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타르칸은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 가 아니다.
긴장에 긴장을 더해도 부족한 때.
그 순간,타르칸의 감각에 무언가가 잡혔다.
온 신경을 기울여야 알 수 있 을 정도로 작고 약한 기척이었다.
마치 포식자가 사냥 전에 몸을 낮추고 숨죽인 것과 같은 기척.
‘오른쪽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오른쪽이야.〉
어린 소녀의 엣된 목소리.
오랜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목소리였다.
지체할 것 없이 타르칸의 몸이 왼쪽으로 굴렀다.
그와 동시에 그가 서 있던 곳 에 무언가가 후웅,하고 지나갔다.
묵직한 풍압이 잡초를 흔들었다.
너무 빨라 보통 사람의 육안에 는 그저 검은 무언가가 지나간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타르칸의 눈에는 똑똑 히 보였다.
집채만 한 마수가 앞발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러나 그 공격 이후로 마수의 모습은 사라졌다.
‘……골치 아프군. 방어막에 감각 교란 기능이 있는 듯한 데……’
대마수는 전부 방어막을 두르 고 있는데,그 특성이 각 개체마다 달랐다.
이 대마수는 감각 교란 특성이 있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기척이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다.
이 경우 해결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계속 공격을 가해 방어막을 깨는 것.
〈방어막을 깨는 건 체력 싸움이야.〉
언젠가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가 열 살 때 대마수 무르지카와 싸웠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당시 어렸던 타르칸과 마수가 체력 싸움으로 붙으면 결과가 어찌 될지 뻔했다.
〈다른 하나는 마수가 공격하는 순간을 노리는 것.〉
방어막이 쳐져 있는 상태에서는 공격을 할 수 없으니 공격할 때엔 순간적으로 방어막이 해제 된다.
이때를 노려 공격을 가하는 것 이다.
‘어떻게 할까.’
어렸던 타르칸은 마수가 공격 하는 순간을 노려 역공하는 방식을 택했다.
체력 싸움으로 흘러가 봐야 승 산이 없었고,무엇보다一.
‘공격이 어디에서 올지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소녀가 미리 짚어 주는 곳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다.
그 어린 여자애의 뭘 믿고 목숨을 건 전투에서 그렇게 의지 했는지.
만약 소녀가 한순간이라도 틀 리게 예측했으면 타르칸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소녀가 나타난다면 그녀 를 믿고 기꺼이 목숨을 맡길 것 이었다.
타르칸은 검을 바투 잡으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 타르칸 홀로 대마수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마치 미래를 보듯 말을 하던 그 소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 로.
날 선그의 감각에 대마수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크기가 얼마만 한지는 조금 전에 확인했어.’
타르칸은 대마수의 크기와 움 직임을 가늠하며 몸을 옆으로 물렸다.
기다란 발톱이 박힌 대마수의 앞발이 타르칸의 바로 옆을 스 치고 지나갔다.
타르칸은 마수가 앞발을 미처 회수하기 전에 황금빛 오러로 물든 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키 이 이 이 이익!
공기가 깨지는 것 같은 울음소 리였다.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멀리 푸드덕거리며 새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성난 대마수가 그대로 타르칸을 향해 돌진했다.
‘정면.’
타르칸은 땅을 발로 차 뛰어오 르며,언뜻 모습을 드러낸 놈의 앞발에 검을 찔러 넣었다.
우선 기동력부터 잃게 만드는 것이 좋으니까.
이번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 았다.
울음으로 인한 스턴효과가 타르칸에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신중해졌군.’
기척이 한층 더 낮아졌다.
‘뒤.’
〈뒤에서 와!〉
예전과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타르칸은 그때와 같이 몸을 낮게 숙이며 대마수의 공격을 피 하곤 아까 공격했던 앞발을 다시 베었다.
초록색 마수의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대마수의 발톱이 타르칸의 등을 노렸다.
타르칸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날카로운 대마수의 발톱 앞에 서 갑옷은 무력했다.
마치 종이가 찢겨 나가는 것처 럼 갑옷이 찢겨 나가고 드러난 옆구리가 베였다.
