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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10화 (110/183)

110화

……파엘라미엔,얼굴 밝히는구나.

외모가 문제가 아닌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였나 보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에 파엘라미 엔이 뺨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권력은…… 그래요. 양보할 수 있어요. 어차피 저도 권력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 거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나아요. 하지만!”

파엘라미엔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포기할 수 없는 네 가지가 있어요.”

“네 가지?”

“남자란 젊고! 돈 많고! 키 크 고! 무엇보다 잘생겨야 한다고요!”

아리스티네는 입을 벌렸다.

물론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와 닿지 않는 건 자신이 갇혀 살아 아직 세상 물정 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네 가지를 전부 갖춘 남자와 결혼해서일까.

어쨌든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략혼에요?”

“이런 식의 정략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파엘라미엔은 오래전에 권력을 포기했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이득을 생각하며 혼약할 거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득이 큰 혼인을 하면 오히려 왕후의 경계를 살 수 있으니 더더욱.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 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게 아 니에요. 그냥 왕후의 경계를 사지 않을 가문의 사람과 혼인할 줄 알았죠.”

그러면 확실히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여러 남자들 중에서 이왕이면 보기 좋은 걸 고르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정치 동맹을 포기했으니 이 네 가지라도 챙겨야죠.”

반론은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어조였다.

‘하긴,뭐 하나 포기했으면 다른 조건이 괜찮아야지.’

아리스티네는 왠지 모르게 설득되는 기분이었다.

젊고 돈 많고,키 크고 잘생긴 남자.

“그런데 돈은 왜요? 돈은 공주님도 많잖아요.”

“아내한테 돈 타서 쓰면 자존심 상한다고 밖에서 자존감 채운다며 딴짓하는 놈들이 있어요.”

파엘라미엔이 ‘뭘 모르는군’ 하는 눈빛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 봤다.

“자존감이란 게 그런 식으로 채워지는 건 아닐 텐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무식한 족속들이죠.”

파엘라미엔의 얼굴에 경멸이 떠올랐다.

아리스티네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봤다.

“공주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비록 아리스티네에게는 날을 세우긴 했지만,다른 왕족을 대하는 걸 보면 파엘라미엔은 조용조용 모나지 않고 유하게 넘어가는 성격 같았다.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큰소리 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사는 느 낌.

‘이제 그랬던 이유를 알게 됐지만.’

파엘라미엔은 자포자기한 얼굴 로 어깨를 으쑥했다.

“뭐 어때요. 우는 것까지 다 보였는데 이 정도야. 차라리 시 원하네요.”

“공주님도 그간 성격 죽이고 사느라 고생 꽤 했겠네요.”

그 말에 파엘라미엔이 씨익 웃 었다.

아리스티네의 눈에는 그 웃는 얼굴 위로 창살이 드리워진 것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감옥.

파엘라미엔은 어디든 갈 수 있었고,공주로서 귀히 대접받았다.

하지만 본래의 자신은 절대 밖 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리스티네가 유폐당한 게 여섯 살이었으니 파엘라미엔도 그 에 못지않게 긴 세월 동안 갇혀 산 것이다.

웃고 있는 파엘라미엔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왕후를 따를 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리스티네의 말에 파엘라미엔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입을 열어 파엘 라미엔이 생각하고 있을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타르칸이 왕이 된다면.”

파엘라미엔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나보고 타르칸의 손을 잡으라는 건가요?”

“아니요.”

단호한 부정에 파엘라미엔의 눈썹이 한데 모였다.

의문 가득한 시선에 아리스티네가 싱긋 웃었다.

“내 손을 잡으라는 거지요.”

“무슨……”

파엘라미엔은 뒷말을 삼켰다.

말장난이냐고 생각했지만,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호수에 드리운 나뭇잎 그림자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리스티네는 어깨를 으쑥였다.

“아니면 그 대머리랑 결혼하시든가.”

아리스티네는 낙엽을 우수수 흐트러트리면서 혼잣말하둣 중 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머리는 물려받는 거라던데,그럼 공주님의 자식도……”

움찔.

파엘라미엔이 눈에 띄게 동요 했다.

대머리 가족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감아 털어냈다.

파엘라미엔은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손해 보기 싫어요. 여태까 지 투자해 온 것도 있고요. 그런데 제 모든 기반을 버리고 갑자기 당신에게 붙으라는 건……”

“뭐 어때요?”

