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화
그날 밤,조출한 연회가 열렸다.
사라졌던 왕자비도 무사한 데다가 타르칸이 대마수를 또 한 번 쓰러트렸으니 축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방벽 안에서 사람들은 그간의 시름을 잊고 잔을 부딪 치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이야,비전하께서 주군을 위해 이 위험한 곳까지 오셨다니. 그 것도 탈리스탄 백작님을 설득해서 국경 수비대까지 끌고요.”
“역시 우리 비전하께선 대단하 십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어떻게 통신이 두절된 것만 보고 우리가 대마수의 영역으로 퇴각할 거라는 생각을 하셨는지.”
“영민하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부부라 통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워낙 금슬이 좋지 않습니까.”
불과한 얼굴로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떠들었다.
그런데 막상 연회의 주역인 타르칸과 아리스티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마수와의 전투로 쌓인 피로를 이유로 타르칸이 먼저 퇴석했기 때문이다.
퇴석하는 그의 손이 아리스티네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국경수비대와 함께 신관이 온 덕분에 타르칸의 상처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신관에게 축복을 거듭해 받은 데다가 평소 타르칸의 체력을 생각해 봤을 때 피로를 이유로 자리를 뜨는 건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하물며 타르칸은 자신의 상태 에 대해 겉으로 내색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도 괜찮아 보여서 멀쩡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내상을 입은 걸 알게 되어서 휘하의 전사들이 기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타르칸이 몸이 안 좋다며 피로하다고 자리를 뜨다니.
궁인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응힉힉,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모두 타지에 외롭게 나와 있는 데 혼자 아내랑 손을 꼬옥 잡고 연애하는 모습이 눈꼴시었긴 하지만 충심이 강한 전사들은 다들 못 본 척해 주었다.
솔직히 매일 밤 실물도 아니고 사진에 뽀뽀하던 주군이 짠했던 차다.
‘해후하셨으니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겠지.’
마수만 없다고 하면 평원의 밤은 낭만적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태고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곳.
가을의 달은 한층 더 환하고 풍요롭게 세상을 비추고,쏟아져내릴 듯 가득한 별은 하늘을 화 폭 삼아 별자리를 그렸다.
달콤한 평원의 향기가 가슴을 가득 채우면 괜히 전사들까지 감상적이 되곤 했다.
풀밭 위에 나란히 누워 달도 보고 별도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면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추억이 될 것인가.
‘떠나기 전에 우리가 실수했던 것도 있으니까……’
자칼렌은 술로 입술을 축이며 생각했다.
괜히 주군의 첫사랑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두 분의 사이만 어색하게 만들었다.
어쩌나 걱정했는데 비전하께서 이렇게 도와주러 오신 걸 보니 전부 잘 해결될 것 같았다.
‘솔직히 비전하께 미움받고 있었을 때 주군은……’
자칼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출정식 때 단상 위에서 본 두 분의 모습이 괜찮아 보여서 잘 풀렸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마수 평원에 나온 뒤 타르칸은 매일매일 혼자 쭈그려 앉아 아내의 사진을 보며 중얼중얼 사과의 말을 내뱉곤 했다.
보고 있는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맹세컨대 주군을 모시며 그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물론 그 안쓰러움은 아내의 사진에 쪽쪽, 뽀뽀하는 순간 와장창 깨졌지만.
밤에는 그런가 하면 낮에는 악귀가 따로 없을 정도로 마수들을 학살했다.
그건 말 그대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일반 전사들은 타르칸의 카리스마에 열광하며 사기를 얻었지만 사정을 아는 이들의 시선은 착잡했다.
아내한테 미음받는다는 분노를 왜 상관없는 마수한테 푸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칼렌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더랬다.
어쨌거나 덕분에 원정 일정은 예상보다도 훨씬 빨라져서 이대로라면 귀환이 앞당겨질 예정이었다.
물론 다른 사단과 통신이 두절 되면서 일이 꼬여 어떻게 할지 앞으로 생각을 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지금쯤이면 주군과 비전하께서 달을 보고 계시겠지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 가 많겠지요.”
“저는 여자 친구가 생기면 밤에 손잡고 달 보며 산책하는 게 꿈이었지 말입니다.”