“크윽……
타르칸은 빠르게 몸을 물린 후 상처를 살폈다.
한순간에 찢기긴 했지만 그래 도 갑옷 덕에 상처가 깊진 않았다.
장기가 손상되진 않았다.
문제는 상처 면적이 꽤 넓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를 많이 흘려 체력이 부족해질 것이다.
그때,대마수가 앞발로 타르칸이 있는 곳을 내리찍었다.
‘광!’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패었다.
타르칸이 몸을 굴려 재빠르게 피하지 않았다면 파이는 건 땅 이 아니라 그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수의 내려찍기는 계 속되었다.
광! 광! 쾅! 광!
타르칸이 몸을 굴릴 때마다 옆 에서 땅이 터져 나갔다.
잡초 더미와 홁이 비산하다 우수수 멸어져 내렸다.
이대로 끝도 없이 구르며 회피만 할 순 없다.
타르칸은 한 번 더 구르며 검 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마수가 발을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검을 위로 치켜들 었다.
키이 이 이 이 이一!
마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 질렀다.
앞발을 관통할 정도로 검에 깊게 찔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타르칸은 놈의 앞발에 박힌 검을 회수했다.
팔에 계속해서 힘이 들어가면 서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푸숙 새어 나오길 반복했다.
그러나 타르칸은 멈추지 않고, 놀라 앞발을 쳐든 대마수의 앞 다리를 노렸다.
일 타,이 타.
날카로운 울림과 함께 세 번째 공격이 막혔다.
방어막이 쳐진 것이다.
타르칸은 지체 없이 몸을 물렸다.
대마수 역시 마찬가지로 훌쩍 물러나는 것이 피의 궤적으로 보였다.
초록색 피가 바닥에 흩뿌려지 는 것을 보고 타르칸은 거리를 가늠했다.
대마수도 그렇지만 그 역시 상당한 양의 피를 흘렸다.
‘젠장,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군.’
타르칸이 혀를 찼다.
상처를 입은 채 땅바닥을 정신 없이 구르고 공격까지 했으니 옆구리가 시뻘건 피로 홈책 젖 는 게 당연했다.
타르칸은 품에서 지혈 가루를 꺼내 상처 부위에 뿌렸다.
흐르던 피가 몽글몽글 뭉치더니 상처를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지혈되는 시간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대마수가 아까 앞발을 내주며 반격했던 것처럼 제 살을 깎아 먹으며 공격한다면…….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봤어. 네가 이겼어.〉
속삭이던 목소리.
무르지카와 싸울 때는 이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지금의 타르칸에 비교하면 열 살 때의 그는 경험도 적은 애송이였으니까.
‘그래,할 수 있어.’
타르칸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자신을 희생해 전사들을 살리고 죽을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죽는 건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타르칸은 대마수를 무찌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리스티네에게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빨리 가겠다고,기다리라고 했는데 무책임하게 아내를 두고 죽을 순없다.
타르칸의 검에 맺힌 오러가 더 강해졌다.
그의 몸이 마치 쏘아지듯 튕겨 나갔다.
비록 감각을 교란시키는 방어 막에 가려져 있지만,타르칸에겐 상처 입은 대마수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왼쪽이야.〉
〈거기서 뒤로!〉
〈안 돼! 숙여야 해.〉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오래된 기억의 파편일 뿐이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재현되는 기억.
그러나 타르칸은 마치 그 때처럼 그 애가 함께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열기로 후끈거리는 몸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땀방울이 흘러내 렸다.
황금빛 눈동자에 포식자다운 안광이 어린다.
어깨에 대마수의 이빨이 스쳐 지나가고 허벅지에 발톱이 박혔다.
그러나 타르칸의 움직임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제 됐어. 안으로 들어가.〉
타르칸은 상처 입는 것도 주저 하지 않고 대마수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앞발이 너덜너덜해져 대 마수의 속도가 현저히 낮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신을 감싼 황금빛 오러가 찬 란하게 빛났다.
