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화
그러나 다행인지 비소가 가득 묻은 손은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닿지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제 손을 붙들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르칸이 말리는 건 예상했지만,설마 하미르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하미르는 항시 여유롭게 짓고 있던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초조한 기색으로 아리스티네를 살 피고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얼굴에 독을 가져다 대는 것에 기함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왕후와 예니카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하 미 르.! ”
“하미르 오라버니! 당장 떨어 지세요! 독이 묻겠어요!”
그 말대로였다.
아리스티네는 자신의 손에서 흘러넘친 가루가 타르칸과 하미르의 손에 묻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두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오히려 제 손으로 아리스티네의 손에 묻은 가루를 털려고 했다.
흩날리는 가루를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왕후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경악과 의심 그리고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독이…… 아니라고?”
아리스티네가 빙긋 웃고 가까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얼굴에 문지르는 것으로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 남자의 개입으로 실패 했다.
그런데 마침 그보다 더 좋은 게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꽃이 소담스럽게 장식된 수반이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수반에 가루가 묻은 손을 넣어 그대로 휘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품?”
수반 속 물에서 새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네,이건 입욕제랍니다.”
아리스티네가 산뜻하게 웃었다.
다들 멍하니 아리스티네를 쳐다봤다.
타르칸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미간을 찌푸렸다.
〈타르칸,나 부탁이 있어.〉
갑자기 네프테르를 독살할 사람이 누가 있냐고 물었던 날,아리스티네는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
그게 이거였다.
입욕제.
그것도 굉장히 특이한 배합의 입욕제를 구해 달라고 했다.
심각한 이야기 뒤에 나오기엔 참 황당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준비를 했단 말이지.’
하,하고 웃음이 나왔다.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
조금 전엔 정말이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은 아리스티네가 자신이 독살범으로 모함당할 것을 예상했다는 뜻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교로운 타이밍이 아닌가.
모두 아리스티네를 주목하는 사이 하미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욕제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당연했다.
아리스티네의 손을 잡은 것으로 모자라 탈탈 털어 주었으니.
만약 이것이 비소였다면 하미르는 그때 공기를 통해 다량으로 흡입해 중독되었을 것이다.
‘내가 왜…….’
하미르는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답을 찾둣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티네는 씨익 웃으며 손에 묻어난 거품을 후,하고 불었다.
은이 변색하는 건 황화 반응이나 염화 반응 때문이다.
그래서 은으로 된 액세서리를 살 때 항상 주의받는다.
착용하고 유황 온천에 들어가 면 안 된다,비누엔 계면 활성제가 있으니 손 씻을 때 닿지 않도록 해라,고무나 표백제,드라 이클리닝한 의류에 닿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등등.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으로 본 전생에서 힌트를 찾았다.
그래서 자신이 독살범으로 몰리는 미래를 보고 유리병 안의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유황과 계면 활성제 그리고 염화나트륨을 넣은 입욕제로.
자신을 독살범으로 몰아세운 자를 잡을 덫.
그 덫을 만들기 위해.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디오나를 향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흡사 독 안에 든 쥐처럼.
회장 내에 싸한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왕후와 디오나 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디오나,시녀들에게서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그,그게 저는 분명 그렇게 들어서……”
디오나는 더듬거리며 눈을 굴렸다.
“참 이상한 일이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말대로 시녀들이 너에게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하자.”
아리스티네는 시녀들이 아이루고에서 쫓겨날 때,디오나가 증언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너는 시녀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해서 조언을 몇 번 해 준 것뿐이라고 했잖아. 나를 배신할 생각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정말 잔악무도한 사람들이라며 디오나는 시녀들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 행세를 했었다.
디오나가 어떤 식으로 증언했는지는 신문에까지 났기에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날 돕는다는 시녀들이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도 이상함을 못 느꼈어?”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설령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더라도 날 위하는 자들이라면 몇 번 말을 주고받았을 뿐인 네게 그런 사실을 말할까?”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맞아. 충성스러운 시녀들이라면 당연히 주인이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하지 않겠지.’
‘그래, 그런 말을 했으면 시녀들을 의심하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시녀들이 충성스럽다고 생각해서 도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진짜로 시녀들이 날 위한다고 생각해서 조언했던 게 맞아?”
아리스티네는 흥분한 기색 하나 없이 디오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아니면, 그때부터 시녀들이 나를 음해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그래서 시녀들이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도 이상함을 못 느꼈고.”
“그,그렇지 않아요!”
디오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라면 정답은 하나네.”
아리스티네가 단언했다.
“시녀들이 내가 독약을 가지고 있다고 네게 말했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
“ 헉”
디오나의 잇새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시녀들의 대화를 엿들은 게 떳떳하지 않다 보니 약간의 거짓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신빙성을 조금 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차라리 처음부터 시녀들끼리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할 것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일부러 아리스티네를 독살범으로 몰아넣으려 했다는 게 까발려지면 끝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디오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사,사실은 제게 말한 게 아니라 본인들끼리 이야기하던 걸 우연히 듣게 된 거예요. 그때 시녀들이 비전하에 대해 나쁘게 말을 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설마 비전하를 음해하려고 했을 줄은 몰랐고요.”
“응,있지도 않은 독약 이야기를 시녀들이 하고 있었는데 그걸 또 네가 듣게 되었다고. 참 대단한 우연이네.”
명백한 비꼼에 디오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진짜예요!”
아리스티네는 미소 지었다.
‘그럼 진짜겠지.’
