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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97화 (97/183)

97화

아리스티네는 별 반응 없이 하미르를 바라보았다.

“루 ”

조용히 부르는 음성에 하미르는 더 깊이 미소 지었다.

“그러다 진짜 나한테 혼난다.”

보랏빛 눈동자가 제법 엄했다.

하미르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푸하하,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에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어찌나 잘 웃는지 눈물까지 찔끔 새어 나왔다.

일평생 자신을 혼낸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제왕학을 가르치던 스승도,모후도,심지어 부왕까지도 하미르를 혼낸 적이 없었다.

“음,곤란하네.”

하미르는 눈물을 닦곤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혼나고 싶어져서.’

아리스티네가 어떻게 혼낼지 궁금했다.

“그래, 혼나기 싫으면 자꾸 제비 짓 하지 마.”

‘아니. 혼나고 싶어서 곤란한 건데요,황녀님.’

하미르는 그 말을 삼킨 채 미 소 지었다.

“제비 짓이라니요. 저는 그냥 사이좋은 친구한테 집착하는 거 뿐인데. 이런 거 흔하지 않나?”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뜨끔했다.

‘그,그런가?’

언제 친구를 사귀어 봤어야 알지.

말이 꽤 먹히는 것 같자,하미르는 본격적으로 아리스티네를 살살 꾀기 시작했다.

“자,생각해 봐요,비전하. 비 전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비밀 이야기를 비전하를 쏙 빼놓고 다른 친구에게만 한다거나 그럼 기분이 어떻겠어요?”

아리스티네는 무심코 무칼리를 떠올렸다.

무칼리가 비밀 이야기를 저만 빼놓고 다른 사람한테 한다

그건 아주 쉽게 떠올랐다.

자신을 앞에 놔두고 리트텐과 속닥속닥하는 모습.

리트텐과 무칼리가 친한 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인데…….

끙,아리스티네가 신음했다.

“봐요. 기분 별로죠?”

“그,그렇긴 하지만 무칼리가 자기 비밀을 말하고 싶은 상대한테 말하는 게 옳은 거고.

“그렇죠. 하지만 기분은 안 좋 잖아요?”

“으응..”

“비전하께서도 무칼리 장군에 게 집착하고 계신 거네요.”

아리스티네가 놀라 토끼 눈을 떴다.

“그런 건가?”

“확실하죠.”

하미르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내가 무칼리 경한테 집착하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리트렌과 무칼리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과학 공부를 해 볼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괜찮아요. 친한 친구 사이에는 그게 당연하니까.”

그게 위로처럼 들려서 아리스티네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하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제왕안으로 봤던 장면 중에서도 서로 친한 친구 옆에 앉겠다고 집착하고 싸웠던 애들이 있었어!’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미르는 웃음을 깨물며 이 순진한 황녀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머리는 좋고 눈치도 빠른데 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이렇게나 서툰 걸까.

‘아마 아무도 없이 혼자 자라왔기 때문이겠지.’

확인해 본 결과 황녀는 정말로 어렸을 때 유폐당한 게 맞았다.

하미르는 그게 꽤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타인의 성장 과정 따위 그에게 어떤 감상도 일으킬 게 아니었다.

하미르는 웃음 한 번으로 상념 을 털어 내고 아리스티네에게 속살거렸다.

“나도 우리가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뿐이에요.”

그가 바람에 흐트러진 아리스티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아니면 친하다고 생각한 게 나뿐이었나.”

하미르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섬세한 조각처럼 우미한 그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자 순식간에 애틋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풍겼다.

“루.....”

아리스티네는 미안한 마음에 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소중한 두 번째 친구에 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그런 게 아니었어. 나도 루가 좋아.”

그런데 대답이 다른 곳에서 들 려 왔다.

“누가.. 좋다고?”

화산의 가장 밑바닥에서 조용 히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아리스티네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타르칸?”

타르칸이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사막의 바위처럼 메말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 왔어?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목소리가 바닥을 긁는것처럼 그르렁거리며 나왔다.

타르칸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일그 러트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잡아챘다.

가느다랗고 여린 몸은 그것만으로 그의 품에 쏙 들어온다.

아리스티네의 체온과 향기가 온몸으로 가득 느껴졌다.

