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입술에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 이 마주쳤다.
그 순간,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거칠게 부딪치고 숨결이 타올랐다.
짜릿한 전율이 척추를 내달려 손끝이 저릿했다.
서로를 먹어 치울 듯 혀가 뒤 엉키고 빨리고 깨물렸다.
부드럽고 우아한 낭만적인 키 스가 아니었다.
서로를 빼앗고 탐하고 침략하 는 키스였다.
마음이 앞서 치아가 부딪치고 입술을 물어뜯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떨어지는 일은 없 었다.
틈 없이 밀착한 상태로 정신없 이 격렬하게 오가는 키스에 침대 시트가 밀리고 뭉쳤다.
타르칸의 손이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꽉 틀어잡고,아리스티네 의 손이 타르칸의 등을 타고 내 려갔다.
흘러내린 침의가 어디에 걸린 것인지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아……”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 를 마주 보았다.
열기와 흥분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서로의 존재감이 분명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였다. 정말로 키스를 했다.
몸 안을 내달리는 열기와 입술에 남은 지워지지 않는 감각,그리고 상대의 얼굴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걸 온전히 자각하는 순간,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화아아악 붉어졌다.
새하얀 목덜미까지 빨갛게 변 했다.
“어,으,그,그게……”
아리스티네는 답지 않게 횡설 수설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줍어서,도저히 타르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격렬하게 타르칸을 탐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한 반응이었다.
타르칸은 발긋하고 따끈한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여자는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다.
애써 붙잡았던 이성의 끈이 점점 희미해진다.
그들은 부부 사이고,조금 전 침대 위에서 뜨거운 키스를 주 고받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제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아니,자제하는 게 오히려 문제인 것 같았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이전에 침대를 부술 수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건 곧 함께 부숴 보자는 뜻 아닌가?
타르칸이 이미 사라진 이성을 통해 합리화하는 사이, 아리스티네는 그의 밑에서 꿈지럭거리며 애꿎은 시트를 꾹 말아 쥐었다.
대체 왜 키스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타르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그에게 입을 맞춘 후였다.
그것도 그냥 입을 맞춘 게 아 니라 아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떠오르는 기억에 아리스티네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키스한 걸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의 시선이 차마 타르칸을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었다.
“저,슬슬 일어나야 하지 않을 까? 오늘 떠나는 날이잖아.”
타르칸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위에서 비키지 않았다.
“타르칸.”
“응”
“빨리 안 나가면 다들 찾을 거 야.”
“그냥 잠시만.”
타르칸이 옹송그리고 있는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옆에 누웠다.
뒤에서 안은 모양새가 되어서 아리스티네는 더 바짝 몸을 움 츠렸다.
그의 손과 몸이 닿은 부분이 델 것처럼 뜨거워서 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끌어안고 있을게. 아무 짓도 안 해.”
심장이 미친 듯이 쿵광거렸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꽉 감았다.
뒤죽박죽 뒤엉킨 실처럼 설렘과 부끄러음과 울렁임이 그녀의 안을 어지럽혔다.
* * *
“주군.”
“오셨습니까.”
회의실에 있던 전사들이 들어서는 타르칸을 맞았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불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타르칸이 엄청나게 늦게 출근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이 출정일인 만큼, 전사들도 타르칸이 늦게 나올 것을 예상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신혼인데다가 결혼 후 첫 원정이니까 당연히 배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예상 지각 시간을 훌쩍 넘겼다.
‘내가 내년엔 반드시 결혼하고야 만다.’
전사들이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던데 왜 자 꾸 패배감을 맛보게 되는 걸까.
타르칸이 느지막이 나왔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지난 몇 개월간 꾸준히 전략을 짜고 훈련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오늘은 최종적인 점검만 하면 됐다.
타르칸은 발코니로 나가 집결한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실바누스와 전쟁을 하면서 마수 평원까지 관리해야했던 터다.
그런데 실바누스와의 관계에 평화가 찾아옴으로써 확실한 적 인 마수에게만 검 끝을 겨누게 됐다.
