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하미르 전하!”
시종과 보좌관이 비에 흠팩 젖어서 돌아온 하미르를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궁인들이 서둘러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하미르는 그들의 손길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보좌관에게 말 했다.
“역시 준비해 줘요.”
“예?”
뜬금없는 말에 보좌관은 당황 했지만,곧 하미르가 무엇을 말 하는지 알아챘다.
“내키지 않아 하시더니……”
그 말에 하미르가 웃었다.
“난 어떻게 해도 손에 넣어야겠거든요.”
비 내리는 먼 곳을 바라보며 입매를 쓰는 하미르의 모습에 보좌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에 넣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건 필시 다음 대 왕위일 터.
하미르가 이렇게 왕좌에 의욕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한발 물러나 있는 여유로 운 태도였던지라 모시는 입장에 서는 의지가 되는 한편 애가 타 기도 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의욕적이니 저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응,태어나서 이렇게 가지고 싶은 건 처음이에요.”
그는 궁인들이 달라붙어 물기를 닦는 게 성가시다는 듯 자리 에서 벗어났다.
하미르는 목을 타고 흐르는 물 기도 내버려 둔 채 창가에 기대 섰다.
푸른 눈동자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본다.
굵은 빗줄기가 온 세상을 흐리 게 가리고 있어 바로 앞의 정원 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미르는 그 흐리터분한 세상을 한참 동안 말없이 옹시했다.
마치 그 안에서 선명한 무언가 를 보듯이.
“정말로 처음이야.”
Chapter 35. 비가 온 뒤엔
“방책이 완성되면 아이루고만 수혜를 받는 게 아니에요. 이건 또 한 번 대륙에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올 겁니다!”
아세나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외쳤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반짝 빛내는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아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전하께서는 이미 예상하고 계셨군요.”
“그야,뭐.”
처음부터 유통망을 생각했었다.
물론 방책은 아이루고를 보호 하는 울타리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것이다.
아이루고가 있는 마수 평원은 대륙의 중부에 위치해 있다.
여태까지 각 국가 간의 교역은 마수 평원을 피해 한정된 무역 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포털은 모든 기업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었기에 대다수의 무역상은 해상로를 제외하면 평원 가장자리를 빙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책 사업이 성공하면 다르다.
우선 마수를 토벌하기 용이하니 인간을 먼저 공격하는 마수의 개체 수도 현저히 줄어들 것 이다.
무엇보다 성공시킨 후,이를 응용해 아이루고를 중심으로 타국과 통하는 육로를 만들 수 있다.
그야말로 아이루고가 대륙 무역의 거점이 되는 것이다.
무역의 발달은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며 잉여 생산물을 순환시키고,나아가 사회의 전반 적인 발달을 가져온다.
‘꼭 사회의 발달을 가져오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네프테르에게 브리핑할 때는 유용했었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무칼리 같은 전사들이 조금 더 안전하길 바랄 뿐이었다.
‘음,그런데 이렇게 유통로의 안전을 확보해 무역 거점이 된다면 역시 돈이 많이 될 테고, 방책 사업을 추진한 나한테도 그 돈에 대한 지분이…”
아리스티네는 무심코 돈 생각 을 하다가 멈칫했다.
이제 와서 많이 벌 생각을 해 봤자 의미가 있을까.
아리스티네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은 이혼하고 자유로운 삶을 원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코끝에 물비린내가 물씬 풍기 는 것 같았다.
비는 멈춘 지 오래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마음에는 그날부터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치지 않는 소나기가.
“티타임이라도 한번 가질까요? 가을에 어울리는 스모크 얼그레 이 차가 있어요.”
리트렌의 말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주인의 심기를 살피며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그녀를 바 라보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빙긋 웃었다.
“그래, 맛있겠다. 궁인들한테 티 푸드도 가져오라고 하자. 애플파이를 굽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때?”
“그거 좋죠!”
“역시 맛있는 걸 먹어야 일할 힘이 난다니까요.”
