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제왕안이 보여 준 장면은 거기 까지 였다.
수면은 다시 홀로 요동쳤고,잠잠해진 후에 물 위에 비친 건 당혹스러워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 뿐이었다.
'뭐야?!’
예상치도 못한 사건에 아리스티네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적어도 어쩌다 음독한 건지 대질 장면까지는 보여 줬어야지!’
아리스티네는 답답한 마음에 초조하게 수반 속 물을 휘저었지만,수면은 이리저리 흔들릴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오늘만큼 자신이 제왕안을 제 어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한 적은 없었다.
저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네프테르의 죽음.
갑작스레 찾아온 사실에 아리스티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아리스티네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떨리는 손끝을 붙잡고 눈을 감고 기도하듯 다짐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막을 수 있어.’
단전에 단단히 힘을 주고 눈을 반짝 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보지 못한 것에 집착해 봤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예 몰랐던 것보단 나아.’
아리스티네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숨겨 놨던 열쇠로 잠겨 있는 서랍장을 열어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병을 꺼냈다.
실바누스를 떠날 때 황제가 그녀에게 쥐여 줬던 독이었다.
〈타르칸을 죽여.〉
〈그 씹어 먹어도 부족할 놈의 심장에 독을 바른 칼을 꽂든가, 술에 독을 타든가.〉
떠오른 기억에 아리스티네는 유리병을 꽉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선득하게 다가왔다.
누가 네 말 따위 따를 것 같으냐고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미래의 상황을 본 이상 그럴 순 없었다.
황제는 아리스티네를 중심으로 아이루고 왕가에 불화가 일어나길 바랐고,실제로 그렇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내가 왕 시해범으로 몰리면 황제가 부당하다 반발하며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손에 쥐게 돼.’
실바누스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빠르든 늦든 가져올 수 있는 명분이었다.
‘만약 내가 사형당하면 더할나위 없는 명분이 되겠지.’
황제는 아주 기뻐할 것이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소지품에 독약이 있었다는 건 분명 이걸 뜻하는 것일 터다.
아리스티네는 독을 처리할 생각을 하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건 누가 알고 있지?’
황제가 개인적으로 쥐여 준 것 이기 때문에 시녀들도 모를 것이다.
아니, 알고 있더라도 그들은 이제 아이루고에 없다.
‘확실한 건 어떤 증거를 가지 고 나를 국왕 시해범으로 누명 씌웠다는 거야.’
그쪽에서 준비한 독약을 몰래 방에 가져다 뒀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들이 말한 ‘증좌’에 이 유리병이 있다면.
‘날 모함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어.’
아니,그뿐만이 아니다.
‘잘만 하면 역으로 공격할 수 도 있지.’
아리스티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 * *
“아리스티네?”
타르칸은 평소와 달리 조용히 침잠해 있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의아해서 그녀를 불렀다.
대체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아리스티네는 침대 위에 앉은 채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설마 아까 입술이 닿은 것 때문에 그런가.’
그거 외에는 딱히 특별한 일이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각자 씻고 침실에 왔다.
아까 입술이 닿았던 게 그렇게 싫었나 싶어서, 타르칸은 입 안이 씁쓸했다.
‘아니,따지고 보면 자기가 한 거였으면서.’
가해자는 아리스티네고,피해자는 타르칸이었다.
물론 타르칸은 그런 피해라면 몇 번이고 당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해 놓고 싫은 티를 팍 팍 내는 아리스티네가 야속하고 미웠지만,한편으로는 또 눈치가 보였다.
타르칸은 껑껑거리는 흑표처럼 아리스티네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고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타르칸.”
부르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야속하다고 생각 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해서,타르칸이 일부러 툴툴 대답했다.
“왜.”
“만약,정말 만약에 말이야. 부왕 폐하께서 시해당하신다면 범인이 누굴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한 후,네프테르가 독살당한다면 자신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의심하는 게 보통이겠지.
하지만.
‘타르칸은 괜찮아.’
