써 주신 줄 알았는데,하미르 왕자가 그랬다고 하더라고.”

“하미르 왕자가요.”

“응,놀랐지? 왜 그랬을까. 날 곤경에 빠트린 장본인인데.”

“그러게요. 저도 참 궁금하네 요.”

하미르가 입술을 늘여 미소 지었다. 홈결 하나 없는 매끄러운 미소였다.

“그래도 요즘 여유로워서 좋다. 전엔 진짜 바빴는데. 아, 이거 먹어 봐. 맛있어.”

아리스티네는 가져온 컵케이크 를 권했다.

하미르는 컵케이크를 한 입 먹고는 움찔했다.

‘이건……’

그는 미소 지으며 아리스티네 에게 말했다.

“타르칸 왕자가 잘해 주나 봐요?”

“어?”

아리스티네는 난데없이 나온 타르칸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가,갑자기 왜?”

하미르는 두 뺨을 살짝 붉힌 채 시선을 돌리며 부끄러워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휘었다.

“그렇게 물으니 알려 주기 싫어지네요.”

그가 포크에 묻은 크림을 할았다.

“나랑 있을 땐 비전하나 내 얘기를 해요. 다른 사람 이야기 말고.”

아리스티네가 눈매를 좁히고 물었다.

“너 정말 제비 아닌 거 맞지?”

“친절하고 자상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요.”

하미르가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결국 아리스티네는 그를 따라 피식 웃었다.

“너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비전하만 하려고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화음을 빚어냈다.

아리스티네는 하미르와 이렇게 농담 따먹기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별거 아니지만 친구가 없던 그 녀에게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친밀감을 보이더라도 어쨌든 아리스티네가 윗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대했다.

그에 반해 하미르는 꼬박꼬박 존대하면서도 묘하게 대등한 느낌으로 자신을 상대했다.

왕자비나 황녀라는 지위가 그에게는 어떤 거리감이나 장벽도 되지 않는 것처럼.

아리스티네는 하미르와 느긋하게 한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가 봐야겠다. 안 돌아가면 궁인들이 걱정할 거야.”

아이루고는 실바누스처럼 항시 수행인을 달고 다니는 분위기가 아니라 꽤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여러 사건이 있었던 탓인지 궁인들은 아리스티네를 꽤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벌써요?”

하미르가 아리스티네의 치맛단을 살포시 붙잡고 올려다보며 물었다.

부드러운 눈매 탓인지 조금 처량 맞아 보였다.

벌써라니.

“왜요,토끼 같은 남편과 여우 같은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빨리 가야 하나요?”

“응,늦으면 우리 집 토끼가 외로워해.”

아리스티네의 말에 하미르가 멈칫했다.

“……외로워한다고요?”

“그럼. 토끼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타는데.”

타르칸이 들으면 황당해하겠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상관없다.

아리스티네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에 침도 안 발랐다.

“흐음,아내가 없어 외로움을 타는 타르칸 왕자라……”

하미르가 중얼거리며 입술을 늘였다.

“더 잡아 봐야 날 버리고 갈 것 같으니까 보내 줄게요.”

곧게 뻗은 하미르의 손가락이 아리스티네의 드레스 자락을 타고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잡아서 안 가면 붙잡는 건데.

그가 덧붙인 말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진짜 직업을 잘못 찾은 거 같아. 행정 관료가 아니라 제비가 돼야 했는데.”

“그건 비전하께서 나한테 조금 홀렸단 소리인가.”

“아니,네 제비 짓에 질렸단 소리.”

“너무하네.”

아리스티네의 단호한 말에 하미르가 웃었다.

하나도 너무하다 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는 픽 웃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미르는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주먹을 쥐었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웠던 웃음이 사라지고,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한다.

“정말 재밌단 말이야.”

하미르가 중얼거리며 입매를 쓸었다.

그의 입술에는 진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우리 토끼가 벌써 와서 기다 리고 있었구나.”

“무슨 소리야.”

방으로 들어오면서 아리스티네 가 하는 말에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스티네는 싱글싱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 모습만 봐도 입매가 풀어지려고 해서 타르칸은 입술에 꽉 힘을 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아내한테 너무 약한 것 같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거지?’

어제까지의 자신이 너무나 신기했다.