맛있겠다며 부산을 떠는 사람 들을 보며 아리스티네는 작게 미소지었다.
축 처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돈 버는 걸 회의적으로 생각하 다니,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돈은 많을수록 좋지!’
돈이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행복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공해준다.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졌다.
회의실 한편에서 순식간에 근 사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리트렌이 일부러 가져온 스모 크 얼그레이는 숲 속 같은 훈연 향이 아주 일품이었고,갓 구운 뜨거운 애플파이는 바삭바삭 새 콤달콤했다.
아리스티네가 차를 한잔다 마시자 리트렌이 웃으며 한 잔 더 따랐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 흔들 리고 있었다.
리트텐이 준비해 온 걸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이자 기쁜 것 같 았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요 며칠 아리스티네가 가라앉아 있는 게 그의 눈에도 보였을 것 이다.
그래서 관심도 없는 차를 부러 챙겨 온 것이겠지.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아리스티네는 미소를 머금었다.
꼭 타르칸이 아니더라도 유폐 당한 곳에서 벗어나 그녀가 쌓 아 온 인연들은 소중하게 빛나 고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양손으로 찻잔을 쥐고 차를 한 모금 머금으려던 순간이었다.
찻잔 속에서 찻물이 핑그르르 요동쳤다.
찻잔을 들고 있기에 흔들린다 고 하기엔 심상치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요동치던 찻물은 잠잠해지더니 다른 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제왕안의 발현이었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었다.
‘어디지?’
광활한 초원이다 보니 단서가 될 만한 건 극히 적었다.
굳이 따지자면,살짝 누르스름 한 빛을 띠는 풀이 섞여 있는 것을 보니 가을 같았다.
한가로운 광경이었다.
하늘은 맑고 날이 좋았다.
목가적인 풍경에 아리스티네는 언젠가 저런 곳에 가 보아도 좋 겠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였다.
지축을 뒤흔들 것 같은 땅울림 과 함께 거대한 군마의 무리가 평원을 달렸다.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는 자는 타르칸이었다.
수면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카메라를 뒤로 빼듯,수면 거 울에 점점 더 많은 전경이 비치기 시작했다.
타르칸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새까만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뒤늦게 그게 마수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수 평원.
지금 아리스티네가 보고 있는 곳은 마수 평원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무수한 마수들이 결집해 있어 마치 검은 파도처럼 보였다.
그 압도적인 수에 아리스티네 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에 반해 타르칸이 이끄는 전사들은 수가 너무 적었다.
‘이 상해.’
아무리 마수들의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마수 평원이라 해도 그렇지,병력이 너무 심각하게 차이 난다.
아리스티네는 몇 년간의 전략 도를 보았고,어떤 식으로 마수들과 싸울지도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병력이 차이 나는 전투를 치른 적도 없었고,치를 계획도 없었다.
장군들이 이끄는 몇 개의 사단 이 나뉘어져 있긴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는 역할을 나눠 협공했다.
내년부터 뭔가 달라지는 걸까?
‘그럴 리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 없다.
타르칸이 이끄는 전사들이 마 수들의 코앞까지 왔을 때,새까만 파도가 해일처럼 그들을 향해 밀어닥쳤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전사들의 검에서 오러가 빛나 며 하늘과 땅을 갈랐다.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수들이 키이이이익,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타르칸이 이끄는 위대한 전사들은 확연히 차이 나는 병력에 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정확한 움직임으로 마수들을 도륙해 나갔다.
하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병력이 너무 차이 나.’
끝없이 쏟아지는 숫자를 이길 순 없다.
언젠간 전사들의 체력이 바닥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리스티네 보다 타르칸이 더 잘 알 터.
[듀란테는?]
[여전히 통신이 안 됩니다!]
[무칼리와 토르켈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르칸이 혀를 찼다.
[여기에서 전선이 더 밀리면 안 돼. 성벽과 너무 가까워진다.]
[이곳에 제 뼈를 묻을 각오를 마쳤습니다.]
[뼈는 무슨.]