진짜로 독약이 있었으니 얼마든지 시녀들이 독약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황제가 내게 따로 쥐여 줘서 시녀들은 독약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구나.’
아리스티네가 독약을 이용해 허튼짓을 할까 감시하라는 의도였겠지.
‘아니면 그 독약을 이용해서 날 죽이라는 거였을지도.’
아리스티네의 소지품과 달리 시녀들의 소지품은 철저하게 검사하니 그들이 독약을 들고 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화살처럼 디오나에게 쏘아졌다.
호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찬 서리같은 시선에 디오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저는 사실만 말하고 있는 거라고요! 정말로 시녀들이一.”
“디오나,이제 거짓말은 그만해라.”
커다란 목소리가 디오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칼리였다.
“찬트라를 생각해서 그간 네 잘못을 함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책하듯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게 찬트라에게 더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구나.”
디오나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무칼리는 태도를 바꿔 왕족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평소와 사뭇 다른 태도와 말투였다.
“디오나는 비전하께서 처음 아이루고에 오셨을 때부터 비전하를 음해하려 했습니다.”
“뭐라고?!”
“아니,분명 결혼식에서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었는데……”
“비전하께서 혼전에 비밀리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며 제게 조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타르칸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무칼리를 바라봤다.
아리스티네도 놀란 눈으로 무칼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 비밀이 아니었고,떳떳한 일이었습니다. 궁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타르칸 전하께서도 아시는 내용이었으니까요.”
“설마 리트렌..?”
아리스티네가 중얼거렸다.
“예,맞습니다. 메스 사업을 위해 인재를 섭외하는 것이었는데 디오나는 비전하께서 다른 사람 들 몰래 사적으로 남자에게 관 심을 가진다는 식으로 말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걸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놀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말이 확인해 달라는 것이지 그건 불륜이라고 소문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그런 치명적인 꼬리표 를 달 생각을……’
‘양국의 평화를 위해 그 결혼이 얼마나 중요했는데 그걸 망치려고....’
사람들의 혐오 어린 시선은 타르칸의 눈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김히 아리스티네에게 그런 모욕을.’
으득,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했다.
타르칸은 제 곁에서 손을 잡고있는 아리스티네만 아니라면 당장 디오나를 끌어낼 기세였다.
디오나는 곧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칼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무칼리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듀란테가 앞으로 나섰다.
무칼리는 원래 남의 잘못에 대해 구구절절 털어놓는 성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것을 고자질이라 고 생각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아리스티네를 위해서,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전우를 위해서일 터.
그 무게를 나눠 갖는 게 옳았다.
“디오나는 타르칸 전하의 궁에 출입을 금지당했습니다.”
듀란테는 미친 둣이 고개를 휘 젓는 디오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비전하께 타르칸 전하와 자신은 오랜 연인 관계이며 돌아가신 모비께서 인정한 사이이니 물러서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대체 무슨……!”
“아니,어떻게 그런 말을……”
“그것도 결혼식 당일에 신부 대기실에서요.”
마지막 한마디에 기함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이건 정말 상식 밖의 일이었다.
가시 같은 시선이 디오나를 찔렸다.
이들 중에는 오랜 짝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디오나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디오나가 깨끗하게 물러나며 타르칸의 행복을 빌어 주기에 할 수 있던 연민이었다.
‘그런데 뒤에선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다고?!’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제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의 중대사를 망치려고 들다니……!”
분노한 왕후가 일갈했다.
“그러면서 내게 찬트라의 이름을 들먹이며 왕자비가 독을 가지고 있다 증언했던 것이냐!”
그녀는 부러 더 크게 호통쳤다. 디오나라는 꼬리를 잘라내기 위해서였다.
“본 왕후를 기만하고 능멸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디오나를 꾸짖은 왕후는 태도 를 바꿔 아리스티네에게 부드럽 게 말했다.
“아리스티네,저 악독한 계집의 농간에서 비롯된 오해로 너를 채근했구나.”
호칭도 친밀하게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왕후는 아리스티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참으로 미안하구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국의 왕후가 직접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정말 극히 드문 일이었다.
왕후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이렇게 나온 이상 아리스티네는 사과를 받아들일 수밖 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독살범 취급 한 것도 더 따지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다.
물론 아리스티네에게 미안하다 고 말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후는 정치가였다.
이득을 위해선 얼마든지 거짓 사과를 할 수 있다.
“아니요,왕후 폐하.”
역시 아리스티네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왕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아리스티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왕후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폐하께서는 디오나의 말 때문 에 저를 죄인 취급 하신 게 아니시죠.”
굳어 버린 왕후의 얼굴을 보고 아리스티네가 미소 지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아니라고 답 한 줄 알았나 보네.’
그럴 리가 있나.
아리스티네는 디오나를 잡고 나서 왕후가 구렁이처럼 빠져나 가려 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몇 번이나 지리 멸렬하게 왕후의 의견을 확인했다.
폐하의 말씀은 이렇다 저렇다 정리하며.
“제가 왕후 폐하의 주장을 확인했을 땐 주장이 아니라 조사에 따른 결론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저를 독살범으로 결론 내린 폐하의 말씀을 정리했을 때 도 그 모든 것이 사실 나열이며 진실이라고 하셨고요.”
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계속 이쪽의 말을 다시 정리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을 줄이야.
“딱히 디오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너……”
꽉 다문 왕후의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긁듯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나의 화살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저 재수 없는 계집은 처음부터 디오나와 자신을 동시에 보낼 생각으로 논리를 쌓았던 것이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