사실 옆에서 보기엔 전혀 아무렇지 않게 대한 게 아니었지만…… 본인은 자각이 없었다.

타르칸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 하며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스티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주면서 ‘왜?’ 하듯 고개를 가웃거렸다.

‘귀여워.’

타르칸은 입꼬리를 꽉 누르고 미간을 찌푸렸다.

“밥 먹으러 가자.”

“응!”

밥 이야기에 아리스티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타르칸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해서 모처럼 시간을 맞춘 거였다.

그간 부부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적이 드물었다.

메스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는 아리스티네가 밤늦게 들어왔고, 타르칸도 워낙 일이 많아 저녁을 침궁이 아니라 지휘관 쪽에 서 해결하는 일이 잦았다.

식당에 도착하고 나자,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음식이 쉴새 없이 날라져 왔다.

디시를 하나씩,하나씩 내오는 실바누스와 달리 아이루고는 한 상 가득 차리는 식으로 정찬이 나왔다.

아리스티네로서는 눈이 참 즐거운 일이었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맛있는 음식을 보고 있노라면 보물을 발견한 탐험자처럼 들떴다.

아리스티네는 치즈가 잔뜩 들어간 클램차우더를 듬뿍 떠 후 후,불곤 한 입 먹었다.

고소한 우유와 버터의 맛과 치즈,푹 익어 단맛이 우러나오는 양파,부드러운 식감으로 씹히는 조갯살까지.

입 안이 살짝 얼얼할 정도로 뜨겁지만 그것마저 묘미였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본 타르 칸이 피식 웃었다.

“맛있어?”

“응”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아리스티네의 표정이 그 이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도 먹어.”

타르칸은 몇 번의 나이프질로 양 삼각갈비를 뼈대에서 완벽하게 발라냈다.

한입 크기로 작게 썰어서 주자 아리스티네가 냠,받아먹었다.

“이것도.”

양갈비에 버터 갈릭까지 더해지면 더 좋아하겠지,싶어서 그것까지 콕콕 집어 주었다.

과연 아리스티네는 야무지게 받아먹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너는 안 먹어?”

“먹고 있어.”

아리스티네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지만,사실 타르칸은 한두 술 뜨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다.

대강 앞에 있는 거 아무거나 한 입 먹는 척을 했지만,다시 아리스티네가 먹는 모습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타르칸 전하께서도 정말……’

식사 시중을 들려 했던 궁인들은 타르칸에게 할 일을 뺏겨 버려서 그냥 어색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뭐랄까,정말 알콩달콩 연애하시는 두 분 전하의 모습을 보는 건 참 좋은데,왜 이렇게 눈에 습기가 차오르는 걸까.

두 사람이 워낙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라 괜히 소외감이 들었다.

‘좋게 생각하자. 고기 많이 먹여서 체력 보충해서 침대 부수려고 하시나 봐’

‘그렇게 생각하니 좀 위안이 되네.’

‘이게 바로 먹여서 잡아먹는다는 거?’

소리 없이 속닥거리던 궁인들이 응힉힉 광대를 올렸다.

‘하지만 타르칸 전하께서는 조금 쓴맛을 보셔야 해!’

주인께 품기 불경한 생각이었지만,궁인들은 타르칸에게 다소 삐진 상태였다.

‘우리 비전하한테 거슬린다고 했다며!’

한때 타르칸의 그림자조차 경 외하던 충성심 높은 궁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타르칸을 바라 보았다.

‘우리 비전하께 얼마나 잘하시는지 똑똑하게 지켜볼 거야!’

궁인들이 서로 어떤 말을 주고받든 아리스티네는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하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주변을 살필 여력이 들었다.

아까부터 타르칸은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 자신을 챙기고 있었다.

‘뭐지?’

처음에는 ‘오구오구,정말 외로움을 탔나 보네. 혼자 기다리다 보니 좀 챙겨 주고 싶었져요? 빈자리로 아내의 소중함을 알았져요?’ 하고 장난식으로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한두 입도 아니고 어떻게 식사 하는 내내 아리스티네가 먹는 것만 챙기고 있는가.

‘이렇게 맛있는 밥을 눈앞에 두고서!’

정상적인 미각과 위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순 없다.

아리스티네는 조금 불안해졌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갑자기 든 생각에 아리스티네는 숨을 삼켰다.