그게 안심이 되어서, 마음이 푹 놓여서…… 타르칸은 그 사실에 더 분노했다.

지금 제 아내가 다른 남자-그것도 제 이복형인 하미르에게 좋다는 말을 했는데. 겨우 끌어 안는 것만으로 기분이 풀어지려 하다니.

그것도 아리스티네가 직접 안긴 것도 아니었다.

‘배알도 없는 놈이냐,난.’

턱에 힘을 줘 봤지만,보드라운 몸과 익숙한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타르칸? 무슨 일 있어?”

아리스티네가 자신의 허리를 감은 타르칸의 팔에 손을 얹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결국 타르칸은 하아아,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할 소리냐.”

“뭐가? 무슨 말이야. 내가 무 슨 짓 했어?”

아리스티네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감은 손에 더 꽉 힘을 주며 하미르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이복형은 여전히 번드르르하니 미끈한 낯짝을 하고있었다.

하미르는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칸은 그의 시선에서 아리스티네를 감추듯 몸을 슬쩍 틀었다.

그제야 하미르의 시선이 타르칸을 향했다.

두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묘한 침묵에 타르칸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아리스티네가 앗,하고 입을 열었다.

“아, 소개할게. 이쪽은 루. 루, 알겠지만 내 남편이야.”

그 간결한 소개에 타르칸의 눈썹이 꿈틀했다.

“루…… 라고.”

“응.”

아리스티네가 아주 당연하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꿈틀거렸던 타르칸의 눈썹이 이번에는 안으로 모였다.

‘왜 저놈을 애칭으로 부르는 거지?’

심지어 그냥 애칭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하미르를 ‘루’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미르 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아리스티네에게는 허락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묻지 못했다.

친해서,좋아서.

그런 대답이 나올까 봐.

“간만에 뵙습니다.”

하미르가 타르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타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개수작이지?”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경고하는 맹수 같은 어조였다.

하미르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예? 저는 그저 인사한 것뿐인데요.”

타르칸은 대체 저 여우가 왜 저러나 싶었다.

그 답은 금방 알게 되었다. 그 의 옷깃을 붙드는 아리스티네의 손 덕분에.

“타르칸,왜 그래. 내 친구야.”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에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그녀 는 예전에 하미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비전하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가문이요.〉

어느 가문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즉,그는 타르칸과 적대시하는 왕후파의 일원이라는 뜻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그렇지만,지금 사석에서는 그냥 내 친구니까.’

물론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날을 세워 봤자 아무런 정치적인 이득도 없잖 아.’

아리스티네는 맹수 조련사가 된 기분으로 으르렁거리는 타르칸을 달랬다.

“친구라고?”

“응,친구.”

“저놈이 무슨 친구라고 그러......”

거칠게 말하던 타르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아리스티네에게 물었다.

“나는?”

“너는 내 남편이지?”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둣 아리스티네가 반문했다.

“그래,나는 네 남편이지. 하나 뿐인,유일한 남편.”

타르칸이 배부른 맹수처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황당한 시선으로 타르칸을 바라봤다.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하미르를 향해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친구는 여럿이고.”

“네,저는 그중에서 ‘좋아하는’ 친구고요.”

하미르가 매끄럽게 웃었다.

‘좋아하는’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힌 듯한 어조였다.

파지직.

두 남자 사이에 불꽃과 번개가 동시에 튀었다.

아리스티네는 홈,하고 생각했다.

‘정치적 적수를 만나면 이런 분위기인가.’

실바누스에는 ‘황제파와 귀족파는 낮에는 적,밤에는 친구’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줄은 몰랐다.

‘하긴,왕후도 엄청 날카롭게 굴었지.’

어쨌든 이런 분위기인데 두 사 람을 더 붙여 놓을 필요는 없었다.

“슬슬 돌아가야겠다.”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말하며 타르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타르칸이 냉큼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래,돌아가자.”

타르칸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하미르가 정중하게 아리스티네의 손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대장간에 가시는 거면 데려다 드리지요.”

우아한 눈매가 나붓하게 휘었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에게는 어깨를,하미르에게는 손을 붙잡힌 채 우뚝 멈춰 섰다.

‘아니,둘 다 왜 이래?’

