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리스티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타르칸이 고개를 살짝 들어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찬란한 아침 햇살에 모든 것이 깨어나 활기차고 싱그럽게 기지개를 켠 가운데,휘장으로 가려진 침대만이 짙은 밤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것같았다.
이 비좁은 침대가 세계의 전부 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계.
아리스티네는 제가 내뱉는 숨결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입술에 닿은 뜨거운 숨결이 저를 바짝 마르게 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깨닫고 보니 그건 타르칸의 숨결이었다.
아니,제 숨 역시 뜨겁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배 속에 불이 인 것처럼 뜨거울 리 없으니까.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숨이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달구고,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숨결이 그의 입술을 뜨겁게 적셨다.
서로의 열기가 서로를 잡아먹 을 둣 날름거렸다.
그 격렬한 열기에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타르칸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스쳤다.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어머!”
놀란 외침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아리스티네는 주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침실 문가에서 궁인들이 입을 틀어막은 채 눈치를 보며 그대로 조용히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궁인들이 아하 하,어색하게 웃었다.
“저,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계속하세요.”
“후후,아침부터 정말……”
“어젯밤 왜 리본을 고르시나 했더니,으흥흥!”
궁인들이 몸을 비비 꼬며 방정 맞게 웃다가 타르칸의 시선을 받고 차렷 자세가 되었다.
살인이라도 날 것 같은 눈빛이 었다.
궁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슬금 슬금 뒷걸음질 치며 침실을 빠 져나가려 했다.
사실 들어오기 전에 문에 귀를 대 봤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두 분 다 아직까지 주무시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문을 연 건데 설마 그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말은 굳이 필요 없지.’
‘행동이 중요한 것을.’
그들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는 사이,아리스티네는 제 몸 위에 엎드린 타르칸을 밀어내며 침대 에서 일어났다.
몸에 감긴 리본을 풀어낸 그녀 가 문을 닫으려는 궁인들을 불렸다.
“무슨 일이야?”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침실에 함께 있을 때엔 무슨 일이 있어 도 들어오지 않던 이들이었다.
이렇게 문을 연 것엔 이유가 있을 터다.
궁인들은 문을 완전히 닫지도, 그렇다고 아예 다시 열지도 못 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답했다.
“아,그게……. 우미루 님께서 도착하셔서요.”
“생각해 보니 우미루 님은 나중에 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미루 님도 그러시길 바랄 거예요.”
궁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입을 놀렸다.
아침 운동(?)을 하는 두 분 전하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이 그들의 판단력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야,그게.”
아리스티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궁인들에게 걸어갔다.
날이 밝는 대로 최대한 빨리 우미루를 부르라고 명했던 사람은 아리스티네였다.
시간을 다투는 급한 일이니 혹 시 자신이 일어나기 전에 우미 루가 도착하면 깨우라고 했던 것도.
침대에 홀로 남은 타르칸은 마 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 렸지만,이내 포기하고 일어섰다.
그는 아리스티네에게 다가가 침의 위로 도톰한 가운을 걸쳐 주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해 연약한 아내가 병에라도 걸릴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타르칸은 가운 안으로 들어간 아리스티네의 머리칼을 밖으로 빼내며 정리해 주었다.
남자다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은발이 사라락 흐트러질 때마다 그녀의 흰 목선이 드러났다 사 라졌다.
그 모습이 은밀하고 내밀해 보 여 궁인들은 얼굴을 붉힌 채 시 선을 내리깔았다.
과연 침실에서 볼 법한 광경이
아리스티네는 가운을 여미곤 궁인들에게 다가갔다.
“우미루 경은?”
“산호방에서 기다리십니다.”
“그쪽으로 가자.”
아리스티네는 걸음을 옮기다 빙글,타르칸을 돌아봤다.
“그럼 저녁에 봐. 그리고 내가 어젯밤에 말했던 것도 잘 부탁 해.”
어젯밤,아리스티네는 네프테르의 건강 상태에 관해 알아보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타르 칸에게 부탁했다.
아리스티네와 함께 우미루에게 갈 생각이었던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밀린 일이 많았다.
이제 가을이고,겨울이 오기 전에 마수 평원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야 했다.
아리스티네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낮 동안 최대한 압축적으로 일해야 한다.
“우미루가 집적거리면 봐주지 마.”
아리스티네가 웃었다.
