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최적의 장소를 선정해야 해.’
그러려면 마수들과 직접 싸우는 타르칸이나 다른 전사들의 의견이 필요했다.
아리스티네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보통은 이렇게 토벌이 진행됩니다. 장기간의 토벌이니 거점을 정해 그곳을 중심으로요.”
자칼렌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턱을 쓸었다.
“으음,거점이라고는 말하는데 전혀 안전하지 않잖아. 평원이라 뻥 뚫려 있고 거기다가 이동하는 것을 신경 쓰다 보니 구축할 수 있는 방어벽에도 한계가 있 고.”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저희가 누굽니까!”
무칼리가 당당하게 가슴을 퉁 퉁 두드렸다.
“비전하께서 걱정하실 이유는 없소! 이 무칼리가 마수들을 전 부 도륙할 테니!”
“도륙한다는 말은 비전하의 앞에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듀란테가 중얼거렸다.
무칼리가 화들짝 놀라 아리스티네에게 변명했다.
“어,아니,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
아리스티네가 무칼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타르칸이 잠시 전사들의 상태 를 점검 중이라고 해서 아리스티네는 자칼렌과 무칼리 그리고 듀란테와 이야기 중이었다.
전사들의 이동 경로와 전투 양상을 생각해서 시범 지역을 선정해 방책을 설치하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네는 광활한 마수 평원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 위에는 전략의 흔적이 빼곡히 남아 있었다.
전사들이 싸우게 될 흔적들.
“다들 대단하구나. 마수는 정말…… 무서운데.”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작았다.
듀란테는 그늘진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고 눈썹을 까딱였다.
그야 모두 마수를 두렵게 생각 한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반응 은 뭔가 이상했다.
꼭 마수를 직접 겪어 본 사람처럼…….
‘아니,그럴 리 없지.’
너무 나간 생각이다.
아리스티네는 유폐당한 것이지 마수가 출몰하는 황무지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한테 이런 전략을 막 보여줘도 돼? 이런 거 보통 기밀 아냐?”
그 말에 자칼린과 무칼리 그리고 듀란테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무리 대인 전쟁이 아니라고 해도,이런 건 극비 사항이었다.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게 아리스티네에게 보여 주었다.
그냥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런데 왜일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아리스티네를 향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의 비 전하시니까요.”
“뭐야,그게.”
아리스티네가 픽 웃었다.
“아니,정말로요.”
“비전하께 기밀이란 없지요.”
“치,언제는 나를 경계했으면서.”
“그게 언제 적인데요.”
“지금은 우리 비전하시잖아요.”
전사들의 말에 결국 아리스티네는 푸스스 웃었다.
시간이 지나며 쌓이는 신뢰란 어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 스하게 만드는지.
이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서로를 향해 웃음을 짓는데 빙설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예고도 없이 내려앉았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훈훈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 어붙었다.
전사들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 를 삐걱 돌리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나도 꼭 듣고 싶은데.”
타르칸이 나른한 미소를 그리 며 말했다.
“주,주군.”
전사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수보다도 타르칸 이 더 무서웠다.
타르칸은 싸늘한 눈초리로 전사들을 훑었다.
아리스티네가 와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왔더니 그가 보게 된 건一.
반나체의 전사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훈련 중이었기에 듀란테와 무칼리 그리고 자칼렌은 웃통을 벗은 상태였다.
그들은 훌륭한 전사들답게 훌륭한 대흉근과 훌륭한 복근을 가지고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그 복근과 대흉근 사이에서 그렇게 따스할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타르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아 올랐다.
‘내 가슴에만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타르칸은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아리스티네는 전사들이 벗고있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 웃고 있던 것 역시 그 때문이 아니었기에 필요 없는 배신감이 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타르칸!”
아리스티네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저를 향해 웃는 얼굴을보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배신감이 사르르 풀렸다.
역시 나쁜 건 아내가 아니었다.
유부녀 앞에서 심란하게 반나체 차림을 하고 있는 놈들이 나쁜 거지.
“옷 입어.”
“넵”
전사들이 빠르게 웃옷을 걸쳤다.
사실 벗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던 만큼 억울했지만,질투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의 타르칸에게는 변명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꼬옥 감쌌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아리스티네의 등에 닿았다.
