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화
“리본?”
혹시 리본이 풀렸나?
아리스티네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지금 옷차림에 리본은 달려 있지 않았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다시 타 르칸을 향했다.
그는 뭔가 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줍은 얼굴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리네’라고 말하리라.
“리……,본.”
“리본이 왜?”
알 수 없는 말에 물었을 뿐인 데 타르칸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됐다.”
‘뭐지?’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 같은데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면서 도 아리스티네는 그의 토라진 얼굴이 미관상 꽤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끄럽고 민망하 고 수줍어하는 얼굴도 나름대로 괜찮았어.’
사나운 맹수 같은 남자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배 속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수줍음이 많아도 잘 티 내진 않았는데 그렇게 부끄러워한 건 리본을 좋아해서인가?’
무칼리도 그렇고 이곳 남자들 은 취향을 은밀하게 숨기나 보다.
‘용기 내서 은밀한 취향을 말 했는데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해서 토라졌고.’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테이블 건너편에 앉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리본을 달고 있는 타르칸이라……’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 여우 놈이랑은 무슨 사이야?”
타르칸은 너무 의처증처럼 들 리지 않을지 주의하면서 물었다.
하미르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그래 도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아리스티네에 관한 거니까.
“친구라고 말했잖아.”
타르칸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한다며.”
“조…… 다고 그놈에게 말했잖아.”
“잘 안 들려. 좀 크게 말해 봐.”
타르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잠시 입 안쪽을 살짝 물 었다가 주먹을 쥐고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좋아한다며.”
“당연히 좋아하지.”
거침없는 즉답이 아리스티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뭐가 문제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니 순식간에 명 치께가 답답해졌다.
‘내가 왜 남편인지 알 것 같다고 했으면서.’
역시 정략혼의 남편일 뿐이고, 사랑이나 연애 감정 같은 건 다른 사람에게 느낀다는 걸까?
방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역시 이렇게 확인받으니 생 각했던 것보다 훨씬 괴로웠다.
심장이 원래 있어야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발밑으로 추락한다.
그때 아리스티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감이 없으면 왜 친구가 되겠어. 좀 이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야.”
타르칸은 멍하니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제대로 그 말을 인지하기도 전 에 저 아래로 꺼져 버렸던 심장 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온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주 그냥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지.’
하미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여전히 기분이 나빴지만,그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라는 걸 확인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스티네에게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은 하미르가 불쌍하다고 생각 할 정도의 여유는 되찾았다.
물론 불쌍한 것보다 고소하다는 감정이 훨씬 더 컸다.
기대를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 하면서도 슬그미니 입꼬리가 올라가며 저절로 말이 나왔다.
“그럼 나는.”
“어?”
“나는 어떤데.”
눈을 깜빡이며 타르칸을 바라 보던 아리스티네가 픽 웃었다.
으이구,이 손 많이 가는 남편 님 같으니라고.
딱 그런 시선이었다.
“말했잖아. 너는 수줍음이 많고 조금 성一.”
“됐다.”
타르칸이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내가 뭘 기대한 거지. 변태라는 말만 듣게 될 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턱을 괴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이런 점까지 좋다니 정 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아리스티네는 주기적으로 칭찬 을 요구하는 남편을 어쩔 수 없 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근데 왜 항상 괜찮다거나 좋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말을 끊지? 민망해서 그런가.’
막상 요구해 놓고 부끄러워하다니.
‘혹시 부끄러운 것을 즐기나.’
역시 자신의 남편은 수줍음이 많은 변태였다.
“그나저나 여우 놈이라니.”
아리스티네가 가볍게 웃었다.
“제비랑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제비?”
“ 응”
“그것도 꽤 어울리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 타르칸이 피식 웃었다.
“루는 조금 과하게 친절한 면이 있으니까.”
“과한 친절? 그게?”
“응,상냥하잖아?”
대체 어디가.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시종일관 웃고 다니는 거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걸 상냥하고 친절하다곤 할 수 없다.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그는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점을 말했다.
“근데 그놈을 계속 그렇게 부를 생각이야?”
절대 제 입으로 ‘루’라고 말하고 싶지않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 그게 이름인데”
“..............뭐?”
‘아니야?’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타르칸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그 여우 놈을 계속 그렇게 불렀던 게.....”
단순히 그게 이름인 줄 알았다는 건가.
타르칸은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매를 손으로 가렸다.
좋아서,특별해서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었다.
하미르의 편법이었을 뿐이다.
‘그럼 그놈이 하미르인 줄 모르고 있다는 건가?’
냉큼 알려 주려고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타르칸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내가 알려 주는 것보다 직접 알게 되는 게 더 낫겠지.’
그편이 그 여우 놈의 실체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그놈이 얼마나 손익 계산이 빠 르고 치졸한 놈인데.
거기다 제 본모습은 싹 숨기고 여우처럼 유부녀한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질 않나.
평소에는 하미르가 뭘 하든 그 다지 관심도 없던 타르칸이었으나 지금은 있는 욕 없는 욕 다 끌어내서 물어뜯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치사한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아리스티네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치사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칸이 잠시 말이 없는 사이,아리스티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마지막 여름의 향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을이었다.
1,2주 뒤면 푸릇한 정원수도 끝이 붉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할 거다.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으로 봤던 네프테르의 죽음이 올해라는 가정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시일이 너무 촉박해.’
자신을 독살범으로 모는 것에 대한 대비책은 물론,반격할 계획까지 세워 놨다.
하지만 정작 네프테르의 죽음을 막기 위한 실마리는 찾지 못 했다.
타르칸에게 궁인과 시종의 신원 관리,왕의 궁 경비 강화와 기미에 대한 체계를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방 차원이었다.
안심할 수 있는 확고한 대책은 아니었다.