조심스레 타르칸의 기색을 살피는데,

“좋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짓는 게 아닌가.

평소의 날카로운 기운이 싹 빠 진 무른 어조였다.

그리고 저 옅게 배어 나온 미소라니.

챙강一!

아리스티네는 손에 힘이 빠져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렸다.

본래 궁인이 주울 걸 타르칸이 줍고 앉았다.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마수 평원의 패자가 다른 사람이 떨어트린 포크를 줍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티네의 눈 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타르칸……”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타르칸은 또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왜?”

“너 혹시…… 병에 걸린 거야?”

“뭐?”

“죽을병이야? 응? 그런 거지?”

아리스티네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다른 손으로는 타르칸을 붙잡았다.

“몇 개월 남았대? 3개월? 아 니,혹시 일주일?!”

“..............”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다.

“어떡해!”

아리스티네의 눈에 왈칵 물기가 차올랐다.

타르칸은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말 내 아내가 예측 불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는 짙은 한숨과 함께 삐딱하게 말했다.

“멋대로 사람을 곧 죽을 병자 취급 하지 마.”

“그,그럼 혹시 어디 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니,마수 평원에 토벌하러 간다거나,아님 다른 위험 지역에라도....”

“아무 데도 안 가.”

타르칸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며 한마디 툭 보탰다.

“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나름대로 진심을 실어 본 말이 었지만,타르칸의 생사에 신경이 쏠린 아리스티네는 그냥 흘려 넘겼다.

“진짜 어디 안 가? 이래놓고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침대 한 쪽은 비어있고, 대신 협탁에 편지 한 장이 달랑 있었다,뭐 이런 전개는 아니지?”

타르칸은 황당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런 구체적인 상황은 또 갑자 기 어디서 나온 건가.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데.”

“아니,그게.”

아리스티네가 우물쭈물하더니 타르칸을 올려다봤다.

“네가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길래……. 아냐?”

힐끔 눈치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 타르칸은 뒷목이 뻣뻣해져 왔다.

그냥 사랑하는 여자한테 해 주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인데 죽을 병에 걸렸냐는 소리를 듣다니.

뭐랄까,자괴감이 몰려왔다.

‘이 여자 왜 이렇게 꼬시기 어렵지?’

꼬시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알아서 꼬셔져서 귀찮게 굴더니. 정작 꼬시고 싶은 사람은 이보 다 더한 철벽이 따로 없다.

지켜보던 궁인들은 눈을 반짝 빛내며 ‘좋아!’ 하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비전하 잘하신다!’

‘타르칸 전하께서는 좀 더 구르셔야 해!’

‘쉽게 용서해 주지 마세요!’

‘침대에서는 용서하셔도 돼요!’

음란꾸러기들의 얼굴이 한층 더 빛났다.

“됐다. 내가 괜히……. 널 상대로 내가 참.”

타르칸은 고개를 내저으며 구 시렁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리스티네를 바라 보는 황금빛 눈동자는 꿀이 떨 어질 듯 달콤한 동시에 아찔한 색기가 흘렀다.

궁인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저런 눈빛을 받는 사람은 자신 이 아니라 비전하인데 왜 제가 다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정작 당사자인 아리스티네는 딴 데 정신이 팔린지라,정말 죽을 일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 다시 식사에 전념했다.

타르칸은 그녀에게 보조를 맞춰 대강 먹은 후,일어나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저녁 식사 하자.”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눈썹을 찌푸리며 타르칸을 바라봤다.

“너 정말一.”

“죽을병 걸린 것도 아니고,어디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죽을죄 지은 것도 아니야. 멀쩡해. 안 죽어. 살아 있어.”

묻기도 전에 쏟아지는 말에 아리스티네는 입을 다물었다.

타르칸이 팔을 내밀어 그녀는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옆에 꼭 붙은 채,의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던 타르칸이 말했다.

“그냥 부부 사이에는 그러는 거잖아.”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획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티네 쪽에서 언뜻 보이 는 뺨이 살짝 붉었다.

그대로 계속 외면하나 싶었는데,타르칸은 다시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금빛 눈동자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달콤한 벌꿀과 눈부신 오후의 햇살과도 같은 그 빛깔.

녹아내리는 듯한 불안과 기대 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어쩐지,

‘음............’

그를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버렸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