아리스티네가 그에게 깊게 기대자 타르칸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옷을 다 입은 전사들은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솔직히 눈꼴시었다.
어째 최근 들어 두 사람의 스킨십이 짙어진 느낌이었다.
그간 애써 못 본 척,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갔지만 오늘은 한 마디 좀 해야겠다.
남의 복장을 관리했으면 본인도 자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절대 솔로라 부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공장소의 미풍양 속을 위해 그러는 거다.
자칼렌이 큼큼,헛기침하며 지 나가둣 이야기했다.
“최근 두 분께서는 마주치기만 하면 꼭 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거든.”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야 한다고요?”
“응,몸정 때문에.”
날씨 이야기하듯 담담한 어조로 내뱉은 말이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전사들은 제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바로 반응하지 못 했다.
3초간의 정적 끝에야 말이 터져 나왔다.
“예?!”
“몸.....”
아니,엄지 공주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무칼리는 존경하던 주군에게 비난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타르칸은 얼굴을 슬쩍 붉힌 채 시선을 피했다.
‘왜,왜 얼굴을 붉히시는 거야?!’
전사들은 차마 소리 내어 묻지 못했다.
그들의 동공이 해일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그러든 말든 부부는 여전히 꼭 붙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아,마수 평원의 토벌 양상이 궁금해서 그거 관련해서.”
아리스티네가 지도를 눈짓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르칸은 전략도를 보여 준 전사들을 책하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지도를 바라보다가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는 왜 비워 둬?”
최근 몇 년간의 전략도를 함께 보는데 항상 피해 가는 지점이 있었다.
주요 거점과 국경 사이에 있어서 피해 가는 게 오히려 동선에 손해일 것 같은데도.
“거기는 대마수 중 하나의 영역이라서.”
광활한 평원에는 네 마리의 대 마수가 살고 있었다.
타르칸이 무르지카를 쓰러트리기 전에는 다섯이었고.
“우리가 토벌하는 이유는 겨울 에 국경 지대까지 침범하는 마수를 견제하기 위해서니까 굳이 대마수를 건들 필요는 없지.”
“확실히.”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등고선 같은 게 영역이야?”
“맞아. 사실 실질적인 영역은 가운데의 이 부분. 하지만 영역 내에서 이동할 수도 있고 최대 한 다가가지 않는 게 좋으니까 이렇게 2차,3차로 표시한 거 야.”
등고선같이 찌그러진 원은 다 섯 개가 중첩되어 있었다.
안전을 위해 5차까지 영역을 넓게 잡은 듯했다.
그 부분 외에 딱히 피해 가는 지점이 없는 걸 보면 다른 세마리의 대마수는 아이루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똬리를 튼 것 같았다.
“흠,그러면 마수 방책은 시범적으로 어디에 설치하는 게 좋을까?”
“외곽 성벽에 사이를 두고 방파제처럼 설치하는 용도 아니었어?”
“가을 토벌 덕분에 겨울에 국경까지 오는 마수가 없다보니 시범적으로 효용성을 보이려면 다른 데가 나은가 싶어서.”
성곽은 민가와 닿을 수 있는 최후의 저지선인 만큼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는 곳이기도 해서 방책을 설치해 봤자 당장 ‘이렇 게 효과적이랍니다’를 보여 주기 힘들었다.
“확실히 다른 곳이 낫겠지만, 평원에 들어오면 방책을 구축하기 위험할 수 있어.”
방책을 구축하다가 마수에게 습격당하는 건 최악의 상황이다.
“봄이 왔을 때 저희랑 함께 설치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시기적으로 안전하기도 하고요.”
“흠,그게 나으려나.”
자칼렌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입매를 쓸며 지도를 보았다.
빨리빨리 진행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천천히 차근차근 안전하게 가는 게 나았다.
‘그 기간 동안 더 확실히 연구를 진행하면 되니까.’
연구 기간이 늘어날수록 더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낼 확률도 늘어난다.
‘이참에 이동식도 연구하자.’
이동식 방책을 완성하면 전사들이 활용하기도 좋을 터.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무칼리,자칼렌 그리고 듀란테를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이 보다 안전하게, 편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좋아. 힘내자!’
아리스티네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타르칸의 팔을 풀었다.
“벌써 가게?”
