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키스를 했지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서로 없었다.
몸정이라는 건 과연 어디까지 를 뜻하는 걸까?
애초에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부부 관계고 가족이었다.
〈부부는 연인이 아니라 가족이지요. 연인이 사랑하는 것하고는 다르답니다.〉
〈그렇지요. 동료라고 해야 하나.〉
〈전우에 가깝죠.〉
귀부인들이 웃으며 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쿠르릉,멀리서 낮게 천둥이 울렸다.
결국 내리기 시작하나 보다, 비가.
“리네.”
그 순간,등 뒤에서 그렇게 듣고 싶었던,그러나 지금만큼은 결코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타르칸은 뒷모습조차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내를 바라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도 자신이 보고 싶어서 온 걸까,작게 미소 지으며 손목을 잡는데
탁!
아리스티네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리네?”
타르칸은 뿌리쳐진 그대로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티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타르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닿는 순간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분했다.
이렇게 동요하는 것이,지금 이 순간조차 출정을 위해 무구 를 갖춰 입은 타르칸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더더욱.
그게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하 나의 감정을 가리키고 있어서.
아리스티네는 분한 마음에 입 술을 꾹 깨물었다.
“리네? 왜 그래.”
울 것 같은 아리스티네의 표정에 타르칸은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거칠게 뿌리쳐진 것은 안중에도 없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 신을 들여다보는 타르칸의 모습 에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 아닌가.
“이거 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타 르칸은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리스티네를 바라볼 때와 확연히 다른 눈빛이 전사들을 훑 는다.
그 추궁하는 시선에 전사들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을 남겨 두고 소리 없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눈치를 보던 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두 사람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적요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리스티네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고집스레 고개를 들지않았고, 타르칸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짚은 채 기다려 주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툭,툭.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 늘을 보았다.
“일단 들어가자. 너 몸도 약해서 비 맞으면 바로 감기 걸릴 거야.”
그가 팔로 드러난 아리스티네 의 어깨를 감쌌다.
아리스티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조심스레 잡아끄는 타르칸의 손길을 거부 하고 획 고개를 들었다.
“타르칸,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있다며.”
타르칸은 숨을 삼켰다.
설마 아리스티네의 입에서 나을 줄은 몰랐던 말이었다.
당황한 그의 표정을 본 아리스티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자신은 대체 무슨 답을 원하고 이런 질문을 한 걸까.
결국 이렇게 맞다는 걸 확인받 으면 가슴이 무너질 것을.
“그러면 왜 내게 키스했어?”
흔들리는 목소리가 가날팠다.
저도 모르게 원망하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아리스티네는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타르칸 전 하.”
아리스티네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바로 폈다.
다행히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 리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언제나처럼 우아 한 걸음걸이로 타르칸을 스쳐 지나갔다.
“리네!”
타르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사이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빗방울로 흐릿한 시계에 서로 의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아리스티네의 표정을 본 타르 칸은 흠칫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전하.”
정중하고 단정한 어조였다.
너무 그래서 차가운 벽이 느껴지는.
아리스티네는 그 말만 남기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몸을 차갑게 때리는 비 속에서 타르칸은 멍하니 아리스티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전사들은 궂은 날씨에 익숙했다.
비가 온다고 해서 출정식이 미뤄지거나 생략될 리 없다.
조금 간소화되긴 했지만 그대로 진행되었다.
원정을 떠나는 전사들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네프테르의 연설이 끝나자 아리스티네가 단상 위에 올랐다.
전사들이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며 그들의 레이디에게 경애를 표했다.
쿵쿵거리는 땅울림이 천지를 뒤흔들 듯했다.
아리스티네는 미소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어두운 밤에도 전사들의 발길 을 인도하는 별처럼 빛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그들의 가슴 이 자긍심으로 부풀어 올랐다.
탕탕,전사들이 흉갑을 두들겼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완벽한 침묵이었다.
지축을 흔드는 땅울림도,흉갑의 날카로운 울림도 잦아들고 오로지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고요 속에서 타르칸은 자신의 레이디 앞에 섰다.
그를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눈빛은 언제나와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타르칸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구를 갖춰입은 위대한 전사가 아름다운 레이디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보는 이릐 마음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이리스티네는 타르칸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타르칸은 그녀의 손을 정중히 붙잡았다.
두 손이 맞닿는 찰나 아리스티네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 보고 있는 타르칸만이 알아첼 수 있는 미세한 반응.
타르칸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손등 위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오늘 아침 그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게 떠올라 아리스티네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싶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꽉 준 채 애 써 참았다.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입술이 화인을 남기듯 손등 위에 오래 머무르다 떨어졌다.
타르칸이 다시 그녀를 올려다 본다.
아리스티네는 미소 지은 채 그 를 일으키며 맞잡고 있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와아아아아一!”
전사들의 함성이 비구름을 몰아낼 둣 하늘을 울렸다.
전사들을 축복하며 사기를 북돋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지극히 평소와 같았다.
아니,오히려 평소보다 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첫사랑 이야기로 타르칸과 아리스티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는 것을 아는 몇몇 전사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자신들이 떠난 뒤, 잘 해결되었나 보다.
