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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20화 (120/183)

120화

소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다에는 사람을 흘려 깊은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는 세이렌이란 마수가 있다고 들었다.

그 마수가 혹시 평원에까지 나타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생각.’

그는 제 판단을 그렇게 일축하 고는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까도 느꼈지만,오밀조밀하니 섬세한 생김새는 확실히 이국적 이었다.

아이루고인과 달리 열은 머리 카락 색도 그랬다.

‘타국인인가? 혼혈하고는 또 다르네.’

그는 왕후와 왕후의 아들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타국인이 마수 평원에서는 대체 뭘 하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획,하고 갑자기 여기 오게 돼서…….)

〈조금 더 그럴듯한 변명을 하 는 게 낫지 않아?〉

〈아니,진짜인데…….’

소녀는 우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며 말하

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 고 낯설었다.

〈근데 내가 너 구해 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나 추궁하는 거야?〉

우물우물 시선을 피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소녀의 모습에 소년은 픽 웃었다.

〈나도 널 구해 줬잖아.〉

〈뭐,그럼 서로 도와줬으니 서로에게 좋은 사람인 걸로.〉

〈쪼끄만 게 말은 참 잘하네.〉

소년이 픽 웃었다.

입 근육이 위로 올라가는 느낌 이 생경했다.

제 입매를 쓸어 보던 소년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비께서 돌아가신 후 쫓겨나 둣 마수 평원으로 들어온 지 벌써 열흘.

당연히 그간 웃은 적 따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건 마수 평원에 들어오 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미소라는 게 이렇게 쉽게 나오는 것이었다니.

이 아이가 그와 아무 상관도 없는,서로의 정체조차 모르는 완전한 타인이기에 가능한 걸까?

낯선 이가 이렇게 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니.

완전한 타인이기에 더 편히 느 끼는 것은 아리스티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나 제왕안,그녀의 입지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라는 것에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어 그녀조차 지고 있는지 몰랐던 짐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다.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어린애답지 않게 침착 했지만 몸집을 봤을 땐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타국인들은 작은 편이라 들었으니 어쩌면 한두 살 더 많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린아이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 이 뒤늦게 들었다.

‘친절해 본 적이 있어야 어떻 게 대해야 할지 알지.’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타국인이 마수 평원에서 뭐 하는 거냐는 추궁이 적절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최대한 친절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너 근데 몇 살이냐?〉

물론 결과는 친절은커녕 여전 히 추궁하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열둘.〉

생각지도 못한 나이에 소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아리스티네의 질문에 소년은 잠시 침묵하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비슷해.〉

〈나보다 더 많을 줄 알았는 데.〉

아리스티네의 말에 소년은 뜨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비슷하다고 했지 똑같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많아?〉

〈뭐…….〉

〈그렇구나.〉

소년은 슬쩍 소녀의 눈을 피했다.

일단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자기 입으로 긍정한 건 아니니까.

그는 몸을 일으켜 바위에 기댄 채 털썩 주저앉았다.

아리스티네 역시 바닥에 눕다시피 했던 몸을 일으켜 그 옆에 앉았다.

〈조금 쉬었다가 성벽까지 데려 다줄게. 국경 수비대도 너 같은 어린애는 집을 찾아 주려 할 테 니까.〉

〈넌?〉

〈어?〉

〈너도 어린애잖아. 집에 가야지.〉

〈누굴 어린애 취급 하는 거냐.〉

소년이 발끈해서 말했지만 아리스티네는 피식 웃었다.

〈나랑 나이 비슷하다며. 나보곤 어린애라더니.〉

그 말에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자세히 보니 소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승리감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 복수인 듯했다.

소년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여자애는 처음이다.

〈아무튼 너도 돌아가야지. 여기 위험해.〉

아리스티네가 표정을 바꿔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눈앞에 환영처럼 무서운 마수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게 가까이 다가올 미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었다.

〈수비대에게 가 봤자 소용없어. 난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소년은 아리스티네를 돌아보았다.

아리스티네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무릎을 모은 채 끌어안고 있었다.

소년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푸른 하 늘이 맞닿은 지평선이 보였다.

마수가 가득한 곳이지만 이렇 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두 소년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 지 않고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처음으로 자신 과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는 기묘한 동질감 역시 함께 느끼고 있었다.

* * *

아리스티네는 눈을 떴다.

머릿속에 펼쳐진 과거의 기억에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꿈인 줄 알았는데…….’

열병에 들떠 자신이 살아 있는 지 죽은 것인지도 몰랐던 상태 였다.

끔찍한 고열이 내렸을 때,아리스티네는 여전히 유폐당한 곳에서 홀로 누워 있었다.

힘없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보 니 이불 한 귀퉁이가 젖어 있었고 물 주전자가 쓰러진 채였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짚었다.

찰박,물이 옆으로 밀려나며 서늘한 바닥이 손바닥에 닿았다.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평소처럼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였다.

꿈속에서 자신은 은발이 아닌 금발이었고,눈동자 색은 보라색의 보색인 연둣빛이었다.

거기다가 예지라는 능력도 있었다.

그래서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다른 존재가 되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원래 꿈에서는 자신이 상상한 게 보이지 않는가.

그 예지라는 것도 사실 꿈속의 자신이 상상한 게 그대로 일어 난 것뿐이리라.

아픈 와중에 별 꿈을 다 꾼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잊었다.

잊으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 꿈을 기억하는 만큼 현실이 너무 차갑게 느껴져 서.

