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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19화 (119/183)

119화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는 건 물론,꽃조차 피해 난다는 대마 수의 영역.

〈저기로 가면 쫓아오지 않을 거야.〉

아리스티네는 불현듯 떠오르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아직은 엣된,어린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리스티네는 한 박자 늦게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아주 오래전,자신이 꿈 속에서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그래,맞아. 대마수의 영역에는 마수들도 두려워해 들어가지 않아.’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따로 떨어져 나온 이유를 깨달았다.

영역 안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침입하면 대마수가 알아첼 가능성이 컸다.

타르칸은 대마수가 전사들을 공격하기 전에 제가 상대하려 한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거짓말쟁이.’

기다리라고, 빨리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눈앞이 뜨거워지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물론 타르칸은 이미 한 번 대마수 무르지카를 무찌른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다르다.

무르지카는 대마수 중에서도 작았고,물리 방어막을 전개할 수 없는 마수라서 검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을 통해서라도 대마수 무르지카를 본 적 이 없다.

사람들이 무르지카에 관해 말 하는 것을 본 경우도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곤 타르칸 이 무르지카를 무찔렀고,무르지카가 얼마나 흉포하고 악랄한지, 타르칸이 그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용맹하고 강인했는지 일컫는 이야기들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생각하던 아리스티네의 뇌리에 번쩍 섬광이 스쳤다.

〈무서운 게 있어.〉

〈나는 봤어. 네가 이겼어.〉

〈너는 할 수 있어.〉

머릿속이 번쩍일 때마다 동굴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아리스티네는 이마를 움켜쥐었다.

대체 누구에게 했던 말일까.

그녀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눈앞에 짙은 수림이 펼쳐졌다가 흙먼지가 날리는 황무지가 보였다가,이윽고 누군가의 작은 등이 보였다.

작은 아이지만 그때 아리스티네의 눈에는 태산보다도 더 커 보였던 등.

아리스티네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눈을 번쩍 떴다.

해저 깊은 곳에 오래도록 가라 앉아 있던 난파선 같은 기억.

끌어 올려도 굵은 사슬로 칭칭 감긴 채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아리스티네는 바로 그 기억을 차곡차곡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떠올리는 와 중에 사슬이 흔들리고 검게 슨 녹이 떨어져 나가며 자물쇠가 달칵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자물쇠가 완전히 열렸다.

* * *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어린 아리스티네는 숨을 헐떡였다.

유폐당한 뒤 돌봐지기는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해 아픈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오늘은 정말로 심각했다.

아리스티네는 고통으로 생각이 끊기는 와중에도 한 문장을 떠올렸다.

죽는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이 그녀를 괴롭혔어도 그동안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이다.

심지어 황제가 그녀의 침실에 불을 질러 불길에 휩싸였을 때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선명 하게 그 세 글자가 떠올랐다.

이렇게 죽는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열병에 몸부림치다가 고통스럽게,천천히.

괴로워서 헐떡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제왕안이 발현되었다는 것을 황제에게 들켜온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것보다야 이렇게 홀로 죽는 게 나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고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지만,그녀는 세계를 구했다.

그 사실 하나를 제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인생이었다.

황금의 피라고 불릴 정도로 가 장 오래된 지배 가문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은 곧 의무 를 등에 이고 세상에 나왔다는 뜻이다.

그녀는 이미 제왕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치적을 완성했다.

수백 개의 바늘로 온몸을 찌르 는 듯한 고통에 어린 황녀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말았다.

작게 웅크린 그녀의 몸은 또래에 비해 현저히 작아 한 줌처럼 보였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기대가 더 큰 좌절을 불 러온다는 것은 몇 번이고 겪어서 깨달았다.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반 복하며 아리스티네는 고열에 시달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의식인지 그 경계가 희미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삶인지 죽음인지도.

그러다 눈을 떴을 때,아리스티네는 자신이 덮고있는 낡디 낡은 모포 한쪽이 흠백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흘린 땀 때문이라고 하기엔 한 귀퉁이만 너무 푹 젖어 있었다.

가물거리는 시선을 옮기니 물 주전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쳐 버린 것 같았다.

닦을 기운도 없어 바닥에 고인 물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수면이 흔들렸다.

제왕안의 징조였다.

흔들리던 수면은 곧 잠잠해지더니 한 소년을 비추었다.

낯선 복장과 실바누스인과는 다른 이목구비.

검은 머리카락을 허공에 휘날리며 소년이 땅을 굴렀다.

그가 있던 자리에 마수의 발톱이 쿵,내리찍혔다. 그 한 번의 일격으로 땅이 패었다.

소년은 놀라지도 않고 지체 없이 일어나 땅을 찍은 마수의 다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키이이 이익!]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다른 쪽 발로 소년에게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간격 밖으로 몸을 물린 후였다.

아직 어린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판단력과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상대하기 에는 마수는 너무나 크고,또 수가 많았다.

소년이 차근차근 움직여 마수 한 마리를 무찔렀을 때, 그는 이미 예닐곱 마리의 마수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소년이 한 마리의 공격을 피하 며 검을 찔러 넣은 틈을 타 다른 마수가 작은 등을 노렸다.

거대한 마수의 이빨이 곧 소년의 등을 찢어 버릴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고열에 시달려 현실과 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서인지 아리스티네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

아리스티네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제왕안은 과거나 현재,미래를 수면에 비춰 보여 주지만, 실제로 그 상황과 아리스티네를 연결해 주는 건 아니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아리스티네의 손은 물만 튀기고 바닥을 짚는 것으로 끝나야 했다.

그런데 손이 수면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마치 그쪽으로 통하는 통로라도 되는 것처럼.

바닥에 고인 물은 야트막했고, 면적이 넓지도 않았다.

