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은 없습 니다. 제 물건이 맞으니까요.”
순순한 인정에 왕후는 당황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외였는지 소요가 일었다.
‘정말 왕자비의 물건이 맞다고?’
‘그럼 정말 왕자비가 독살범인가?’
‘하지만 진짜라면 저렇게 말하겠어?’
혼란이 찾아온 가운데 왕후는 당황을 숨기며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네가 네 죄를 인정하 는구나.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 말하면서 뒤로는 이런 짓을 꾸며? 아이루고에 와 폐하를 암살하려 한 이유가 뭐냐!”
왕후의 호통이 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리스티네가 외부인인 것을 이용해 압박하는 것이다.
감히 국왕을 시해하려 한 대역죄인이 같은 아이루고인인 것보다 배타적인 외국인인 게 사람들 마음에 적개심을 심어주는 데 좋으니까.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폐하,저는 이것이 제 물건이라고 했을 뿐,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티네는 차분하게 사실 관계를 짚었다.
“지금 왕후 폐하께서는 제가 이 독을 이용해 부왕 폐하를 독살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계신 건가요?”
왕후는 아리스티네의 차분한 대응이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제대로 말도 못 하면 좋으련만 역시 황녀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주장이 아니라 조사한 바에 따른 결론이다. 그리고 그 독약이 바로 실증이지.”
“저는 폐하께서 이 무도한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졸속 조사라니요.”
“뭐?”
“우선 제 방에서 독약이 나왔 다는 건 모함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군가 제 방에 몰래 독약을 넣어서 위증으로 쓰일 수 있지요. 그러나 폐하께서는 그 점 을 간과하고 무조건 제 것이라 단정하셨지요.”
“네 입으로 네 것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예,그러나 정말 제 것이 맞는지 저를 죄인이라 일컫기 전에 확인하시는 게 순서라 생각 합니다.”
왕후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 역시 디오나가 아리스티네의 처소에 몰래 넣어 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모함이든 아니든 일부러 다 덮어 두고 아리스티네를 독살범으로 몰아가려 했는데 이런 식으 로 나올 줄이야.
왕후가 주춤하자,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타르칸이 입을 열었다.
“그럼 왕후 폐하께서는 이 중요한 사안을 검증하지도 않고 단정하신 겁니까?”
왕후가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
부부가 쌍으로 짜증 나게 굴고 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왕자비에게 죄를 운운하기에 당연히 확인한 줄 알았는데.’
다못해 왕자비에게 본인의 물건이 맞느난 질문 정도는 했어야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왕후 가 허리를 쭉 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아리스티네 왕자비,논지를 흐 리려 하지 말아라. 네 입으로 그 독약이 네 것이라고 시인했어.”
“조사의 불명확함을 지적하는 게 어째서 논지를 흐리는 게 되는지요?”
담담하게 묻는 아리스티네를 보는 왕후의 눈매가 파르르 떨 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건방진 것을 내 앞에 무릎 꿇리라 외치고 싶었다.
지금 상황은 아리스티네가 신문당하는 게 아니라 마치 왕후가 신문당하는 것 같았다.
그때,가만히 지켜보던 하미르 가 앞으로 나섰다.
“확인을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저 물건이 비전하의 소지품이라고 말한 증인이 있습니다.”
비로소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하미르를 향했다.
계속 자신을 외면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하미르는 바짝 말라붙었던 입술에 차 갑고 달콤한 샘물이 닿는 것만 같았다.
“증인이요?”
왕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똑똑한 아들을 칭찬하며 기세등등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증인이 있다.”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다시 왕후를 향하자 하미르는 아까보다 더한 갈증을 느꼈다.
자신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니 절로 애가 탔다.
“디오나 영애.”
“네,네?”
왕후의 부름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디오나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자신에게 꽂히는 무수한 시선 들을 느끼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주목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타르칸을 오랫동안 그려온 걸로 유명한 만큼,왕자비를 죄인으로 밀고했다는 것을 두고 뒷말이 나올 수도 있기 때 문이다.
“디오나가 증인이라고?”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에 디오나는 숨을 삼켰다.
타르칸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 었다.
아니,그건 노려본다고 표현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단 한 번 도 녹은 적이 없다는 얼음가시 나무 산맥의 만년설도 이보다 차갑진 않을 것이다.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차가운 눈동자 안에 갇혀 있는 건 겁화보다도 뜨거운 분노였다.
