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것은 직감이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확실하고 선명한 감각이 었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뒤섞여 파도치는 가운데 타르칸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왜 몰라봤을까.
아니,사실은 알아봤다.
몇 번이나 아리스티네에게서 그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전혀 닮지 않았다고 억지로 생각하곤 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부둥켜안았다.
무수한 말이 가슴속에서 부풀어 올랐으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다 터져 버렸다.
“타르칸.”
“리네.”
떨리는 음성으로 서로의 이름만 겨우 부른 채 뜨거운 온기를 나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마치 몇 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온기가 그립고 아련하고 애틋했다.
타르칸의 품에 푹 파묻혀 있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었다.
타르칸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한 채 잠시 서 있었다.
이윽고 타르칸이 천천히 고개 를 숙였다.
그에 맞춰 아리스티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떨리는 호흡이 먼저 닿고 그 직후 두 사람의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키 이 이 이익一!!
대마수가 울부짖었다.
위협적인 꼬리가 두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타르칸은 반격하는 대신 아리스티네를 감싼 채 몸을 낮췄다.
콰앙!
대마수의 꼬리가 두 사람의 앞 에 자리한 방책에 가로막히며 굉음이 터졌다.
키 이 이 이 이 이!
마수의 거친 울음이 귀청을 찢 을 듯했다.
왠지 모르지만 타르칸과 싸울 때보다 더 화가 난 듯했다.
방책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대마수의 공격을 버티다니 생 각보다 더 단단하군.’
타르칸은 감탄하며 아리스티네 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기에 숨어 있도록 해. 놈의 숨통을 끊고 올 테니까.”
“조심해.”
아리스티네의 말에 타르칸이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 었지만,아까 방심해서 위험할 뻔한 모습을 보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아내에게는 멋진 모습만 보이 고 싶었던 그로서는 조금 머쑥 했다.
“걱정 안 해.”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리스티네가 말했다.
“나는 알아. 네가 이길 거라는 걸.”
〈나는 봤어. 네가 이겼어.〉
아리스티네의 목소리에 먼 옛날 들었던 목소리가 겹친다.
그때와 똑같이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와 모든 것이 같았다.
타르칸은 그땐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하고 싶었던 것을 했다.
그의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입술에 닿았다.
찰나라고 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아리스티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조금 유쾌한 기분으로 바라보며,타르칸은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대마수와 싸우며 타르칸 역시 적잖은 상처를 입었지만,그 어 느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정신도 맑고 몸 안의 오러도 용솟음치둣 활력 있게 기혈을 질주했다.
황금빛 오러가 그의 검에서 뿜 어져 나오며 단단한 껍질에 감싸인 대마수의 꼬리를 베었다.
키 이 이이 익!
대마수가 비명을 질렀다.
초록색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대마수는 최후의 발악을 하듯 잘린 꼬리를 휘두르며 몸을 뒤틀었다.
지축이 혼들릴 정도로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타르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 게 선 채 대마수를 정면에서 마 주했다.
타르칸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황금빛 오러가 그의 검신을 물들이고,이윽고 그의 몸까지 물들였다.
마치 검과 몸이 하나가 된 둣 한 모습이었다.
금빛 검이 정확하게 대마수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마수가 앞발을 들어 올렸지만 타르칸이 더 빨랐다.
검 끝이 대마수의 미간에 닿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서걱一.
검이 부드럽게 대마수의 미간 을 파고들었다.
대마수의 거대한 몸체가 부르르 떨렸다.
시뻘건 눈이 타르칸을 향한다. 쿵!
허공을 할퀴던 앞발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타르칸은 천천히 대마수의 미 간에서 검을 빼내었다.
천천히,대마수의 몸이 기울었다.
이겼다.
이번에야말로 끝이 났다. 타르칸이 뒤를 돌아보았다.
열 살의 그날처럼, 혹은 조금 전처럼.
아무도 없었던 그때와 달리 아리스티네가 방책 위로 몸을 내민 채 서 있었다.
“타르칸.”
그를 부르는 음성.
그래,이걸 보고 싶었다.
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때도,아까도,지금도.
타르칸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그의 아내에게로,첫사랑에 게로 달려갔다.
가녀린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타르칸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이마 할 것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리네.”
“응.”
“리네.”
“응.”
존재를 확인하듯 몇 번이고 그 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이렇게나 가슴을 울릴 수는 없다.
“리네.”
계속 반복되는 부름에 아리스티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그녀의 팔이 타르칸에게로 뻗어지며 그의 목을 감쌌다.
순식간에 타르칸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숙여졌다.
아리스티네가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아리스티네는 금방 발꿈치를 내리며 입술을 뗐다.
“넌 너무 말이 많아.”
아리스티네가 발긋한 얼굴로 타르칸을 부루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이럴 땐 그냥 키스하면 되는 거야.”
그 말에 타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리 없는 신음이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이 여자는 어디까지 자신을 자극해야 만족하는 걸까.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은 이미 아리스티네의 입술에 맞닿아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감싼 타르칸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밀착 한다.
뜨거운 입술이 비벼지고 숨결 이 섞여들었다.
타르칸의 혀가 아리스티네의 입 안으로 파고들며 구석구석을 탐하듯 맛보았다.
고른 치열과 부드러운 잇몸 안 쪽,그리고 자그마한 혀.