‘그 사건에 관해 한 번만 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리스티네는 습관적으로 수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면은 여전히 잠잠했다.
타르칸은 꽃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아리스티네를 응시했다.
요즘 아리스티네는 틈만 나면 수반 위의 꽃을 완상하는 것 같다.
꽃 따위,타르칸에게 어떤 의미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아리스티네가 이렇게 좋아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온실을 만들라고 명해야겠군.’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난 온실 을 본 아리스티네가 눈을 빛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꽃을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표정이 왠지 시무룩했다.
‘당이 떨어졌나. 아니면 배가 고픈가?’
슬슬 아내에 대해서 파악한 그였다.
안타깝게도 보통이라면 정답이었겠지만,지금은 틀렸다.
타르칸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저녁때였다.
“밥 먹으러 갈까.”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었다.
네프테르의 일이 마음에 걸렸 지만 그래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힘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잠잠했던 수반 속 표면이 흔들렸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재빨리 꽃을 수반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수면 위로 영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 * *
수면 거울 속에서 아리스티네를 비롯한 왕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 중이었다.
보이는 테이블의 크기를 어림잡았을 때 직계 왕족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전경을 확인한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흔들렸다.
‘독살범으로 몰렸던 미래와 옷차림이 같아!’
그 말은 같은 날이라는 뜻이다.
한가롭게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독살범으로 몰리기 전에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아리스티네는 서둘러 네프테르의 모습을 확인했다.
각도가 한정되어 있어서 참석자의 얼굴을 전부 확인할 순 없었지만,네프테르는 보였다.
묘하게 네프테르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이렇게 빤 히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티 나 지 않을 정도였다.
몇 시간 내에 죽을 것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걸 보면 역시 독살인가?’
아리스티네는 최대한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노란 국화꽃이 소담하게 장식된 화병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아이루고식 정찬이 차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은 딱히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주들의 머리 길이를 확인한 아리스티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역시 올해야.’
자신을 포함해 모든 공주가 내년이나 그 이후의 가을에 지금과 비슷하게 머리를 길렀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때,왕후가 입을 열었다.
[역시 가족끼리 전부 다 모이니 좋군요. 새사람이 들어오고 처음이지요?]
[음...]
네프테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그제야 수면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을 먼저 살펴보느라 이제야 확인했다.
‘내 표정이 왜 저러지? 독에 관한 뭔가를 눈치챈 걸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충격을 받은 얼굴.
감정이 격하게 드러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아리스티네는 스스로이기에 알 수 있었다.
미래의 자신이 엄청나게 충격받았다는 것을.
수면 거울 속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은연중 계속해서 한쪽을 향했다.
‘대체 저쪽에 뭐가 있길래?’
지금 시야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미르가 마력석 광산을 잘 정리하고 왔다던데요?]
왕후의 말에 네프테르의 시선 이 한쪽을 향했다.
수면 거울 속 아리스티네의 시 선이 향하는 쪽과 같은 쪽이었다.
‘하미르가 돌아왔구나.’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쪽에 하미르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하미르가 돌아왔다는 것에 저렇게 충격받는다고?’
딱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네프테르가 열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하미르 네 노고가 컸다. 잘했더구나.]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을 뿐입니다.]
‘어라?’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인데.’
어조나 발성은 낯설었지만,목소리 자체는 귀에 익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새기기 전에 왕후가 입을 열었다.
아리스티네는 일단 제왕안으로 보이는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 하미르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미르가.]
[결혼에 순서를 따지는 건 옛날 일이라고 하지만,하미르보다 더 어린 타르칸도 혼인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하미르 오라버니께서 도 슬슬 총명하고 아리따운 영애와 가정을 꾸릴 때지요. 예니카도 어서 새언니를 보고 싶네요.]
그다지 새언니를 반길 것 같지 않은 예니카리나가 그러는 게 의외였다.
네프테르는 “홈……” 하고 생각에 잠겼다.
딱히 솔깃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그것보다는 왕후의 속셈 이 무엇인지 재 보는 시선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하미르가 여태껏 혼인을 미루 고 있는 이유.
그건 왕후파 쪽에서 왕자비 자리를 미끼처럼 두고 귀족들을 낚고 있기 때문이다.
왕후는 쟁쟁한 가문의 여식들을 마치 며느리로 들일 듯 여지 를 주었다.
귀족들은 왕후가 다른 가문에도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 했다.
아니,오히려 다른 가문보다 제 가문의 여식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더 충성심을 보 이는 자들도 있었다.
계속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써 먹을 줄 알았는데 혼인이라니?
무슨 꿍꿍이냐는 네프테르의 시선에 왕후가 미소 지었다.
[며느리가 들어오니 궁 안이 복작복작하고 밝은 게 또 새사 람을 들이고 싶어지더군요. 아리스티네가 오고서 왕실에 얼마나 많은 경사가 있었습니까. 아이루 고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 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후가 저렇게 말하니까 좀 무서웠다.
[게다가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 슬슬 손주도 보고 싶고요.]
네프테르는 왕후를 지그시 바 라보았다.
왕후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결국 네프테르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한번 생각해 보지.]
네프테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고 수면 거울 속 아리스티네가 걱정스레 입을 열 었다.
[부왕 폐하,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지요?]
[거의 드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 부왕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거예요. 예니카가 드릴까요?]
파엘라미엔과 예니카리나 역시 한 마디씩 했다.
네프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속이 조금 안 좋을 뿐이야.]
[편찮으신 건가요? 당장 궁의....]
[그렇게 수선 떨 필요 없다.]
네프테르가 딱 잘라 말했다.
[체한 것뿐이야.]
그 말만 남기고 네프테르는 더 이상 소란 피울 것 없다는 둣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폐하……?]
네프테르의 몸이 그대로 힘없이 허물어졌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