체력적으로도,정신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으니 기세가 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레이디가 생겼다.
주군인 타르칸의 비는 곧 그들이 모시는 레이디였다.
그간 공석이었던 자리가 드디어 채워진 것이다.
전사들은 모두 아리스티네를 경애하고 있으니 더더욱 의욕에 불탔다.
타르칸은 전사들을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아리스티네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그녀와 주고받았던 키스.
몇 번이나 꾸었던 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 었다.
좋다거나 기쁘다거나 만족스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폭력적이리만치 강렬한 감각이 그를 붙들고 난폭하게 뒤흔들어서,그녀 외에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타르칸은 엄지로 입술을 숙 쓸었다.
키스가 끝난 후에 얼굴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던 모습까지 떠올리니 턱에 힘이 들어가며 복근 이 뭉쳤다.
왜 하필 지금 원정을 가야 하는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 든다.
그의 머릿속에는 빨리 마수들 을 토벌하고 돌아올 생각만 가득했다.
병사들이 의욕에 불탄다고 했 지만,가장 의욕에 불타는 사람은 타르칸이었다.
* * *
“비전하,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좋은 일은.”
궁인의 질문에 아리스티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햇살처럼 깃들었다.
아니라곤 했지만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키스란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아리스티네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볼 때마다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궁인들이 침실에 집착하던 이유도.
〈첫날밤에 침대를 부쉈으면 서!〉
자신을 기만자 바라보듯 째려 봤던 파엘라미엔의 모습이 떠올
그때 자신은 그저 후계를 생산하기 위한 의무의 일환일 뿐,결 혼 생활에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지했어.’
파엘라미엔은 현명했다.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옅은 홍조가 그녀의 뺨에 드리워 졌다.
영락없이 수줍은 새 신부의 사 랑스러운 모습이라 궁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왕자 부부가 평소보다 늦게 침 실 밖으로 나올 때부터 그들은 간밤이 꽤 황홀했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잠시 입술에 남은 감촉을 음미 하던 아리스티네는 갑자기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원정을 나가면 한 달이나 지나야 돌아온다는데……”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리며 포크로 케이크를 푹푹 찔렀다.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가 사정 없이 뭉그러졌다.
항상 야무지게 접시를 비우던 아리스티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처음이었다.
왜 입맛이 없는지 너무 분명해 서 궁인들은 미소를 지었다.
“한번 타르칸 전하께 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이따 출정식 때 갈 건데,뭐. 지금부터 가면 준비하는 데 방해만 될 거야.”
딸깍,케이크를 먹을 생각이 완전히 가셨는지 아리스티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해라니요. 타르칸 전하께서는 좋아하실 거예요.”
“맞아요. 오히려 힘이 솟으실걸요?”
“전사들의 사기에도 좋고요.”
궁인들의 설득에 아리스티네는 고민했다.
사실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마음이 꽤 기울어졌다는 증거였다.
본래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뭐 하러 방해하러 가냐고 일축 했을것이다.
아리스티네는 찻잔을 톡톡톡 두드리다가 결국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가 볼까……”
“그럼 가실 준비를 하셔야죠!”
“후후,저희만 믿으세요,비전하!”
“타르칸 전하께서 한 달간 허 벅지를 찌르며 비전하만 그리도록 만들 테니까요!”
궁인들이 까르르록 웃었다.
아리스티네는 그런 궁인들을 바라보며 어휴,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입가 에도 조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궁인들의 손길을 받으며 아리스티네는 모처럼 거울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리 는 체인 서클릿에는 나비 장식과 브리올레트 컷 자수정이 달 려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움직일 때마다 나비가 춤을 추고 보석이 달랑이며 반짝였다.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남보랏 빛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백금 허리띠를 찼다.
긴 드레스는 치맛자락의 끝으 로 갈수록 별이 깃든 것처럼 반 짝반짝 빛났다.
은사로 자수를 놓은 게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것이었다.
백금 허리띠는 체인이 길게 늘 어져 있는 디자인이었는데,체인 사이사이에 다이아몬드를 물렸다.