커다란 성인 남자 전사가 술에 취한 건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얼굴을 붉힌 채 “이 별은 네 별, 저 별은 내 별……” 하며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못 볼 것을 봤다며 고개를 돌렸겠지만 지금은 다들 술에 취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오히려 아세나는 깔깔 웃으며 별을 같이 세어 주고 있었다.
“사실 마수 평원의 풍경을 따 라올 곳이 또 있습니까.”
“두 분께서 잘 화해하셨으면 좋겠네요.”
조금 배가 아프긴 했지만,그 들은 달빛이 내리쬐는 풀밭 위 를 걷는 왕자 부부를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천진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왕자 부부가 향한 곳은 달빛 아래가 아닌,달빛조차 내리쬐지 않는 완벽한 밀실이었기 때문이다.
* * *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법등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저절로 켜졌다.
이중으로 된 두꺼운 천이 내려 가고,시끄러웠던 바깥의 소음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문득 타르칸과 둘만 있다는 사 실이 의식되었다.
깨닫는 순간 순식간에 감각이 예민해졌다.
맞닿은 손바닥.
얽힌 손가락.
그 사이사이의 민감한 살갗.
그럴 리가 없는데 타르칸의 손 가락의 지문까지도 다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스쳐서…….
흑, 그에게서 불의 기운을 담 은 냄새가 끼쳐 왔다.
목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아 아리스티네는 입술을 한 번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이,일단 앉을까? 피곤하다고 했지?”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가며 손 을 떼는데 타르칸이 비틀거리며 휘청였다.
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라 다시 그에게 바짝 붙으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응.”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감싸며 답했다.
제 어깨를 감싸는 손이 묘하게 뜨거워서 아리스티네는 움찔했다.
뿐만 아니라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타르칸.
타르칸이 왜 그러냐는 듯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불편한 둣 그의 미간에는 한 줄의 금이 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선을 내렸다.
‘나도 참……’
타르칸은 그저 부축받기 위해 어깨를 잡은 것일 뿐인데,그걸 묘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분명 천막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던 것 같은데……’
뭐,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애써 괜찮은 척한 것 아니겠는가.
“앉아 봐. 상태를 보고 군의관이나 신관을……”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의자 쪽으로 데려가는데 그가 윽,하고 중심을 잃었다.
앗,하는 순간 아리스티네는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다.
다행히 타르칸이 곧바로 다시 중심을 잡아 한데 엉켜 쓰러지진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도의 한숨을 휴,하고 내뱉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타르칸을 부축하고 있는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뭔가…….
‘따끈따끈하고 매끈매끈하고 손 바닥에 착 감기는 것이……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제 손으로 향했다.
착한 손은 여전히 타르칸을 부축하고 있었다.
문제라면 부축한답시고 잡은 곳이 타르칸의 빵빵한 대흉근이라는 것이지.
갑작스럽게 무게가 쏠리면서 자세가 무너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게 잡는다는 게 그만 좋은 곳을…….
‘아니,좋은 곳이 아니지! 안 좋은 곳!’
뭐, 어쨌든 안 좋은 곳을 잡아 버렸다.
아까의 휘청거림 때문인지 타 르칸의 옷깃이 더 벌어져 있었다.
‘아니,원래도 가슴이 드러나도록 벌어져 있던 옷인데 더 벌어 지면 어떻게 해!’
아리스티네의 눈에 번민이 한 가득 차오르며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녀는 애써 빵빵한 가슴에서 시선을 떼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서 빨리 타르칸을 내려놓고 떨어져야 했다.
안 그러면 진짜 위험하다.
‘내가! 타르칸에게!’
상식이 다소 부족하긴 해도 어쨌거나 아리스티네는 태생부터 지체 높은 황녀였다.
환자를 덮치는 파렴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확 밀리는 바람에 아까 목표했던 의자에서 멀어졌다.
솔직히 덩치가 훨씬 커다란 타르칸을 이끌고 다시 저쪽으로 가긴 싫었다.
“침대에 누울래?”
아리스티네가 가까워진 침대를 턱짓하며 물었다.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인지, 자유로운 나머지 한 손으로 입매를 가렸다.
아리스티네는 걱정스러운 눈으 로 타르칸을 바라보다가 부축하 는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바람에 타르칸의 대흉 근을 보다 더 진하게 느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진짜로 이건 불가항력이 라고.’