“우미루 경이 뭘 나한테 집적 거려.”
농담으로 치부하는 모습에 타르칸은 눈썹을 까딱했지만,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의처증.’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예쁜데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타르칸 은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자다 깨서 부스스하니 부은 얼 굴을 보고도 진지하게 그런 생 각을 하다니,과연 타르칸의 눈 에 끼인 깍지가 심각했다.
* * *
산호를 메인으로 꾸며져 있는 응접실에 방만한 태도로 앉아있던 우미루는 아리스티네를 보 고 싱긋 웃었다.
“아침부터 비전하께서 저를 기다리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데요. 어젯밤부터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녀는 오늘도 빼놓지 않고 아리스티네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아침부터 미안. 바쁠 텐데 시간 괜찮아?”
“비전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 히 괜찮지요.”
아침을 열어 줄 진한 차가 나
온 후,아리스티네는 궁인들을 전부 물렸다.
그 모습에 빙글거리던 우미루 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우미루 경,부탁이 있어. 그리 고 지금부터 내 말은 함구해 주 었으면 좋겠는데.”
“제 입술은 고귀하신 분의 손 등에 키스할 때만 움직이지요.”
말은 정말 청산유수였다.
아리스티네는 피식 웃곤 표정 을 굳혔다.
그리고 어겟밤 생각했던,우미 루에게 부탁할 것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미루는 중간에 끊지 않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래서 폐하의 궁의 중 한 명을 섭외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리스티네의 말에 우미루가 다리를 꼬며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흐음,그건 좀 어려운 일이네요.”
그 대답에 아리스티네는 ‘역시’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무리한 부탁 이긴 했다. 우미루뿐만 아니라 다른 의사를 끌어들여 달라는 거니까.
우미루가 씨익 웃었다.
“一라고 보통은 생각하겠지만, 이 우미루가 보통 사람이어야지요. 대단한 능력자 아니겠습니 까.”
그녀가 당당하게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비전하께는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저 뿐만이 아니라 의료계 전반이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 있나 싶었지만,아리스티네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우미루 경.”
“입으로만요?”
우미루가 장난스레 윙크를 했다.
“물론 사례는 할 거야.”
아리스티네는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 돈 많아.”
제법 자신의 재력에 자부심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우미루는 깔깔 웃었다.
“물론 돈도 좋지만요.”
그녀는 돈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우미루가 짐짓 정중한 체하며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전하,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파트너?”
“하미르 전하께서 돌아오셨잖아요. 귀환 환영 파티가 열릴 예정이래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멈칫했다.
“하미르 왕자가 돌아왔다고? 언제?”
그런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하미르가 돌아온 후 문제의 식사 사건이 생기니 절로 긴장이 됐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저도 모르 겠지만 조금 되었을걸요. 돌아왔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도 이번 파티 초대장을 보내면서거든요.”
우미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귀환 후에 국무 회의에 참여 하지도 않으셨으니 정확히 언제 인지는 측근들만 알겠죠. 궁내에서 하미르 전하의 목격담이 꽤 있었으니 딱히 비밀로 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아리스티네는 문화적 차이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루고에서는 직계 왕 족…… 그것도 계승 서열 1위인 왕자가 정무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는데도 의전 같은 걸 하지 않아?”
실바누스에서는 당연히 귀환 일에 맞춰 의전을 치렀다.
날씨를 봤을 때 1,2주 내에 사건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면서도,하미르의 귀환 소식이 들 려오지 않아 조금 안심했었다.
날씨야 변덕스럽게 다시 따뜻 해질 수 있지 않은가.
1,2도 차이여도 자연의 변화 에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미 하미르가 궁에 와 있다니.
언제 왕족들끼리 정찬을 함께 해도 이상하지 않다.
“딱히요. 전사로서 전공을 세운 게 아니라면 생략하는 경우도 많아요. 이번에도 왕후 폐하께서 따로 주최하지 않으셨으면 귀환 파티도 열리지 않았을걸요.”
아마 하미르의 건재함을 자랑 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거겠지.
“……파티는 언제인데?”
“나흘 뒤입니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창밖을 내 다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다.
우미루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미안하지만,정찬 때까지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음,내가 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나 초대장도 못 받았어.”
“받으셨을걸요? 왕후 폐하께서 이런 일에 비전하를 빼놓으셨을 리 없죠.”