암 링과 목걸이 역시 깨끗한 화이트골드로 이뤄져 있어 아리스티네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 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새하얀 은여우 모피 숄 을 걸치는 것으로 완성.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본 궁인들이 감탄을 홀렸다.
별빛을 몰고 오는 밤의 여신과 도 같았다.
“하아,잘 어울리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타르칸 전하께서 깜짝 놀라시겠어요.”
“이러다가 한 달도 안 되어서 돌아오시는 게 아닌지 몰라!”
“그리고 돌아오시자마자……”
궁인들이 응힉힉 웃었다.
평소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 는 궁인들을 깐한 눈으로 바라 봤을 텐데,지금은 달랐다.
아리스티네는 괜히 부들부들한 슬을 꽉 쥐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타르칸이 보고 싶었다.
아침에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나올 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한 번 더 키스할 걸,괜히 부끄러워서 빨리 나가자며 부산을 멸었다.
“마차는 대기 중이에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저었다.
“내 마차가 들어가면 다들 막 바지 준비를 하다가 멈추고 달려올걸. 출정하는 날인데 그렇게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배려 가득한 말에 궁인들은 미 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냥 평범한 마차로 가시는 게 좋겠어요.”
“지금 짐마차가 많이 드나들테니 아예 그런 마차를 타시는 건 어떠세요?”
“타르칸 전하께서 깜짝 놀라시 겠지요!”
궁인들이 즐거워했다.
바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지만,궁인들 말대로 타르칸을 놀라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리스티네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밖으로 나갔다.
* * *
“나도 결혼할까.”
자칼렌이 불쑥 중얼거려서 검을 손질하던 전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실 장군 급쯤 되는 전사들은 연애보다는 검에 더 관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집보다 연무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1년에도 몇 번씩이나 마수 평원을 드나들었다.
그렇기에 딱히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당연히 남들 눈은 신경 쓰지 않고 꽁냥꽁냥하는 타르칸과 아리스티네 때문이었다.
“결혼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집에 붙어 있어야 정도 싹트고 그러는 거야.”
기혼자의 말에 자칼렌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우리도 주군께서 이렇게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실 줄 몰랐잖아.”
“그건 그렇지. 처음 주군께서 정략혼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땐 걱정이 많았는데.”
“아아,상대가 실바누스의 황녀 라는 것도 그렇긴 했지만……”
“주군께는 평생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꺼내는 단어에 전사 들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정말 주군께서 변할 줄 몰랐다. 거의 10년 동안 한 사람만 바라봤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였는데.”
“정말 지독한 사랑이었지.”
“그래도 걱정과 달리 비전하께서 주군께 냉대받지 않아서 다 행이야.”
“그래. 그 찾지도 못하는 첫사 랑보다는 우리 비전하께서 훨씬 더一.”
주거니 받거니 하던 전사들의 대화가 뚝 끊겼다.
그들은 눈을 부릅뜬 채 풀숲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 았다.
“비전하……!”
전사들은 당황해 황급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출정 준비로 시끄럽게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설마 아리스티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스티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흥분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고,서늘하고,고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전사들은 더 어쩔 줄을 몰랐다.
시선을 피하는 커다란 남자들을 바라보며 아리스티네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첫사랑이라니.
단순히 디오나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미 다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도 애매 해요. 워낙 어렸을 때라……. 그냥 소꿉장난 같은 추억일 뿐이 지요.”
전사들이 하하,웃으며 아리스티네에게 변명했다.
아리스티네는 그들이 무슨 말 을 하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받아들여지 진 않았다.
과거의 연일 뿐,아리스티네가상관할 일은 아니다.
상대의 과거에 신경 쓰는 일 같은 거,촌스러운 일이라고들 했다.
현재의 연인은 자신을 좋아하 니 그걸 믿고, 그냥 신경 끊으면 된다고.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도저히 신경을 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연인들하고는 다르니까.’
과연 현재의 타르칸이 자신을 좋아할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