정치적 이권을 놓고 다투다 보 니 눈앞에 있는 모든것을 놓고 다투나 보다.

‘성가셔.’

둘이서 뭘 두고 다투든 상관없 으니까 그 자리에서 자신만 빼주면 좋겠다.

아리스티네는 자유로운 쪽의 손으로 제 어깨를 쥐고 있는 타르칸의 손을 붙잡았다.

타르칸의 얼굴이 밝아지고,하미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손과 하미르의 손을 착 이어 주었다.

그냥 이어 주는 게 아니라 손 가락이 맞물리도록 아예 엮어 주기까지 했다.

“둘이 사이좋게 가든가.”

아리스티네는 홀로 성큼성큼 숲길을 걸었다.

남겨진 두 남자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타르칸과 하미르는 황당해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가 숲길 너머로 사 라질 때까지 넋 놓고 지켜보고 있다가,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하여간 진짜.

타르칸이 투덜투덜했다.

제 아내가 특이한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럴 줄은.

반면 하미르는 아리스티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입매를 쓸었다.

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하미르가 사람에게 이렇게 흥미를 보이는 건 처음이라, 타르칸은 기분이 더럽고 그보다 더 불안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타르칸의 말에 하미르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냥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을 뿐이야.”

“우연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이 왕궁이 얼마나 드넓은데 우연히 만난단 말인가.

타르칸의 불신에 하미르가 웃 었다.

“너무 그러면 의처증 같아.”

“쓸데없는 소리.”

타르칸은 하미르의 말을 일축 했다.

“아까 그 이상한 존대는 뭐야. 아리스티네 앞에서 네 본색을 숨기고 온순한 척하나 본데 걔 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해.”

타르칸은 경고하듯 말했다.

여우 같은 하미르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내준 이가 몇이던가.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그랬다. 하미르의 추종자가 되어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타르칸.”

하미르가 눈매를 휘며 이복동생을 바라봤다.

“의처증은 아내가 싫어한다.”

타르칸은 어쩔 수 없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거의 자동 반사였다.

하미르는 재밌다는 둣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럼 또 보자구.”

하미르가 먼저 뒤돌아서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타르칸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바람에 나긋하게 흔들리는 백금발을 노려보았다.

* * *

문이 열리는 소리가 거칠었다.

아리스티네는 수반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일지는 거친 소리가 나는 순간 알아챘다.

“아리스티네.”

아니나 다를까 타르칸이 들어오며 그녀를 불렀다.

“응.”

조용히 대답하자 문을 부수다 시피 하며 들어온 기세는 다 어디 갔는지,그는 머뭇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리스티네.”

“왜?”

타르칸이 무슨 용건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아리스티네 는 그렇게 물었다.

‘보나 마나 루에 관한 거겠지.’

타르칸의 정치적 적대 세력과 사이좋게 놀고 있었으니 그가 의문을 가질 만도 했다.

아리스티네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그게 비즈니스 파트너에 대한 예의였다.

‘나한테 많이 화났나?’

하지만 힐끔 올려다본 타르칸 에게선 분노한 기색은 없었다.

아니,화는 났지만,그보다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애가 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해져서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타르칸은 몇 번이나 속으로 말을 삼켰다.

하미르와는 뭐냐,좋다는 말은 진심이냐,왜 애칭으로 다정하게 부르냐.

당장 하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서 쏟아져 나올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단一.

“날 불러 봐.”

갑작스러운 말에 아리스티네는 의아해 하면서도 그를 불렀다.

“타르칸?”

시키는 대로 불렀는데 어째서인지 타르칸의 기세는 더 사나워졌다.

타르칸은 으득 이를 갈았다.

‘왜 그 여우 놈은 ‘루’ 고 나는 그냥 타르칸인데?’

하지만 강요하고 싶지않았다.

애칭으로 부르라고 해서 부르는 것보다 아리스티네가 먼저 스스로의 의지로 그렇게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너를一.’

타르칸은 홧홧해지려는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리스티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히,조금만 험하게 다뤄도 깨지는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아리스티네의 이름을 혀 끝에 올려놓았다.

“리……”

“리?”

이어지지 않는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타르칸은 배에 힘을 주고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전투에서도 내 본 적 없는 용기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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