아리스티네가 세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며 말했다.

“발 빠른 귀족들은 이미 그러고 있는데. 시류에 편승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나?”

가벼운 태도였지만 아리스티네 가 입에 담고 있는 말은 확실히 무게가 있었다.

파엘라미엔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유예 기간을 줘요.”

“유예 기간?”

“비전하와 손을 잡더라도 지금 당장 왕후의 손을 놓을 순 없어요”

한마디로 이중 스파이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도 서로 알아 가는 시간 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파엘라미엔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었다.

“알아 가다 별로면 이쪽 손을 놓겠다?”

혹시 아리스티네가 잘못되어도 모르는 척하며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말이다.

“비전하께도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요. 협력은 하되 그냥 제 안전을 위해 빠져나갈 구멍 하나를 마련하겠다는 거예요.”

“글쎄요. 그 정도로 인력난이진 않아서. 왕후 쪽도 이번 일로 꽤 타격을 받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언제 손을 놓을지 모르는 사람과 손잡을 필요는 없죠.”

아리스티네가 가뿐하게 말했다.

“결혼 선물은 좋은 걸로 보낼 게요,파엘라미엔 공주.”

“한 달.”

파엘라미엔이 다급하게 말했다.

“한 달 후에 결정할게요.”

대답 없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파엘라미엔은 설득을 시도했다.

“왕후는 어쨌든 나를 신임해요. 비전하께도 도움이 될 거예 요.”

“흐음.”

묘한 비음에 파엘라미엔의 입매에 힘이 들어갔다.

‘안 되나.’

하긴 아리스티네는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너도나도 그녀에게 연을 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굳이 위험 인자를 떠안을 이유 가 없었다.

‘나는 왕자비에게 못 할 말도 많이 했고…….’

파엘라미엔이 낙담으로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이었다.

스윽,아리스티네가 부드럽게 그녀의 눈가를 문질렀다.

파엘라미엔의 눈동자가 흑 커졌다.

“우는 여자애를 그냥 두는 법은 아니라고 들어서.”

아리스티네가 눈을 내리뜨며 입술을 늘였다.

화아아악,파엘라미엔으ᅵ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거칠게 아리스티네의 손을 팍,쳐 냈다.

아리스티네는 “아야” 하며 얻어맞은 손등을 흔들었다.

“알겠다는 거였는데.”

“그,그냥 알겠다고 하세요! 하여간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니 까.”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러면 좋아한다고 제왕안으로 봤던 적이 있는데 아니었던 걸 까?

동맹의 시작으로 좋은 출발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던 건데.

아리스티네는 얼굴을 붉힌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파엘라미엔을 바라보았다.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다혈질이구나.’

그간 성격 누르며 살아온 게 용하다.

“왕후는 이사라 후작을 제 편으로 만드는 데 공들이고 있어요.”

잠시 혼자 앞만 바라보고 있던 파엘라미엔이 불쑥 말했다.

이사라 후작.

아리스티네도 누군지 안다.

‘중립파의 거두였지.’

아이루고에 와서 환영 연회를 했을 때 제게 접근했던 귀족들 중 하나였다.

타르칸의 편에 서고 싶어서 접근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사라 후작은 여전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과연 그런 존재를 포섭하면 꽤 상징성이 있지.’

하미르의 세력이 떨어져 나가 고 있다는 인상을 단번에 타파 할 수 있다.

정치란 눈치 보기 싸움이기도 해서 그런 시류 역시 중요했다.

“이사라 후작의 손자에게는 지병이 있다고 하더군요.”

파엘라미엔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며 말했다.

“협력하게 된 선물이에요. 그럼.”

아리스티네는 멀어지는 파엘라 미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소리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본모습을 알게 된 게 싫지 않았다.

* * *

“우와,이게 다 뭐야?”

아리스티네는 침실 테이블에 마련된 와인과 브루스케타,그리고 올리브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잔할까 하고.”

타르칸이 소파에 느슨하게 기댄 채 말했다.

아리스티네는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한 곳에 눈이 갔다.

‘……가운이 평소보다 더 벌어져 있는 것 같은데.’

탄탄하니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흉근과 그 밑으로 연결된 갈라진 복근. 그리고 더 밑 으로는…….