아무리 어린 아리스티네의 몸집이 작다고 해도 그 안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빨려 들어가듯 물속으로 사라졌다.

* * *

쿠응!

옆구리를 강타하는 충격에 소년의 몸이 붕 떴다.

갑자기 급소를 얻어맞아 밭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만약 마수의 공격이었다면 이런 둔탁한 타격이 아니라 살을 찢는 공격이었을 터다.

그는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

긴 금발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웬 여자애가 그의 허리를 꾹 끌어안고 있었다.

허공에 붕 뜬 상태라 곧 떨어

질 터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여자아이의 몸을 제 품에 끌어당기며 감쌌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 낙법을 펼 칠 순 없었다.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년 은 등으로 떨어지곤 몸을 굴렸다.

그와 동시에 소년이 원래 서 있던 자리를 마수의 날카로운 이빨이 할퀴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품 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 고개를 푹 묻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체격을 볼 때 아주아주 어린애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애가 몸을 던져 자신을 밀친 덕에 저 공격을 피한 것 같았다.

〈..............〉

그의 얼굴에 미심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런 애가 그냥 밀친 것도 아니고 허공에 붕 뜰 정도로 밀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소녀는 작고 가벼워서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거기다가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마수 평원에 대체 왜 이런 어린애가 있는 건지…….

소년은 며칠째 주변을 살피며 이동했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보질 못했다.

방금 전투할 때 역시 사방을 경계 중이었지만,사람의 존재감 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이 여자애는 공중 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一.

그때 소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생김새에 소년의 눈이 커졌다.

〈피해.〉

소녀가 말했다.

그 말을 머리 로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소년은 소녀를 꽉 끌어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마수의 발톱이 ‘파바바박!’ 땅 을 헤집었다.

〈오른쪽.〉

소녀가 속삭였다.

소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왼쪽으로 피했다.

〈앞이랑 뒤에!〉

그는 소녀를 안은 손에 바짝 힘을 주고 몸의 탄성을 이용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마수들과 거리감이 생겼다.

혼자서도 마수들을 상대하기 힘든데 어린애를 끌어안은 채 싸울 순 없다.

지금도 반격은커녕 회피하기 바쁘지 않은가.

일단 자리를 피하고 이 여자애 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이곳에 안전한 곳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소녀를 안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잡힐 거야.〉

소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년은 소녀의 말간 눈을 바라 보았다.

이상하게도 마수들의 움직임이 빠르니 곧 따라잡힐 가능성이 크다는 뜻 같지 않았다.

마치 곧 닥칠 미래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그랬다.

마수의 움직임을 보고 공격할 곳을 말하는 게 아니라,꼭 움직임을 먼저 읽는 것처럼…….

〈날 버리고 가.〉

소녀의 말에 소년의 생각이 툭 끊겼다.

자신이 들은 말이 맞나 생각하며 소녀를 내려다봤다.

소녀는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어린애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소년 역시 그 나이 또래 같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곤 했지만 이 여자애는 더했다.

이 어린 여자애는 진심으로 자신을 희생해 살아남으라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으르렁거리듯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어차피 수상하다고 생각하잖아.〉

그 말에 소년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입 다물어. 혀 씹는다.〉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속력을 높였다.

뒤쫓아 오는 마수들과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잠시 굳은 표정의 소년 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예지처럼 눈앞에 떠 오르던 영상들이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꽉 틀어쥐 었다.

원래 제 머리카락은 은발이었다.

‘내 몸인 것 같긴 한데

보이진 않지만 눈,코,입이 어 색함 없이 달려 있을 곳에 제대 로 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팔다리 역시 길이도 모양도 익 숙했다.

‘역시 꿈인가.’

아니면 제왕안의 소유자인 만큼 주마등 대신 뭔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사후 세계일지도 모르지.

애초에 수면 거울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온몸이 가벼웠다.

머리를 돌로 찧는 것 같은 고 통도,팔다리를 갉아먹는 것 같

은 아픔도 다 사라졌다.

그토록 아팠던 게 거짓말처럼.

혹은 지금 이 순간이 거짓말처 럼.

아리스티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달리고 있었다.

‘날 놓고 가는 편이 훨씬 생존율이 올라갈 텐데.’

아무리 마수와 거리가 벌어지 고 있어도 소년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소년이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아리스티네는 그가 누르는 대 로 몸을 숙이면서도 입을 열었다.

〈기척이나 냄새로 들킬 거야.〉

이건 눈앞에 미래가 떠오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쉿.〉

소년이 아리스티네를 몸으로 덮듯이 감쌌다.

그리고 그 위로 황금빛 오러가 엷게 퍼졌다.

오러로 기척을 차단하는 것인 듯했다.

아리스티네는 놀란 눈으로 소 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몸집이 컸지만,얼굴에 는 아직 엣된 티가 남아 있었다.

인종이 달라 정확히 알 순 없 었지만 그렇게 나이가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오러라니.

엄청난 재능이었다.

아까 마수들과 싸울 때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아 몰랐다.

이윽고 마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왔던 길을 그대로 달렸다.

바위 바로 옆을 지날 때는 땅 이 진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마수들은 바위 너머에 숨은 인간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수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 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년 은 오러 방어막을 거뒀다.

그는 조금 피로한 기색이었다.

〈괜찮아?〉

아리스티네의 물음에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여유를 두고 두 소년 소녀의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눈에 담은 채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소녀는 초원의 잔디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누워 있었고,소년은 그녀를 보호하듯 그 위에 낮 게 엎드려 있었다.

긴장해 떨린 호흡이 나왔다.

소년도,소녀도 이렇게 가까운 간격에 타인을 들인 것은 처음 이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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