아예 검날 자체가 황금으로 보 일 정도로 밀도 있는 오러였다.
그리고 그 황금빛 검이 정확하 게 대마수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대마수가 펄떡 몸부림쳤지만 그게 한계였다.
끄르륵,피거품이 끓는 목울음 소리와 함께 결국 마수의 몸에 서 힘이 빠져나갔다.
타르칸은 그걸 확인하고 천천 히 마수의 목덜미에서 검을 빼내었다.
이겼다.
그는 전투의 흥분감으로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대로 뒤 를 돌아보았다.
그 언젠가 대마수 무르지카를 쓰러트린 뒤,어린 그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전투의 흔적만 가득한, 텅 빈 공터를 확인한 그의 입매가 서서히 굳었다.
쿵쾅거리며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이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그때도 그랬다.
간격 안으로 들어가라는 소녀의 말에 타르칸은 그대로 따랐다.
누가 봤다면 자살하냐고 할 정 도로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타르칸은 그녀를 믿었고,그 결과 그는 승리했다.
승리의 기쁨을 안고 소녀가 있던 곳을 돌아본 순간.
그를 맞이한 건 아무도 없는 빈 공터였다.
몇 날 며칠을 함께한 소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평원을 이 잡듯 뒤지며 찾아보아도 그 소녀를 다시 볼 순 없었다.
“하……”
타르칸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정말로 함께 있기라도 했지,지금은 그저 비슷한 상황에 기억이 떠오른 것뿐이다.
그런데 왜 돌아본 건지.
과거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다.
이 순간에도 과거가 그의 가슴 에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막을 수도 없이,그의 세상이 마치 그때 멈춘 것처럼.
시야가 어지러웠다.
눈가를 훔치니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정신없이 구르며 싸우는 와중에 여기저기 깨지고 찢긴 모양이었다.
타르칸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어쨌든 그는 살아남아 승리했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아리스티네에게.
그의 아내에게.
타르칸은 왼쪽 가슴께를 더듬었다.
그곳에 있는 사진의 감촉을 조 금이라도 느끼겠다는 둣.
차마 피 묻은 손으로 사진을 만질 순 없었다.
과거로 기울었던 시간의 축이 다시 현재를 향해 똑바로 섰다.
그렇게 타르칸이 대마수의 사체 앞에서 뒤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위험해!”
커다란 외침.
타르칸은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고 대마수를 돌아보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마수의 육중한 꼬리가 그를 향해 날카로운 침을 세우고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내리 찍는 속도도 다 죽어간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타르칸은 발검을 하면서도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날카로운 꼬리의 침에 자신의 배가 꿰뚫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그의 앞에 벽이 솟아났다.
아니,벽이라고 부르기엔 명치까지밖에 안 올 정도로 낮았다.
‘방책?’
타르칸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발검을 그만두고 몸을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찰나,
〈이쪽이야!〉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선명한,공기를 울리는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이쪽이야!”
타르칸이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부신 은발, 손짓하는 하얀 팔,대마수 앞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똑바로 응시하는 보랏빛 눈동자.
시간이 갑자기 천천히 가는 것 처럼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사람의 모습에 타르칸은 아직도 제가 기억 속에 머물러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타르칸!”
자신을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귓가에 닿았다.
그 선명한 현실감에 타르칸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디선가 보았던 장면이 현재와 겹쳤다.
먼 옛날,마수 평원에서 바위 뒤에 숨어 그에게 손짓하던 아이의 모습.
지금 아리스티네의 은발이 휘날리는 것처럼 아이의 금발이 휘날렸었다.
대마수를 쳐다보고 있던 아리스티네가 시선을 돌려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새벽하늘 같은 보랏빛 눈동자 가 오릇이 타르칸을 담는다.
아이의 새순 같은 연녹빛 눈동 자가 그랬던 것처럼.
전혀 다른 빛깔이었다.
그러나 같았다.
똑같이 투명하고,맑고,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동자.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주친 순간,타르칸은 깨달았다.
너 였구나.
처음부터 항상,언제나 너.
“찾았다.”
그가 그의 사랑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듯이.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