그런 믿음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미래에서 타르칸이 그녀의 역성을 들어 준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정확한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데 덮어놓고 그녀를 믿어 주다니.
심지어 그는 네프테르의 아들이었다.
네프테르가 시해당했다는 말에 아리스티네보다 더 충격받았으면 충격받았지, 괜찮았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감싸는 것에 더 집중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나니 슬슬 정치 싸움에 집중할 생각이 들어서?”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타르칸은 한 손으로 아리스티네의 머리를 푹 눌렀다.
그녀가 그런 어두운 생각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복하고 밝은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一.
‘내 생각도.’
속으로만 생각한 것뿐인데도 왠지 부끄러워서 타르칸은 귓불 을 붉혔다.
한편으로 조금 안심되기도 했다.
아리스티네가 가라앉아 있던 게 자신과의 키스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무심코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매만졌다.
“있잖아.”
그러던 와중에 아리스티네가 불러서 그는 괜히 찔린 사람처럼 손을 획 내렸다.
“다른 사람이 내가 부왕 폐하를 시해했다고 하면 믿을 거야?”
타르칸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물음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역 시 기묘했다.
보랏빛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 지 않는 것같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비치는 듯했다.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쉬웠다.
“아니.”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응”
아리스티네는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그녀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네가 그럴 리 없으니까.”
아주 간결한 이유였다.
동시에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아리스티네는 호흡을 삼켰다.
황금빛 햇살처럼 빛나는 타르 칸의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조도가 낮은 어둑한 침실에서 아리스티네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자란 그 넓디넓은 황궁 안에서 그녀를 이런 식으로 믿어 준 사람은 없었다.
황제에게 핍박받고 종래에는 유폐까지 당했어도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 주지 않았다.
같이 연행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사니까.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숙였다.
하하,마른 웃음이 입술을 타고 홀러나왔다.
“아리스티네?”
타르칸이 조심스레 물었다.
커다란 손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넘긴다.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 둣이.
그가 아리스티네의 감정이 어 떤지,괜찮은지 살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리스티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타르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햇살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샘처럼 맑았다.
“타르칸.”
“왜”
“나 우리가 왜 부부 사이인지 알겠어.”
아리스티네가 웃었다.
“너는 내 남편이구나.”
타르칸은 잠시 웃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눈매를 찡그렸다.
“그걸 이제야 알았나. 결혼한 지 얼마나 됐는데.”
그는 아리스티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입매를 감쌌다.
주홍색 촛불의 빛 탓인지 가린 손 위로 보이는 그의 뺨이 살짝 붉었다.
“그러게.”
아리스티네는 웃고는 짝,하고 박수를 쳤다.
“그럼 남편님, 우리 한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타르칸은 잠시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간 아리스티네는 뭐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같이 생각해 보자니.
항상 그녀와 자신 사이에 짙게 자리 잡은 선이 조금 흐려진 느낌이었다.
‘아니,방심하지 말자.’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스티네다.
타르칸은 자신의 아내가 얼마 나 예상할 수 없는 존재인지 잘 알았다.
이래 놓고선 또 전보다 더 확 실하고 단단한 벽을 칠지도 모 튼다.
‘사람 미치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기대로 조금씩 빠르게 뛰는 심장을 막을 순 없었다.
‘밤마다 가슴을 계속 만지게 한 결과가 나오는 걸까.’
그는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이렇게 진지한 얼굴이라니,역시 같이 고민하자고 하길 잘했 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오해 였다.
“내 생각엔 지금 부왕 폐하께서 불시에 붕어하실 경우,가장 이득을 보는 세력은 왕후파야.”
사실 왕을 독살하려는 목적은 대부분 하나로 좁혀진다.
다음 대 왕위.
아리스티네와 결혼한 후,타르 칸의 입지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계승 서열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왕후파 쪽에선 당연히 위기를 느끼고 있지 않을까?
