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무언가를 예고하듯,그의 숨결 이 아리스티네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그의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입술에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감히 여 기가 어디라고!”
“비전하께서는 지금 휴식 중이십니다!”
“시끄럽다! 죄인을 연행해 가려는 것뿐이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아리스티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타르칸을 획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지금 자신이 뭘 하려고 했단 말인가.
타르칸과 꽁냥꽁냥하는 미래를 보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했는데,이 무슨……!
‘저 가슴은 위험한 가슴이다.’
타르칸의 가슴이 얼굴에 닿았던 때부터 기억이 희미했다.
사고를 마비시키고 최면을 거는 어마무시한 가슴이었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저 커다란 빵 두 쪽에 홀렸단 말인가.
아리스티네는 애써 시선을 떼 며 문을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 며 문이 열렸다.
제왕안을 통해 봤던 대로 십수 명의 병사들이 일시에 방 안에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지?”
타르칸의 목소리는 바닥을 긁 는 것처럼 낮았다.
병사들은 움찔했다.
타르칸의 노기를 정면에서 접 하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히 이런 식으로 왕자의 궁에 난입한 것은 화낼 만한 일 이었지만, 이 정도로 분노할 줄 은 몰랐다.
왠지 모르겠지만 타르칸은 지금 방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다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빛을 하 고 있었다.
당당하게 들어왔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병사들은 다들 어깨를 굽히고 불안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주 춤주춤하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타르칸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않으려 애쓰며 아리스티네에게 고했다.
“왕자비 아리스티네, 감히 국왕 폐하를 독살 시도한 범인으로 연행한다!”
듣는 사람의 심장이 덜컹하는 소식이었다.
궁인들은 놀라서 입을 가렸고, 타르칸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아리스티네 역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요는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폐하를 시해한 범인이 아니야. 독살 시도한 범인이라고 했어!’
그 말은 곧 네프테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래가 바뀌었다.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왕 폐하께서 살아 계셔.’
아리스티네는 안도와 기쁨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노력이 비극을 막았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일러.’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네프테르가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결정 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생사의 경계를 헤매는 상황일 수 있다.
그래도 아직 안가하시지 않은 걸 보면 우미루를 통해 섭외한 궁의가 제 몫을 다해 주고 있다 는뜻이다.
‘끝까지 치료를 잘해 줄 거라고 믿고,나도 내 몫을 다해야 해.’
그래야 진짜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내가 독살범으로 몰리면 타르칸에게까지 타격이 있으니까.’
결백이 밝혀지더라도 찜찜한 구석을 남겨 두면 정치적인 약점이 되어 타르칸을 옭아멜 것이다.
“감히 누구를 모함하는 거냐.”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보호하 듯 그녀의 앞에 섰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넓고 단단 한 등을 올려다보았다.
제왕안을 통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견고한 벽처럼 버티고 있는 그 의 모습을 보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동시에 저 아래에서부터 용기와 힘이 샘솟았다.
누군가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것.
지켜 주려 한다는 것.
이게 이렇게나 힘이 되는 거였구나.
아리스티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타르칸의 등을 바라보았다.
“타르칸 전하께서는 가만히 계 십시오. 이미 증좌도 나왔습니다.”
“하,대체 얼마나 대단한 증거길래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거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비에게.”
“……비전하의 소지품에서 독약이 나왔습니다.”
“그게 정말 내 비의 소유물이 맞고? 아무런 확인 없이 바로 연행이라—.”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제왕안으로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벌벌 떨 정도로 두려운 표정이겠지만,아리스티네에게는 아니었다.
그건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신뢰해서 짓는 표정이었다.
“이,이렇게 자꾸 참견하시면 공범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간주하든가.”
타르칸이 두 팔을 대강 내밀었다.
“뭐 해? 어서 날 구속하지 않고.”
아리스티네는 미소 지었다.
어떻게 증거가 명확히 있는데도 자신을 믿을 수 있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네가 그럴 리 없으니까.〉
투욱,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움찔,맞닿은 곳을 통해 그의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아리스티네?”
“응.”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돌아서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얼굴을 확인하듯 시선을 맞춘다.
“괜찮아?”
“응,나 괜찮아. 네가 믿어 줘서,그래서 괜찮아.”
타르칸은 투명한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는……”
“응?”
타르칸은 조금만 세게 움켜쥐면 부서질 듯 가녀린 어깨를 감 쌌다.
자신의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하는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진짜로 괜찮을 수 있는 거지.
그가 아리스티네를 꽉 끌어안았다.
“타르칸?”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왜 이러나,주변을 둘러보는데 궁인들이 뭔가 글썽글썽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슴에 두 손을 꽉 모은 궁인이 감정을 못 이기고 버럭 외쳤다.
“비전하,저희도 비전하를 믿어요!”
“비전하께서 그럴 리 없다는 거,저희가 가장 잘 알아요!”
“혹여 누가 비전하를 모함하는 게 아닌지 궁에 들렀던 자들을 조사해 볼게요!”
우리 비전하께선 결백하시다며 궁인들이 너도나도 외쳤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조금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니,일단 수사권은 우리에게 있는데…….’
뭔가 서로를 신뢰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에 미안하지만 궁인들에게 조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점을 지적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묘했다.
“다들......”
아리스티네는 감동한 눈으로 궁인들을 바라보다가 외쳤다.
“내가 고기 사 줄게!”
“네!”
궁인들이 열렬하게 반응했다.
병사들은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여기서 왜 고기가 나와?’
그러나 아리스티네에게 이미 익숙해진 궁인들은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고기를 사 주신다니……!’
‘비전하께서 우리의 충정을 알아주신 게 틀림없어!’