꿈속에서 아리스티네는 소년과 투닥대며 말다툼을 하기도 했고, 나무 열매를 따 먹기도 했고,토끼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많았던 일은 마수에게 쫓겨 다녔던 일이었지.’

하루라도 안전하다고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밤에 마수들의 눈을 피 해 옹송그리고 누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시간이 그리웠다.

소금을 흩뿌린 것처럼 무수하게 펼쳐진 밤하늘의 별.

유폐당한 채 높다란 벽에 가로 막힌 조그마한 하늘을 보며 살았던 아리스티네가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었다 면……’

아리스티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전하?”

빠르게 방 밖으로 나오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궁인들이 놀라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아리스티네는 단 한 번도 발걸 음하지 않았던 갤러리에 들어갔다.

온갖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었 지만,아리스티네가 보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기다란 갤러리 회랑을 지나 안 쪽 문을 열자 그곳엔 타르칸의 사진과 초상화가 가득 걸려 있 었다.

아리스티네와 찍었던 결혼사진 부터 시작해서 아주 오래전의 사진까지.

한쪽 벽면에 커다랗게 걸린 사 진 앞에서 아리스티네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곳엔 어린 소년이 뚱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히 아리스티네의 기분을 살피던 궁인이 입을 열었다.

“타르칸 전하께서 첫 원정을 나가셨으니 불안하신 마음은 저희도 잘 압니다. 하지만 보세요. 타르칸 전하께서 얼마나 늠름하신지. 이 사진은 열 살 때 대마수 무르지카를 쓰러트리고 난뒤,귀환하셔서 찍은 사진이람니다.”

아리스티네에겐 그 말이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처음에는 잘 인지되지 않았지 만,해변으로 밀려와 차가운 바 닷물이 발을 적시고 나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아리스티네가 천천히 궁인을 돌아보았다.

“……열 살 때 대마수 무르지카를 쓰러트렸을 때의 사진이라고?”

“예,비전하.”

궁인이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아리스티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꿈속에서 보았던 소년과 모습이 똑같았다.

조금 반항적인 시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굳게 다문 입매도.

“열두 살보다 많다더니…….”

궁인의 반문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동시에 명료하기도 했다.

홀로 대마수를 상대하러 간 타르칸을 돕기 위해선 해야 할 준비가 산더미였다.

하지만 그 전에.

“차 한 잔을 마셔야겠어.”

“예,비전하.”

궁인들은 안도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타르칸이 떠난 후부터 아리스티네의 상태가 심히 좋아 보이 지 않았던 차다.

오늘은 또 대장간에서 갑자기 눈물을 보이셨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심장이 내려앉던지.

그런데 지금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당당히 정면을 응시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마시면서 타르칸의 첫사랑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남편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왕자비의 폭탄 발언에 궁인들의 미소에 쩌적 금이 갔다.

환하게 웃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이만큼 부담스러워 보였던때가 있던가.

그들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 * *

“비전하,첫사랑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풋사랑…… 아니, 소꿉놀이지요.”

“타르칸 전하께서 아주 어리셨을 때 잠깐 만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애일 뿐이에요.”

“아,이 만났다는 것은 말 그 대로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연인으로서 만났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고요.”

“저희도 정확하게 모를 정도예요. 실제로 그 소녀를 본 사람도 없고,타르칸 전하께서도 본인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성정은 또 아니시니……”

아리스티네는 궁인들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제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이 온 동네방네 들킬 정도로 열렬하게 그 소녀를 사랑했 나 보네.”

그 말에 궁인들은 눈앞이 아득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무,무슨 말씀을……”

“저희 뜻은 그게 아니라……”

“그것도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나와 결혼할 때까지 그 첫사랑을 그릴 정도였다고. 다른 여자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고 말이지.”

바들바들 떨면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던 궁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비,비전하 미천한 저희가 말 실수를……”

“차라리 화내 주십시오. 저희를 벌하세요.”

“그렇게 웃지 마시고……”

“아니,나는 진짜로 웃음이 나 와서 웃는 건데?”

아리스티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궁인들을 내려다봤다.

“나 전혀 화나지 않았어. 다들 왜 그래? 내가 듣고 싶어서 해 달라고 하는 거잖아. 좀 자세히 좀 말해 줘.”

궁인들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아리스티네를 보며 눈물을 뽑았다.

‘타르칸 전하 바보!’

‘왜 첫사랑 같은 게 있으셔선...........!”

‘전사분들은 왜 그때 그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궁인들을 손수 일으켜 세워 주며 아리스티네가 물었다.

“내가 하나 맞혀 볼까? 타르칸이 첫사랑을 시작한 건 아마 열 살 때지? 무르지카를 잡은 후 말이야.”

“그,그게……”

흔들리는 궁인들의 동공에서 긍정을 읽은 아리스티네가 고개 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타르칸도 참…. 조숙하다니깐. 열 살 때 그런 진지한 사랑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꼬리 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궁인들이 의아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화내시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진심으로 즐거워하시 는 것 같았다.

“저어,비전하?”

“화 안 나세요? 타르칸 전하의 그……”

“어머나, 내가 왜 화내. 그냥 귀여운데.”

“그,그렇군요.”

역시 높은 분들의 생각은 이해 할 수 없다.

‘이러실 거면 그날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던 거지.’

의문을 가졌으나 어쨌거나 너그럽게 넘어가신다니 궁인들도 기뻤다.

‘타르칸 전하께서 돌아오시는 날 재회의 뜨거운 밤을 보내실 수 있도록 우리가 힘내자!’

궁인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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