‘어떻게,어떻게 이 디오나를 저런 눈으로 보실 수가 있어...!’
그렇게 아리스티네가 소중하다는 말인가.
보통 사람이 저런 눈길을 받았으면 당장이라도 후들후들 떨며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와 배신감과 억울함과 슬픔이 디오나를 버티게 만들었다.
“타르칸,지금 증인을 겁박하는 것이냐.”
“겁박이라뇨. 그저 물었을 뿐입니다.”
타르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방만한 태도에 왕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타르칸에게 더 따지지 않고 디오나에게 물었다.
“디오나 영애,내게 왕자비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며 증언하지 않았느냐.”
왕후의 말에 디오나가 고개를 숙였다.
생각 같아서는 모르는 체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준 만큼 타르칸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예,폐하. 제가 분명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왕후는 이것 보라는 시선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증인이 나왔으니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았다는 아리스티네의 말은 무위가 된다.
그런데.
‘웃어?’
아리스티네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그 미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뭐지?’
비록 지금 아리스티네의 얼굴 은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무표정했지만,왕후는 도저히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찜찜함을 애써 밀어내며 말했다.
“설마 아이루고를 위해 용맹하게 전사한 찬트라의 동생인 디오나가 왕자비를 음해하려 거짓을 꾸며 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다분히 좌중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과연 찬트라를 언급하자 디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뢰가 더해졌다.
디오나 역시 그걸 느끼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잘됐어. 이걸 기회로 삼아 여론을 내 쪽으로 유리하게 잡아야 해.’
감히 아이루고의 제왕을 해하 려 한 외국인 왕자비의 악행을 정의롭게 밀고한 자신이 차기 왕자비가 되는 시나리오.
이 얼마나 완벽한가.
디오나는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좌중을 둘러봤다.
“일전에 실바누스 시녀들이 제게 비전하께서 독약을 가지고 아이루고에 왔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소극적이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능동적인 태도였다.
사실 시녀들에게 직접 들었다기보다는 우연히 엿들은 거였지만,디오나의 태도는 한 치의 거 짓도 없는 것처럼 떳떳했다.
“물론 시녀들은 죄인이고 저 역시 그들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를 위해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해서……”
디오나는 뒷말을 흐린 채 비통 하다는 둣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사실 비전하의 방을 수색해 아무것도 나오지 않길 바랐습니다. 비전하의 결백을 입증했으면 해서 말씀드렸던 거지요.”
디오나가 제게 와서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왕후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주 재밌는 아이야.’
가까이 두며 쓸 아이는 아니지만,이용하기엔 좋은 아이였다.
“그런데 정말로 독약을 가지고 계셨다니,성심으로 비전하를 믿었던 저는……!”
디오나가 참혹해서 더 말할 수 없다는 둣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리스티네는 디오나의 쇼에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고민했다.
“하,아주 가증스럽군.”
타르칸이 경멸 어린 조소를 지으며 디오나를 바라봤다.
“내 비를 음해한 적이 있는 주제에 그딴 말을 지껄여?”
디오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타르칸이 그 점을 지적할 줄은 몰랐다.
찬트라에 대한 예우를 위해서 인지 그때 그 일은 함구됐다.
그래서 당연히 언급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타르칸 전하,저는 명예롭게 전사하신 찬트라 오라버니의 이름을 걸고 절대一.”
“찬트라의 이름을 네 입맛대로 그렇게 쉽게 걸지 말아라!”
“찬트라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는 건 너다, 디오나!”
“네 가문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리스티네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왔던 전사들이 디오나를 향해 씨근덕거렸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당장 앞으로 나서서 우리 비전하께 무슨 짓이냐며 따지고 싶은 것을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 겨우겨우 참고 있던 차였다.
‘뭐지? 디오나가 왕자비를 음해한 적 있다고?’
‘그럴 리가 .’
‘하지만 최근 디오나가 타르칸 전하의 궁에 가질 않았지. 그게 그 때문인가?’
디오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찬트라와 함께 타르칸의 궁에 자유롭게 출입했었다.
아리스티네는 과열되는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앞으로 나 섰다.
“타르칸,난 괜찮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차분한 눈동자에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물러섰다.
아리스티네가 말 한마디로 타르칸을 진정시키는 모습에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디오나,날 믿어 줘서 고마워. 난 결백하니까 그렇게 부들거릴 필요 없어. 이게 내 것이라는 게 내가 폐하를 독살한 증거는 되지 못하니까.”