‘리트렌 님이 비전하께서 사 주신 고기를 먹는 걸 부러워한 게 얼마인가.’
‘드디어 우리도 비전하의 마음이 담긴 고기를……!’
사실 고기가 아니어도 뭐든 좋았다.
병사들은 조금 황당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그들은 특수한 병사들이었고, 여태까지 연행한 건 모두 중죄인이었다.
당연히 한 번도 이런 분위기를 본 적이 없다.
전부 오열하거나 비명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면 질렀지. 이 훈훈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크홈!”
병사들의 대장이 크게 헛기침을 해 시선을 모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왕자비는 죄인으一.”
“내가 죄인이라고 확정된 건 아닐 텐데.”
아리스티네가 대장의 말을 툭 끊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격한 눈으로 궁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병사를 바 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아무 감정 없이 건조했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품에서 빠져나와 빙긋 웃었다.
“소지품에서 독약이 나왔을 뿐이라며? 그건 용의자가 될 사유는 되어도 범인이라는 뜻은 아니야.”
아리스티네의 어조는 빠르지 도,느리지도 않았다.
흥분한 기색 하나 없이,정확한 발음으로 차분하게 사실을 짚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은 혹 실제 범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 왕자비를 죄인으로 몰아넣고자 함인가?”
“그,그건 아닙니다!”
대장은 식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리스티네의 지적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었다.
그저 왕후의 명대로 움직였을 뿐이라,대장은 당황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리스티네를 죄인 취급하던 병사들의 태도가 단숨에 달라졌다.
말투가 정중해진 것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짙게 미소 지었다.
역시 이런 식의 흔들기는 유효 하다.
이다음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 해 줄 때였다.
“그래,워낙 사안이 사안인 만큼,독살 시도범을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 것이겠지. 폐하 에 대한 충정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 생각하네.”
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필시 자신들을 벌하겠다고 할 줄 알았다.
실제 벌할 생각이 없고,벌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그런 난동을 부리면 연행을 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태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본 왕자비는 이 일에 떳떳하다. 그러나 소지품에서 독약이 나왔다고 하니 조사는 받아야겠지.”
심지어 연행에 협조하겠다고까지 한다.
대장은 물론이고,다른 병사들도 당황했다.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감히 누구에게 이러느냐고 패악을 부리거나,억울하다며 엎어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겁에 질려 연행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분명 아까 아리스티네가 죄인 이라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지적 할 때까지만 해도 왕자비를 데 려가는 게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떳떳하고 당당하게 조사에 임해 이 불명예스러운 의혹을 씻겠다.”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는 고귀한 핏줄다운 위엄이 넘쳤다.
“앞장서 거라.”
그 말에 병사들은 연행 장소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리스티네를 위해 길을 열어주는 병사들의 모습이 호위 기사와 다를 바 없었다.
“아리스티네.”
타르칸은 그들을 따라가려는 아리스티네의 팔을 잡았다.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네가 왜?’라는 말이 돌아 올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혼자 해결하는 게 당연하다고 선을 긋는다면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리스티네 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팔을 잡은 그의 손 위로 반대편 손을 얹었다.
“뭐 해? 공범자 남편님.”
그 말에 타르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내 그가 피식 웃었다.
단 한 번도 범죄자가 된 적 없고,될 생각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나쁘지 않아.’
그렇게 두 사람은 병사들에게 나란히 연행(?)당했다.
* * *
왕후는 홀 안으로 들어서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연행해 오라고 했더니 왜 호위해 오는가.
아리스티네는 십수 명의 병사들을 앞세운 채 당당히 걸어 왕후의 앞까지 왔다.
아리스티네가 끌려오는 장면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했던 왕후는 속이 쓰렸다.
왕후는 내색하지 않고 고고하게 고개를 든 채 아리스티네를 불렀다.
“왕자비.”
“왕후 폐하.”
아리스티네는 여느 때처럼 우아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독살범으로 지목당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고 살 포시 미소 지었다.
홀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유야 뻔했다.
자신이 신문당하는 장면을 아이루고 곳곳에 퍼트리기 위해 왕후가 일부러 판을 벌인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던 아리스티네는 이곳에 있는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다.
'디오나?’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왔다.
‘너구나.’
내가 독약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 독살범으로 몰아간 사람이.
디오나는 두 손을 꼬옥 모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 가득 들 어찬 것은 승리에 고취된 희열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리스티네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그중에서 도 유독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하미르였다.
아리스티네는 부러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왕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왕자비,네 죄는 네가 알겠지.”
“죄가 없는데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리스티네가 담담히 답했다.
왕후는 하,하고 기가 막힌 웃 음을 지었다.
“뭐라? 죄가 없다?”
“예,그렇습니다.”
“뻔뻔하기도 하지,감히.”
왕후는 노기 가득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 고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할수록 좋았다.
억울하다며 울며불며 가련하게 떨면 연민을 느낄 자가 생기지 않겠는가.
왕후는 일부러 주변을 둘러보며 커다랗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아리스티네의 앞에 유리병을 던졌다.
마법이 걸려 있는 유리병은 그 충격에도 깨지지 않고 핑그르르 대리석 바닥 위를 굴렀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이건……”
아리스티네는 제 앞까지 굴러 온 유리병을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그녀가 황제에게 받아 실바누 스에서부터 가져온 그 유리병이었다.
“모르는 것이라 잡아멜 생각은 하지 말아라. 수사관들이 네 처소에서 찾아낸 것이니.”
왕후는 이 독약이 정말 아리스티네의 물건인지,아니면 디오나가 몰래 넣어 놓은 것인지 궁금 했다.
‘뭐,어느 쪽이든 자긴 모른다며 억울하다 하겠지.’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