움찔,아리스티네의 손이 타르 칸의 옷깃을 찢을 듯 움켜쥐었다.
혀와 혀가 얽히며 숨이 가팔라 진다.
타르칸의 커다란 손이 아리스티네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파 고들었다.
“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키스가 끝났다.
아쉬운 듯 붉게 젖은 시선이 서로를 향한다.
“리네.”
타르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 져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어쩐지 오싹한 느낌에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타르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리다가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심장이 터질 듯 쿵광거렸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타르칸의 손가락이 아리스티네의 튜닉 끈을 잡았다.
스르륵,끈이 힘없이 당겨지며 매듭이 풀렸다.
그 순간.
히 이 이 잉!
갑자기 들린 높다란 말 울음소리에 두 사람 모두 뻣뻣하게 굳 었다.
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타르칸의 군마가 말굽으로 땅을 팠다.
순박한 말의 눈동자가 미풍양 속을 해치는 자신들을 비난하는 듯했다.
아리스티네는 서둘러 타르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타르칸은 멀어지는 온기를 허 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획 고개를 돌렸다.
생사를 함께한 애마를 바라보는 눈이 마치 철천지원수를 바 라보는 것과 같았다.
군마는 푸르르,콧방귀를 뀌며 불만스레 발을 굴렀다.
타르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그는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응,잠깐만.”
아리스티네가 설치했던 방책 두 개를 조작하자 크기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방책을 바라보다가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재회의 기쁨과 아리스티네가 첫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기쁨 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설마 고작 그거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거야? 호위는? 아니, 호위가 있어도 문제지.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너를 데리고 이런 위험한 곳에一.”
“고작이라니. 이게 네 목숨을 구해 줬는데.”
아리스티네가 입술을 비죽였다.
“아리스티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거칠게 돌려세우며 외쳤다.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라,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랐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너 진짜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타르칸 의 표정이 너무 절박하고 아파 보여 아리스티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나는.......”
타르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 고 고개를 숙였다.
이 커다란 남자가 이렇게나 작아 보일 수 있다니.
“괜찮아.”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대마수를 무찌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타르칸은 가만히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스티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신뢰가 가득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저 타르칸을 믿기에 그가 승리할 줄 알았다는 뜻 같진 않았다.
옛날처럼 아리스티네가 미래를 예지한 걸까?
그 특이한 능력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지만 일단 지금은 다른 전사들과 합류하는 게 먼저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안아 군마 위에 태웠다.
그 역시 위에 오르자,영리한 군마는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 *
“비전하!”
“어디 계십니까!”
“비전하!”
대마수의 영역 안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대한 숨을 죽여 대마수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게 그나마 살아 남는 방법이다.
하지만 자칼렌을 비롯한 전사 들과 국경 수비대, 대장장이들과 마법사들은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마수와의 조우가 두렵지도 않은지,아예 넓게 퍼져 사방을 오갔다.
사라진 왕자비를 찾기 위해서 였다.
“아직도 반응이 없소?”
자칼렌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일단 범위 내에 잡히는 건 없어요.”
수색 마법을 펼치던 아세나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아까 마수들을 쫓는 공격부터 시작해 쉬지 않고 마력을 사용해 피곤했지만 그녀는 캐스팅을 멈추지 않았다.
“비전하의 걸음으로 이보다 더 멀리 나가진 못했을 거요. 홀로 나가셨다면 진작에 발견되었어 야 하는데……”
자칼렌이 이를 사리물었다.
아리스티네의 걸음으로 갈 수 있는 범위는 전부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대마수는 모습을 숨길 수 있으니……”
“하지만 왜 비전하만 데려갔을 까요?”
다른 인간들은 공격하지 않고 아리스티네만 데려간 건 확실히 이상했다.
아니,사실 데려갔다는 건 희 망 사항이다.
잡아먹혔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입 밖 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리스티네만 잘못되었다는 건 대마수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그 희망을 안고 이들은 수색 중이었다.
그때였다.
아세나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 렸다.
자칼렌이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물었다.
“뭔가 잡혔소? 비전하요?”
“아니요. 비전하라고 하기엔 접근 속도가 너무 빠른데……”
그 말에 사람들이 긴장했다.
대마수의 영역에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무언가.
어린아이라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칼렌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도망치고 싶은 자는 도망쳐도 상관없다!”
원래라면 자칼렌이 먼저 퇴각 을 명했을 것이다.
대마수와 붙어 승산은 없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살아 있 을지도 모르는데 이곳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무의미한 희생 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엔 전사들뿐만 아니라 전 투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까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자칼렌의 예상과 달랐다.
“무슨 말씀입니까,장군!”
“비전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지 모르는데 어찌 떠난단말입니까!”
“부끄럼 없이 용맹하게 살 것 입니다!”
“아,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아세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스태프 아래에서는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도망은커녕 대규모 공격 마법을 준비 중인 모습이었다.
“오기 싫었다면서요?”
검을 바로 잡은 리트텐이 픽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요.”
아세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 었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윽고 저 멀리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원을 거칠게 밟으며 달리는,
강인한 네 다리.
그리고 그 위엔…….
“비,비전하?”
“주군?!”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존재 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밤 주군의 천막 안에서 어떤 역사적인 일이 일어날지.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