우미루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아리스티네는 흠,하고 찻잔을 돌렸다.
결혼 후부터 웬만한 파티 초대장을 다 거절 중이니 그 속에 섞여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후의 초대장이라면 당연히 따로 빼놓고 고려할 문제였지만, 요즘 네프테르의 죽음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하느라 아리스티네 는 정신이 없었다.
궁인들이 보고할 때 파티라는 말만 듣고 대강 고개를 저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 도 될까? 내가 앞으로 2주 정도 는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흐음,그러면 미루는 값도 받고 싶은데요.”
우미루가 차를 홀짝이며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물론이지.”
“그럼 이자까지 합쳐서 저랑도 데이트해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리스티네가 눈을 깜빡였다.
“좋잖아요. 여자들끼리.”
눈매를 찡긋하며 웃는 우미루는 어쩐지 짓궂어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그 녀를 바라보았다.
“저기,우미루.”
아리스티네의 손가락이 찻잔의 은테를 슬쩍슬쩍 쓸었다.
“우리도 친구일까?”
그 물음에 우미루가 눈을 깜빡 였다.
곧 그녀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 며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전하께서 저를 친구라고 생각해 주시면 무한한 영광일 겁니다.”
“너무 윗사람을 대하는 투 아니야?”
윗사람이 맞으시니까요.”
우미루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 말에 잠시 우미루를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무칼리와도 그렇지 않은가.
상하 관계에 있어도,일로 엮였다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인연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될지 모른다.
아리스티네는 그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 무한한 우연의 가능성에 스 스로가 속해 있다는 게 조금 벅찼다.
아리스티네는 이제 많은 사람 을 만날 것이고,그 많은 사람들 과 다양한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비전하께서는 제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셨지요. 저는 친구로서 비전하의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겁니다.”
두 여자는 손을 맞잡은 채 서 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리스티네는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는 사 실도 좋지만,우미루가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네프테르에 대 한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 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방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부터 차근차근 해야지.’
그때,문을 부드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우미루 님,찾아오신 분이 있는데요. 화장실 간다고 하고 사라지시면 어떻게 하냐고……”
궁인은 아리스티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병동에서 찾아온 의사가 30분째 울고 있어서 어 쩔 수 없었다.
“딱 좋은 순간에……”
칫,하고 혀를 찬 우미루가 아리스티네에게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응,역시 바빴구나. 어서 가 봐. 와 줘서 고마워.”
“제 기쁨인걸요.”
우미루가 싱긋 웃고는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기 전,“우미루 니이 이임!”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미안하네.’
아리스티네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우미루의 협력을 받아 가장 걱정하던 것을 해결하자,머리 한편으로 미뤄 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타르칸.
침실을 빠져나올 때부터 어째 서인지 머릿속에서 그가 떠나가질 않았다.
예전에는 그냥 가까이 붙어 있어도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요즘은 좀 이상했다.
그가 맞닿을 때마다 왜인지 몸이 불편했다.
아침의 미묘했던 느낌에 이어서,자꾸만 수면 거울을 통해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타르칸의 위에 겹치다시피 누워서 눈을 맞추고 있던 자신의 모습.
네프테르가 위급하다는 슬픔에 빠져 있어도 그렇지,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일어 났을 때도 손이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의지가 아니었다. 손이 그랬던 거다.
하도 그래서 이제는 익숙하고 자연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왜 자꾸만 타르칸을 주물럭대는 거야! 그리고 왜 그 감촉을 기억하는 건데!’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했다. 아리스티네는 나쁜 손을 찰싹찰싹 때렸다.
한참 그러던 그녀는 후,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일단 어떤 독이 있는지부터 조사해 보자.’
아리스티네는 거울 앞에 서서 드레스 자락을 탁탁 폈다.
주름을 펴는 게 아니라,의관을 정제하며 각오를 다지는 행위였다.
아리스티네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오늘 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경우의 수로 세세하게 나누어진 갖가지 예측 상황과 그에 대한 대응책.
완벽한 대응이란 없겠지만 그 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메스 와 스텐 사업도 뒷전으로 미뤄두고 이 일에만 몰두했으니.
* * *
“갈까?”
“응.”
타르칸의 물음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그가 내민 팔을 힘주어 잡았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직계 왕족들이 모두 모여 오찬을 하는 날.
제왕안으로 본,네프테르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