타르칸은 서운한 내색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응,소식도 알려 줘야하고.”
“데려다줄게.”
“아냐,가장 바쁜 시기인데 내가 계속 시간을 뺏을 순 없지.”
“붙어 있어야 하잖아,우리.”
“음,하지만 곧 저녁 먹을 시간인데 너무 시간을 뺏으니 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던 아리스티네가 멈칫했다.
전사들의 시선이 말하고 있다.
비전하,타르칸 전하께서는 진짜진짜 바뽑니다. 제발 말려 주세요.
매일매일 야근하는 자의 절실한 눈빛이었다.
‘왜 직접 말하지 않고?’
타르칸은 이성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혼자 가 볼게. 방책에 대한 생각도 정리하고 싶어서. 이따가 봐.”
과연 이성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타르칸은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중에 봐.”
전사 셋은 그런 주군의 모습에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정말이 지 아내 앞에서만 온순한 척하는 포악한 맹수였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꽉 끌어안았다.
따끈따끈하고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이 묻혀 아리스티네는 잠시 숨을 멈췄다.
타르칸이 그녀를 놓아주자,이번에는 아리스티네가 아쉬운 눈 초리가 되었다.
타르칸은 씩 웃으며 “이제 가야지” 하고 속삭였다.
아리스티네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에스코드를 받아 마차에 오르고 난 뒤,좌석에 앉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뭐지?’
이 느낌은?
뭔가 엄청나게 아쉽고 엄청나게 모자란 느낌이었다.
* * *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아리스티네는 그간 타르칸과 꼭 붙어 지냈다.
서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 외에는 한 몸처럼 찰싹 붙어 다녔다.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뭔가 참을 수 없는 갈증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았다.
떨어져 있을 시간을 대비해 미리미리 붙어 있는 건데 어째서 더 아쉬워지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타르칸의 품속에서 아리스티네 는 천천히 눈을 떴다.
뜨겁고 두꺼운 팔이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물 먹은 듯 무거운 공기와 싸 늘한 온도에 아리스티네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레이스 캐노피 너머로 파고드는 햇빛에는 힘이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몇 번 깜빡 이다가 몸을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흐렸다.
눅눅한 공기를 보니 비가 내릴것 같았다.
타르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좀 더 자자.”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감겨들었다.
뒤척이면서 잠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갔지만 아리스티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타르칸과 함께 누워있었다.
온 세상의 채도가 물속처럼 창백한 푸른 기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타르칸은 느긋하게 긴 몸을 누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손을 뻗었다.
단단한 어깨를 매만지다가 목 선을 훑고,다시 내려와 쇄골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의 손은 거침없었다.
그대로 내려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슴 근육을 꾸욱 누른다.
타르칸이 반사적으로 힘을 주자 탄력 있는 가슴이 움찔한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들었다.
어느새 눈을 뜬 타르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춘 채 그 상 태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타르칸.”
“아무래도 실패한 거 같아.”
뜬금없는 말에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꼭 붙어 있는데도 떨 어져 있을 대비가 전혀 되지 않아.”
물 먹은 공기 탓에 아리스티네의 말이 침실에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붙어 있어도 이제 됐다는 생각이 안 드는걸. 오히려 더 붙어있고 싶어.”
몸정이 중독적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타르칸은 조곤조곤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고 숨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배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뭉쳤다.
“어쩌지?”
아리스티네의 물음에 타르칸이 상체를 획 들어올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 옆을 짚는다.
제 아래에 누워 있는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타르칸의 눈매가 깊어졌다.
“너도 그래?”
아리스티네의 물음에 타르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너도 그러냐고?
이 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 는 걸까.
타르칸은 항상 그랬다. 항상 부족했다.
아리스티네와 닿아 있는 순간조차도 결여된 기분에 갈급했다.
아리스티네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타르칸의 어 깨를 짚었다.
타르칸은 그 손가락이 자신을 결박하는 주술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 그는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아리스티네의 곁을 떠난다.
당연한 의무였고,타르칸의 긍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내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떠날 수가 없었다.
타르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부름에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 이름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리는 것이었던가.
천천히 타르칸의 상체가 기울 었다. 아래로,더 아래로.
눅진한 공기 속에서 뜨거운 숨 결이 퍼져 나갔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감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입술에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 쳤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