“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기 전에 부왕께서 승하하시면 자연스럽게 하미르가 다음 대 왕이 되겠지.”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뭘 같이 생각하자는 건가 했더 니,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그냥一.”
“너랑 같이 생각하면 안 돼?”
아리스티네의 물음에 타르칸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돼.”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여자 일부러 알고 그러는 거 아닌가.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물어보면 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이루고의 정세에 관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니까 왕후 파 외에도 폐하를 노릴 만한 사람이 있나 궁금해.”
“글쎄,부왕과 의견이 부딪치는 귀족들은 많지만,그렇다고 시해할 세력은 없을걸.”
네프테르는 노련한 정치가였고,반목과 규합을 번갈아 진행 했다.
한 번 이익을 빼앗으면 그다음에는 권익을 챙겨 주었다.
타르칸에게 실바누스의 황녀라는 카드를 쥐여주고, 그 후 하미르에게 마력석 광산이라는 카드를 쥐여 준 것처럼.
그렇기에 반정을 일으킬 정도로 불만을 품을 자들은 없었다.
“왕후파 쪽에서도 무리하게 부왕을 시해하진 않을 거야. 그것 보단 내 세력을 낮추는 데 집중 하겠지.”
“응,하지만 나는 폐하께서 시살당하신 경우를 말하는 거야. 폐하께서 승하하시고,그 범인으로 내가 지목된다면?”
“뭐?”
타르칸이 곧장 날카롭게 반응 해서 아리스티네는 별것 아니라는 둣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야.”
타르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둣 미간을 찌푸렸지만,곧 순순히 대답했다.
“그 경우라면 왕후파겠지.”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제3의 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변수가 꽤 사라진다.
‘황제가 꾸민 짓 같진 않으니까.’
아리스티네를 보필한 기사와 시녀들이 문제를 일으킨 바람에 황제는 아이루고 쪽에 손을 뻗기엔 꽤 위축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왕께서 누군가에게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한 경우야.”
타르칸이 생각에 잠긴 아리스티네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왕후도,스키엘라 공작도,하미르도 부왕을 해칠 생각 따위는 없는 자들이야.”
“확신해?”
“그래.”
타르칸의 대답에 아리스티네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미래에 폐하께서는 독살당하시는걸.’
거기까지 생각하고 멈칫했다.
‘……정말 독살이 맞을까?’
자신이 본 건 미래의 한 토막일 뿐이었다.
제왕안으로 본 모든 것이 일어 날 일이었지만,그게 전부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고 타 르칸을 바라봤다.
“타르칸,나 부탁이 있어.”
Chapter 30. 남자의 질투는
네프테르의 죽음에 관해 고민 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흘렀다.
아리스티네는 그간 제왕안으로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를 몇 번이나 봤다.
그러나 이 일에 관련해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이 라고 했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래요?”
귓가에 울린 목소리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었다.
“나 만날 때마다 계속 딴생각 중이네.”
하미르가 입매를 부드럽게 휘 며 웃었다.
우아한 눈매가 가늘 어지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본다.
“미안해,루.”
아리스티네는 솔직히 사과하며 검지로 이마를 문질렀다.
“요즘 좀 생각할 게 많아서.”
“사업은 잘되어 가고 있잖아요. 다른 거 신경 쓸 게 있나요?”
“말하면 도와주게?”
그 말에 하미르가 산뜻하게 웃었다.
자신이 모든 인력을 동원해 마 력석을 최대한 빨리 보내 준 걸 알면 과연 아리스티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어떨 거 같아요?”
아리스티네가 됐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거 아냐. 왕자비는 나름대로 생각할 게 많은 직책이야.”
“흐음,예를 들면 토끼 같은 남편에 관한 거?”
“너 은근히 타르칸한테 집착한다?”
그 말에 하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스스 웃었다.
“아닌데요.”
“아니긴. 하는 걸 보니 확실한데.”
아리스티네가 장난스레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미르가 아리스티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채며 몸을 굽혔다.
얼굴이 가까웠다.
“내가 집착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선명한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