타르칸이 픽 웃으며 제 몸집의 세 배에 달하는 마수 둘을 동시에 양단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살짝 깃들어 있었다.
지금은 진이 유지되어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 지만 시간문제다.
어느 한 명이라도 밀린다면 순식간에 진이 파괴될 것이고, 안 그래도 작은 전력이 분산될 것 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一.
[다른 녀석들이 올 기미는 안 보이는군.]
[죄송합니다.]
[혹시 온다고 해도 최악을 가정하는 게 좋지. 희망을 버려라.]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곳을 마수 놈들이 닿을 수 있는 최후의 장소로 만들겠습니다!]
[고작 네 목숨을 바친다고 그렇게 될까.]
타르칸은 이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농담을 던졌다.
[주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이 군단을 이끄는 것은 나다.]
타르칸이 상체를 숙였다.
거칠게 달리는 군마와 완전히 일체 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희생하더라도 그건 너희가 아니라…….]
[키이이이익!]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마수 탓에 타르칸의 말은 이어지지 않 았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그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만약 희생하더라도 그건 너희가 아니라,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타르칸이 죽는다고?
심장이 조여 와 제대로 된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전투의 양상은 시간이 갈수록 힘겨워졌다.
마수의 녹색 체액이 튀고 엉켜 붙어 전사들의 검을 무디게 만 들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오러 역시 빛이 바랜 둣 희미해졌다.
아리스티네는 멍하니 그 장면 을 바라보았다.
움직임을 따라 흩날리는 타르칸의 머리카락은 검은 갈기 같았다.
그의 검이 마수의 딱딱한 가죽을 뚫는다.
마수가 육중하게 쓰러지는 위로 다시 또 마수가 덮쳐 온다.
그 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깜빡였다.
데자뷔를 겪는 것처럼 모호하 면서도 확실한 감각이 머리를 강타했다.
분명 언젠가 본 것 같은,겪어 본 것 같은 느낌.
수면 거울을 통해 멀리서 바라본 게 아니라,실제로 그 자리에서 보고 겪은 것같이 생생한 감각.
깊이 가라앉았던 난파선을 끌어 올리는 것처럼 아리스티네는 기억의 해저에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꿈일 텐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루고로 가는 혼삿길에 오르기 전까지 아리스티네는 단 한 번도 실바누스를 벗어난 적 이 없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결국 지친 전사가 마수를 미처 막아 내지 못했고,진이 뚫렸다.
[주군! 좌측에……!]
좌측에 난 구멍으로 마수들이 미친 듯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타르칸이 칫,하고 혀를 찼다.
[이대로는 힘들어.]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상황을 훑었다.
그리고 우현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잘 훈련된 군마는 갑작스러운 거친 명령에도 유연하게 몸을돌렸다.
[우로 퇴각하라!]
타르칸의 말을 복창하며 전사 들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거칠게 평원을 달리는 전사들 의 뒤로 마수들이 폭풍처럼 따라붙었다.
평원에는 지리적으로 이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도를 떠올리며 방향을 가늠하던 자칼렌이 무언가를 깨닫고 타르칸을 돌아보았다.
[주군,이대로 가면…….]
[그래.]
타르칸이 자칼렌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자칼렌,안타깝지만 네가 나설 기회는 없다.]
[평원에 뼈를 묻어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자칼렌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코가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눈물을 홀리지 않았다.
자칼렌이 거칠게 말을 몰았다.
[나를 따르라!]
그 말에 뒤따르던 전사들이 자칼렌을 따라 말을 몰았다.
그사이 타르칸은 홀로 방향을 살짝 틀어 대각선으로 달려 나갔다.
대열에서 타르칸 혼자만이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비전하?”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아리스티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몇 번 깜빡이자,자신을 걱정 스럽게 바라보는 리트렌의 얼굴이 보였다.
“어,왜?”
단단하게 굳은살 박인 리트랜의 손끝이 아리스티네의 눈가를 스쳤다.
투명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아리스티네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