부축하느라 등과 앞을 동시에 잡아야 하는데 가슴팍이 다 훤 히 드러나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손바닥을 밀 어낼 듯 탄력 있는 가슴 근육을 계속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불가항력이야.’
아리스티네는 다시 한번 그렇 게 속으로 중얼거리곤 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부축하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타르칸이 가린 입매 사이로 피식 웃고 있다는 건 알 지 못한 채.
또 중심을 잃을까 걱정했는데 침대를 향하는 동안 타르칸은 단 한 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휘청거리기는커녕…….
‘무게가 줄어든 것 같은데? 걷는 속도도 빨라진 거 같고?’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거리 며 침대에 타르칸을 눕히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깍!”
침대에 몸을 누이다 힘이 빠진 것인지,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어깨에 팔을 얹은 그대로 침대 로 쓰러졌다.
아리스티네 역시 함께 침대에 쓰러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침대가 아니라 타르칸의 위로 쓰러진 것이 었지만.
아리스티네는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탄력까지 느 껴지는 타르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황당하긴 했지만,솔직히 이대로 얼굴을 계속 묻고 있고 싶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뺨을 비볐다가 핫,하고 정신을 차렸다.
‘안 돼. 환자를 상대로 이성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리스티네는 바보가 아니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침대에 나란히 넘어졌는데 정작 쓰러지고 나니 타르칸의 위에 올라타 있다고?
말도 안 된다.
타르칸은 또 왜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데? 엎어진 게 아니라.
‘앙큼하긴.’
아리스티네는 입술 끝을 올리며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눈부신 은발이 폭포처럼 쏟아 져 내렸다.
타르칸의 허리 위에 걸터앉은 채로 그를 내려다보자 곧장 눈이 마주쳤다.
황금빛 눈동자가 낮게 일렁거 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옭아멜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있잖아.”
아리스티네가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새하얀 손가락이 탄탄한 가슴의 한가운데를 스윽, 내리긋는다.
타르칸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흥분한 둣 사나운 기색이 그에 게서 뿜어져 나왔다.
“너 아까부터 나한테 끼 부리는 거야?”
아리스티네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타르칸이 피식 웃었다.
끼 부린다니,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아리스티네 뿐이었다.
하긴 그런 질문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끼 부리는 게 맞았으니까.
“대놓고 유혹 중이었는데.”
타르칸의 손이 자신의 위에 걸터앉은 아리스티네의 허벅지를 지나 허리를 움켜쥐었다.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그의 손이 지그시 그녀의 허리를 눌렀다.
절로 아리스티네의 상체가 숙여지며 그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타르칸은 상체를 들어 올리며 키스할 둣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더운 숨이 먼저 얽히고 그다음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타르칸이 우뚝 멈췄다.
안타까운 한숨이 아리스티네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어둑해진 황금빛 눈동자와 보랏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좀 통했나?”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리스티네가 그의 입술을 물 어뜯을 둣 삼켰으니까.
타르칸은 제 입 안을 탐하는 혀를 잡아채 깊게 빨아당겼다.
그의 커다란 손이 아리스티네 의 허리와 등을 꽉 감싸며 어루만졌다.
숨결조차 잡아먹힐 듯한 키스에 아리스티네는 헐떡였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불탈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몸이 뜨거운 것인지,제 몸이 뜨거운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은 빠르게 감각에 잠식되 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깊게 입 을 맞추면서 타르칸의 뺨을 잡았던 아리스티네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쭉 뻗은 목선과 단단한 쇄골, 그리고 더 아래로.
침대 시트 위로 검은 머리카락 과 은빛 머리카락이 한데 엉켜 섞여 들었다.
열기에 숨이 막혔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었다.
욕망에 젖은 채 갈급하게 일그러진 타르칸의 얼굴이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간 나누지 못했던 말을 하고,듣고,첫사랑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그러려고 했는데…….
멈칫한 아리스티네를 바라본 타르칸이 손을 움직였다.
스르록,그의 앞섶을 여미고 있던 끈이 풀렸다.
단단한 근육이 불빛 아래 온전 히 드러났다.
탄탄한 대흉근 아래로 배꼽 아 래까지 내려온 갈라진 복근.
근육의 모양을 따라 시선을 내 리던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옷끈을 풀었던 그의 손가락이 아리스티네가 입고 있는 튜닉 끈에 닿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