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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08화 (108/183)

108화

하미르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리는 순간,아리스티네는 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의 모 습에 하미르는 저도 모르게 따라갔다.

그는 부드럽게 아리스티네의 팔목을 잡았다.

아리스티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황금빛 가을 햇살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비전하.”

그 부름에 마치 화답이라도 하둣 아리스티네가 거칠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았다.

선명한 감정을 제게 부딪쳐 왔 으면 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그저 담백했다.

“하미르 왕자님.”

보랏빛 눈동자는 견고했다. 그 무엇도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벽.

아리스티네는 살짝 묵례하고 다시 뒤를 돌았다.

왕자의 인사를 무시할 순 없으니 알은체만 하고 끝이라는 태도였다.

친구라면 무시했을 텐데.

‘이제 나는 당신에게 완벽한 타인이구나.’

호수에 던지는 돌조차 되지 못 하는 존재.

하지만 이대로 아리스티네의 손을 놓을 순 없었다.

“루,라고는 안 불러 줄 건가요?”

아리스티네가 그를 올려다봤다. 가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경멸 어린 시선마저도 외면보다는 나았다.

“날 속였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존댓말.

그게 이상하게도 가슴을 푹 찔렸다.

하미르는 매끄럽게 웃었다.

“속였다니요.”

“내게 본인이 아닌 것처럼 하미르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놓고서요?”

“알게 되면.”

새파란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옭아매듯 응시했다.

절박해 보이 기도 하는 눈빛이었다.

“알게 되면 이렇게 될 거였잖아요.”

“아니요.”

아리스티네는 단번에 부정했다. 차분하지만 명확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직접 말했으면 제 반응은 달랐을 거예요.”

반쪽짜리 사실로 사람을 거짓된 답으로 몰고가는 것 역시 거짓말이다.

그걸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나는 당신에게 진실했다고 말하는 건 기만일 뿐.

하미르는 아리스티네의 눈에서 선명한 거절을 읽었다.

처음 만났을 때,그가 제비인 줄 알고 치던 철벽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리스티네의 인생에서 자신은 완전히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미르는 무언가에 미련을 가 져 본 적이 없다.

집착 같은 것 역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태생부터 완벽했고,그의 앞길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타르칸의 세력이 치고 올라와 도 한 번도 압박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손을 뻗기도 전에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그가 손바닥을 펴도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친구잖아요.”

하미르는 아리스티네를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렇게 꽉 붙들고 있음에도 손 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는 게 너무 확실해서,그게 눈에 보여서.

아니,이렇게 쥐고 있음에도 이미 빠져나간 후라서.

처음으로 놓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걸 손바닥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후에야 깨달았다.

“친구가 되는 데 배경은 필요 없다면서요.”

하미르의 애달픈 시선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 지금 그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미르 본인조차도 몰랐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알고 있다.

평생토록 갇혀 살아 사람의 온기가 그리울 아리스티네에게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게 구는지.

친구라는 그 평범한 단어가 그녀에게 얼마나 특별할지 아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아리스티네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전처럼 대한다면.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혼들리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날 기만하기 전의 이야기죠.”

“친구라면 서로의 잘못을 용서 해 줄 수 있지 않나요?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그러면 한 번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친구라면?”

“친구라면요.”

“하미르 왕자.”

아리스티네가 픽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요,맞아요. 나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리고 그마저도 몇 없죠. 그래서 친구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아요.”

하미르는 어쩐지 그 웃음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건 알아요.”

아리스티네가 그를 똑바로 직 시했다.

“친구는 친구를 기만하지 않아요.”

그와 동시에 아리스티네가 거 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뒤돌아서는 모습이 그렇게 냉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잘라 낼 수 있다니. 사실 날 친구라고 생각 하지 않았던 거죠.”

그 말에 걸음을 옮기던 아리스티네가 우뚝 멈췄다.

친구라고 생각했으니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상처받은 것이다.

차라리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 았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하,아리스티네는 막힌 숨을 내쉬었다.

‘루’의 정체를 알게 된 날,네프테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미르에 대해서는 마음 한구석 으로 밀어 놓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워낙 큰일을 마무리하다 보니 하미르의 배신은 인생에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갇혀 살지 않았다면 더 어렸을 적에 겪었을 일.

그것 역시 아리스티네가 그렇 게 원했던 자유로운 삶의 과정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현재의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수 많은 과거의 일 중 하나로 생각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 에서 자신은 얼마나 충격받았던 제왕안으로 봤던 미래 속 자신의 모습에 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랐다.

“친구라고 생각했었죠.”

아리스티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 아닐 뿐.”

하미르를 보는 그녀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그저 완전한 타인을 보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그렇기에 차가운 시선보다도 더 차가웠다.

“하미르 왕자님,이왕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된 김에 확실히 말하죠.”

아리스티네는 단호하게 하미르 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시숙이자,내 남편과 나의 정적일 뿐이에요.”

“....비 전 하. ”

“그런 표정 할 것 없어요. 당신도 이미 나를 정적으로 대했잖아요?”

왕후가 아리스티네를 독살범으 로 몰았을 때,하미르는 어땠는 가.

그가 직접적으로 아리스티네를 모함한 건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말렸다면 왕 후가 그런 식으로 움직였을까?

그는 침묵함으로써 동조한 것 이나 다름없다.

“일이 잘못되면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었어요.”

외면하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면 어떻게든 인연의 끈이 생기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그조차 도 이제야 자각했다.

하미르는 자신이 저열하고 치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아리스티네와 연결점을 만들고 싶었다.