“이리 와.”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이끄는 대로 옆에 앉으니 타르칸이 어깨를 감싸 왔다.

드러난 그의 가슴이 아리스티네의 등에 닿았다.

따끈따끈하고 푹신하면서도 단단하다.

‘이래서 인가.’

아리스티네는 무심코 생각했다.

젊고 돈 많고,키 크고 잘생긴 남자.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밤에 자러 들어왔는데 이왕이면 그런 남자가 맞이해야지 기분이 좋을 것 같긴 하다.

지금도 만약 대흉근이 빈약한 남자가 어깨를 감쌌다면 이런 따끈함과 이런 탄탄함은 맛보지 못했겠지.

‘그렇구나. 결혼에서 꽤 중요한 문제야.’

아리스티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따끈따끈한 빵(?)의 감촉을 몰랐을 때야 그냥 넘어가겠지만, 알게 된 이상 그럴 순 없다.

아리스티네는 브루스케타를 집어 한 입 냠,먹었다.

‘맛있어!’

바삭한 바게트와 졸여서 새콤함과 달콤함이 배가 된 방울토마토,브리 치즈와 바질.

달콤한 모스카토 와인과 함께 먹으니 더 풍미가 살았다.

역시 야식은 최고다.

아리스티네는 즐겁게 먹다가 타르칸이 와인이나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안 먹어?”

타르칸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 았다가 시선을 애매하게 돌리며 말했다.

“음,먹고는 싶은데 손이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손 아파? 우미루 경 부를까?”

“아니,그 정도는 아니고.”

“전사가 손이 아프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 정도는 아니라 고.”

“지금 야식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치료받아야 할 것 같은데. 자,가자!”

타르칸이 일어서려는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획 끌어당겼다.

아리스티네는 다시 소파 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끌어안듯 허리를 감싼 채 타르칸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손 하나도 안 아프니까 그냥 이렇게 있어. 나랑.”

이 눈치 없는 여자를 대체 어 떻게 하면 좋을까.

둘이 남게 되자 네프테르가 아내를 꼬시는 법에 대해 알려 주 었다.

그래서 분위기 있게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왜.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어깨 위에 턱을 얹은 채 그녀에게 기댔다.

품에 쏙 들어온 아리스티네의 몸,그녀의 향기.

그게 그를 조금 안심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해.’

그 순간,무언가가 타르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새콤한 냄새.

타르칸은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브루스케타가 있었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리스티

네가 그에게 브루스케타를 먹여 주었다.

“맛있어?”

아리스티네가 장난스레 웃었다.

“넌 정말.”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푹 끌어안았다.

입 안에 바삭거리면서 바게트가 씹혔지만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의 품속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내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맛없어?”

“맛있어.”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그래도 맛있다.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떤 것보다 맛있었다.

킥킥 웃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뺨을 감싸 쥐었다.

“타르칸.”

황금빛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을 담는다.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네가 내 남편이라 다행이야.”

파엘라미엔이 말한 네 가지 조 건을 다 갖춘 남자여서이기도 했지만,그것보다는.

하미르의 배신이 자신을 더 성장시킬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건 네가 내 곁에 있어서야.’

든든한 관계가 받쳐 주고 있기에 하나의 배신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좋아.”

아리스티네의 말에 타르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금안이 어둑하니 짙고 뻑뻑해지며 잡아먹을 듯 아리스티네를 응시한다.

아리스티네는 제 허리를 끌어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 간 것을 느꼈다.

지척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닿았다.

* * *

타르칸은 자신의 가슴을 어루 만지는 아리스티네의 손길에 목 안이 바싹 말라 왔다.

그걸 알아챘는지 아리스티네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와인은 먹여 주지 않았네.”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그게 그렇게 섹시하고 관능적일 수 없었다.

술에 취한 건지 아리스티네는 묘하게 적극적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젖은 눈빛과 나른한 손짓,그리고 기대오는 몸까지도.

아리스티네가 와인 잔을 들어 한 입 머금었다.

그리고 그대로 타르칸의 빵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짙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 는 와인의 빛보다도 훨씬 고혹적이다.

스르륵,긴 속눈썹이 그 눈동자 위로 드리웠다.

살짝 젖은,모스카토 향이 가득 풍기는 입술이 그의 마른 입술에 닿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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