“리네.”
함성 사이로,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불렀다.
“네게 키스한 건 거짓이 아니야.”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함성이 멎어 들 때쯤,아리스티네는 팔을 내리고 타르칸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단상 위의 장막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부디 승리하시길.”
아리스티네는 형식적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기품 있고 우아한 자세로 뒤돌아 걸었다.
모든 전사들 이 꿈꾸는 레이디의 자세대로.
타르칸은 그녀의 온기가 빠져 나간 빈손을 꽉 쥐었다.
아리스티네를 붙잡고 싶었다.
붙잡고,몸을 돌리고,눈을 마주 보고,꽉 끌어안고,그리고.…….
그리고.
아리스티네에게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그녀를 사랑하고 원해서 키스를 했다.
하지만 첫사랑은?
그러나 이대로 아리스티네가 멀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 도 없었다.
타르칸은 단상을 내려가려는 아리스티네의 팔을 붙잡아 돌렸다.
핑그르르一,반짝이는 치맛자락이 회전하고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을 유영했다.
그다음 순간,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뜨겁고 단단한 품에 푹 끌어안겼다.
‘와아아아아아아一!!
아까보다도 훨씬 거센 함성이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귀에는 빗소리와 함께 멀게만 느껴졌다.
오로지 그녀를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끌어안고 있는 타르칸의 체온만이 선명했다.
“리네.”
그의 목소리가 유독 또렷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기다려.”
머리 위에 뜨겁고 말랑거리는 무언가가 닿았다.
아리스티네가 놀라 고개를 들 었을 땐,이미 그 온기는 사라진 뒤였다.
전사들이 흉갑을 두드리는 소 리와 빗방울이 장막에 부딪치는 소리가 공명하듯 울려 퍼졌다.
온 세상을 두드리는 그 소리가 제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꽉 쥐고 단상을 내려왔다.
‘멍청이.’
단상에서 내려온 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입술이 닿았던 머리 위를 매만졌다.
도대체 누가 멍청이라는 건지 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 *
무장을 한 전사들이 출정을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리스티네는 그 모습을 바라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비 내리는 곳으로 거리낌 없이 나가는 모습에 궁인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비전하.”
“혼자 걷고 싶어.”
아리스티네의 말에 궁인들이 멈칫했다.
혼자 걷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내리고 있고,아리스티네에겐 우산이 없었다.
평소라면 감기 걸린다거나 온실 쪽에서 산책해 보시는 건 어떠냐는 말로 말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를 모시면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처음 아이루고에 도착했을 때,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비웃었을 때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 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궁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아리스티네의 뒤를 쫓았다.
아리스티네가 우뚝 멈춰 섰다.
“혼자 있고 싶다고 내가 말했 잖아.”
“저,적어도 우산이라도…… ”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지 마.”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빗방울이 전신을 얼려 버릴 둣 날카롭게 내리박혔다.
‘최악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궁인들에게 화풀이라니.
아리스티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더 화를 낼 것 같았다.
목적지도 없건만 발걸음은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리스티네는 인적이 드문 숲 길 위에 서 있었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고 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 리만 가득한 곳.
그 소란스러움이 차라리 고요 하게 느껴졌다.
아리스티네는 우뚝 걸음을 멈 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고 노란 나뭇잎이 용케도 무거운 빗방울 버티고 매달려 있 는 너머로 먹물이 빗방울에 번 져 버린 것처럼 흐린 하늘이 보 였다.
툭,투둑.
빗방울이 빵을 두드렸다.
아리스티네는 피하지 않았다.
기어코 눈에까지 빗방울이 맺 힌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무리 눈이,마음이 아릿하게 아려 와도.
그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하늘을 가렸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고였던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리스티네는 우산이 그녀의 위를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하미르였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그를 바라 보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미르는 그녀를 붙잡거나 세 우지 않고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곁에서 걸었다.
결국 아리스티네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하미르를 바라보니 그가 미소 지었다.
다정한 미소였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미르는 우산을 씌워 주었음 에도 아리스티네의 얼굴에,눈가에 계속해서 맺히는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비가 많이 내리네요.”
하미르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파랗게 굳은 입술을 열었다.
“소나기 예요.”
“소나기?”
“네,잠깐 내리고 그칠 소나기.”
하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출정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벌써 두 시간 남짓 퍼붓고 있었다.
하늘에는 끝도 없이 젓빛 구름 이 이어져 있어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소나기네요. 곧 그치겠지요.”
아리스티네는 묵묵한 시선으로 하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에게 떨어 진 채 우산을 씌워 주느라 그의 어깨가 흠떡 젖고 있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색이 열은 백금발이 물기를 잔 뜩 머금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돌아가요”
그녀의 말에 하미르가 우산을 살짝 흔들었다.
“그냥 우산만 씌워 줄게요.”
그가 미소 지었다.
“다른 건 안 해.”
비에 젖어서일까? 그 미소가 곧 물에 녹을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
“.............”
아리스티네는 침묵했다.
“당신이 비 맞지 않도록,그냥 그것만.”
그거라도 하게 해 줘요.
청명한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