“뭐라고요?”

기가 막힌다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하미르는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새어 나갈까 봐. 가장 익숙한 가면으로 진심을 가렸다.

아리스티네는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 빙빙 도는 대화를 끝낼 때가 왔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당신도 나와 친해져 봤자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아리스티네가 ‘루’가 왕후파의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은 그의 가문이 왕후파일 뿐이고 루 본인의 생각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치 다툼에는 신경 쓰지 않는,집안의 한량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제비 같은 모습도 그 생각에 한몫했다.

그래서 ‘루’에게 날을 세우는 타르칸을 말렸던 것이기도 했다.

“난 당신이 정체를 숨기고 내게 접근한 저의도 의심스러워요.”

“난 당신이라는 사람에게 흥미가 있었을 뿐이에요. 다른 의도 없이.”

아리스티네를 이용해 타르칸 쪽의 정보를 캐낸다거나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하미르는 타르칸을 경쟁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적어도 이 순간까진.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미안 한데, 내가 세파를 못 겪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순진하진 않아요”

아무리 안달 내고 애원해도 아리스티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두드려도 절대 열리지 않는 문 같았다.

본래 하미르의 성정이었다면 바로 뒤돌아서며 잊거나 문을 부숴서 강제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애타게 들어가고 싶어도,도저히.

“아리스티네.”

하미르가 살며시 그녀의 은발을 손에 쥐었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서늘한 감촉마저 황홀했다.

그는 햇빛이 고인 머리카락 위 에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경건하다 못해 성스럽게까지 보이는 자세였다.

천천히 그의 눈꺼풀이 열리며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직시했다.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아리스티네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나 다음 순간,그녀는 매몰차게 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어떻게 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타르칸의 아내고,내 남편은 타르칸이니까.”

그러니 하미르와는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는 정적이었다.

“앞으로 이러시지 말았으면 좋겠군요,시숙.”

그 말을 끝으로 아리스티네는 완전히 돌아섰다.

그리고 하미르가 붙잡기 전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하,홀로 남은 하미르는 마른 웃음을 삼켰다.

〈나는 타르칸의 아내고,내 남편은 타르칸이니까.〉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파도처럼 메아리쳤다.

“시숙…… 이라.”

그가 중얼거리며 입매를 쓸었다.

아리스티네는 침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타러 가는 대신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 겼다.

도저히 걷지 않고는 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타르칸이 네프테르와 이야기를 마치길 기다렸던 건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일이 잘못되면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었어요.〉

아까 들었던 말이 귓가에서 울렸다.

하미르는 모르겠지만,제왕안을 통해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아리스티네는 그대로 독살범으로 판명 났을 것이다.

그녀의 소지품에 독이 있다는 사실은 명확했고,네프테르는 이미 사망했으니까.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으로 봤던 장면 이후의 일이 어떻게 홀러 갔을지 눈에 선했다.

병환으로 인한 사망은 궁의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음독은 다르다.

독살범이 책임을 진다.

왕후는 아리스티네에게 독약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궁의들을 포섭했을 것이다.

네프테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 어떻게 되는지 궁의들에게 차근차근 알려 준 뒤,책임을 피할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겠지.

협박과 회유.

그렇게 사인은 날조되고,아리스티네는 명백한 중거와 함께 아이루고 왕을 시해한 범인으로 낙인 찍혔을 것이다.

그런데 도와줄 생각이었다니,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아니,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어.’

그는 그저 정적일 뿐이다.

아리스티네는 지나간 것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한번 미련을 가지면 너무 오래 전,유폐당하기 전의 일부터 후회를 해야 했기에.

걸음을 옮기던 아리스티네는 어느새 자신이 처음 보는 곳에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궁 안에서도 꽤 으슥한 곳인 것 같았다.

우거진 나뭇가지가 몇 겹이나 중첩되어 땅은 그늘지고,조각난 빛이 그 위를 조약돌처럼 물들 이고 있었다.

으숙하다곤 했지만,운치가 있 다면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지나가는 궁인들이나 근위병도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편했다.

나무가 시야와 소음을 차단해 사위가 고요했다.

아리스티네는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단내가 풍기는 단풍의 내음이 폐부를 흠백 적셨다.

진정되는 느낌과 함께 절로 미 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흐윽……

어디선가 가날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흠칫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어쩐지 오싹한 기분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홉,으혹……”

다시 들리는 희미한 울음소리 에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왕궁에 귀신이 있다는 괴담은 들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본디 왕궁이란 한 맺힌

영혼이 많은 법 아닌가.

이렇게 그늘지고 빛이 들지 않는 곳에는 그런 사연 있는 귀신 이 한둘쯤 옹크리고 있어도 이 상할 게 없었다.

‘귀신이라니, 그런 게 진짜 있으면一.’

아리스티네는 바르르 떨며 고 개를 숙였다.

‘재밌겠는데!’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두 눈은 스릴을 즐기는 기쁨과 설 램으로 빛나고 있었다.

기분 전환으로 이보다 더 흥미 로울 수 없다.

사실 아리스티네는 귀신을 믿 지도 않고,그래서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지낸 게 몇 년인데 귀신을 무서워하겠는가.

차라리 귀신이라도 좋으니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귀를 종긋 세우 곤 낙엽 밟는 소리에 귀신이 도 망갈까,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를 따라 가까이 다가갈 수록 울음소리가 더욱더 커졌다.

“흑,으,흐으.”

이제 지척이다.

한 아름이나 되는 은행나무를 끼고 돌자,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채 기괴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흑 커졌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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