그 말에 디오나는 푸들거리는 입매에 애써 힘을 줬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가?
“그도 그럴게.”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발치의 유리병을 주웠다.
“이건 독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은 한없이 담담했다.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듯.
사람들의 얼굴에 혼란이 일었다.
“거짓말이에요!”
디오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비전하,그냥 죄를 인정하세요. 그편이 비전하께도 좋아요.”
“뭐라고? 네가 감히……!”
타르칸이 당장이라도 디오나의 먹살을 틀어쥘 것 같아서 아리스티네는 그의 팔을 꾹 붙잡았다.
타르칸은 멈칫하더니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디오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파도쳤다.
그녀는 안타깝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두 손을 꼬옥 모았다.
“저도 비전하께서 이런 일을 저지르셨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죄를 지으셨으면 인정하는 게 그나마 아이루고의 왕자비이자,실바누스의 황녀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 아닐까요.”
아리스티네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컨셉을 버리지 않는 디오나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하긴,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밀고나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디오나의 말은 계속되었다.
“비전하를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게 괴롭습니다.”
“글쎄. 죄를 짓지 않았는데 뭘 인정하라는 거지?”
“이미 다 확인을 마쳤어요. 그러지 마세요.”
디오나는 아리스티네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인?”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디오나가 아니라 왕후에게서 나왔다.
“그게 독이라는 확인 말이다.”
왕후의 눈짓에 궁인이 아리스티네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아리스티네는 순순히 그녀에게 유리병을 내주었다.
궁인은 유리병의 마개를 연 후,가느다란 은침을 넣고 휘저었다.
잠시 후,유리병 밖으로 나온 은침은 불길하게 시꺼먼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독성이라는 뜻이었다.
“진짜 독이잖아?!”
“독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대체 이 무슨……. 정말로 왕자비의 소지품에서 독약이 나오다니....!”
사람들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왕후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런 아주 기본적인 검사에서부터 걸러지는 독을 독이 아니라 우기다니.....차라리 순순히 인정하지 그랬나”
그녀는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은이 이렇게 반응했다는 것은 비소라는 뜻. 비소는 복통을 유발하지. 그리고 폐하께서는 복통을 호소하셨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티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찬 때 모두 은식기를 사용 했어요. 제가 비소를 썼다면 당연히 폐하의 식기가 검게 물들었어야 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았잖아요?”
“허술한 변명이구나. 본 왕후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굳이 음식이 아니어도 비소를 넣을 수 있지. 이를 테면 냅킨에 비소를 묻힌다거나.”
“그러고 보니 부왕 폐하께서는 식사를 마치고 냅킨을 사용하신 후 쓰러지셨죠.”
예니카리나가 말을 보탰다.
“게다가 네가 가장 먼저 오찬 장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러운 공작을 펼치기엔 아주 적절하지.”
모든 정황과 증거가 아리스티네가 네프테르를 독살한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보호하 듯 앞으로 나섰다.
“아리스티네는 오찬이 시작하기 전 부왕 폐하의 자리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글쎄. 타르칸,너도 함께 일찍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공범이 아니냐? 그러니 이 상황에서 저 죄인의 편을 드는 게지.”
발끈한 타르칸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아리스티네가 더 빨랐다.
“그러니까 폐하의 말씀은 부왕 폐하께서 쓰러지신 게 비소를 사용한 독살 시도 때문이고,제가 비소를 지니고 있으니 범인이라는 뜻이군요. 제가 오찬 장 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도 범행을 위해서고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은 확실한 진실을 가리키지.”
“글쎄요,과연 단순한 사실의 나열 일까요?”
아리스티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제가 분명 이건 독이 아니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리스티네는 궁인이 들고 있는 유리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제 손바닥 위에 부었다. 그리고 비소가 묻 은 손을 그대로 얼굴에 가져다 대려 했다.
“아리스티네!”
“비전하!”
“꺄악!”
“세상에!”
여기저기서 기함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설마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려고 독을 제 손바닥 위에 부어 얼굴에 가져다 댈 줄이야.
비소 중독은 복용만으로 일어 나지 않는다.
비소와 접촉한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발적과 부기로 흉하게 망가질 수 있는 일이다.
또,그대로 비강을 통해 흡입한다면 一.
‘죽음!’
네프테르와 같이 사경을 헤멜 것이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