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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30화 (130/183)

130화

아리스티네는 숄을 끌어당겨 단단히 여미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생각할 게 많아 그녀는 홀로 산책 중이었다.

군용 통신 장비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다.

‘실바누스의 전쟁 준비는 얼마나 되어 갈까.’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타르칸은 언제 오는 거지.’

아리스티네가 왕도에 도착하고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스무날은 더 있다가 귀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빨리 오겠다고 들은 이상 마음이 성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오긴 힘들지.’

통신에 이상이 생겼으니 다른 사단과의 합류부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보고 싶다.’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낙 엽에 감춰진 나무뿌리를 보지 못했다.

“아!”

발등에 뿌리가 걸려 아리스티네의 몸이 확 기우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어 상 대를 바라보았다.

“하미르 왕자님.”

눈이 마주치자 하미르의 수려 한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튀르쿠아즈빛 눈동자가 가을 햇살 아래 매끄럽게 빛났다.

“조심하셔야지요.”

“……감사합니다.”

아리스티네는 인사하곤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미르는 미소 지은 채 잠시 그 거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오찬을 거절한 것을 묻는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여독이야 쉬었으니 풀리기 마련이지요.”

“그렇다면 저와 함께 식사하시는 데엔 무리가 없으시겠군요.”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어 하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례한 태도가 짜증 날 법도 한데 이렇게 한결같이 권하다니.

“정적의 초대는 달갑지 않은데요.”

“정적이 아니라 친구로서 초대 하는 겁니다.”

하미르가 반걸음 아리스티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딱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아리스티네가 다시 거리를 벌 릴 필요 없도록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

그러나 가까워지고자 하는 하미르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너무 멀지 않은 거리.

하미르가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문사 같은 얼굴이 한층 더 우수에 차 보였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요.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세나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비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통신석을 확인해 보았는데,누군가 손댄 흔적이 있어요.〉

〈통신 전파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군용 통신석 자체에 결함이 생겼다고?〉

〈네,통신석의 마나 회로에 잔류 마나가 느껴져요. 과부하를 일으켜 망가진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 장비도 없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에요.〉

아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 슬쩍 가슴을 당당히 폈다.

그 정도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 그녀가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라는 증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티네의 신경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누군가 손댄 흔적이 있다.’

그건 고의적이라는 뜻이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타르칸이 마수를 토벌하지 못하도록 방해 했다는 뜻.

밝혀지는 순간 전란을 몰고 올 소식이었다.

〈이 일은 일단 함구하도록.〉

〈알겠습니다.〉

회상을 마친 아리스티네는 하미르의 안색을 살폈다.

"하미르의 소행일까?’

그는 타르칸의 정적이었다.

‘아니면 실바누스?’

실바누스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마수 평원의 토벌에 실패하면 실바누스와의 전쟁에서 아이루고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아니,둘이 손잡았을 수도 있지.’

왕좌 싸움에 주변국을 이용하 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흔히 있는 일이기도 했다.

조용히 눈을 맞추는 아리스티네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하미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걱정했어요.”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아리스티네의 손을 붙잡았다.

“갑자기 그 위험한 곳에 가서.”

아리스티네는 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미르를 지켜보았다.

섬세하고 고상한 눈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훑고,그의 엄지가 아리스티네의 손등을 살며시 쓸었다.

“나라면 당신을 그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가 속삭였다.

아리스티네는 웃음을 터트렸다.

“착각하시는 게 있네요,왕자님.”

생각과 다른 반응이었는지 하미르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웃음기 있는 얼 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누가 보내서 마수 평원에 간 게 아니에요.”

보랏빛 눈동자가 당당하게 하 미르를 마주했다.

“내가 내 의지로 내 남편 구하러 간 것뿐이지.”

그 순간 하미르의 입매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푸른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를 비추었다.

천천히,그의 입술이 열렸다.

“부러워라.”

무슨 뜻인지 아리스티네가 미 처 이해하지 못해 눈매를 찌푸린 순간,하미르가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당겼다.

아리스티네가 휘청이며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거 아시나요?”

은빛 머리카락이 사락 움직이며 아리스티네의 흰 목선이 드 러났다.

하미르가 아리스티네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숨결이 느껴질 정 도로 가까웠다.

“타르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남편이 될 수 있었다는 것.”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돌려 하미르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 굴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다.

“지금 내게 동맹을 제안하는 건가요?”

그 질문에 하미르가 멈칫했다.

“미안하지만,나는 내 사업 파트너를 배신할 생각이 없어서.”

잠시 숨을 멈췄던 하미르가 하,하고 날카롭게 웃었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끝까지……”

처음에는 이런 면이 특이해서 눈길이 갔다.

하지만 이제는 짜증이 나려고 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은데.”

하미르가 고개를 숙였다.

긴 백금발이 아리스티네의 뺨을 간질였다.

하미르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가 타고 초조해서 일그러진 아리스티네는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바라는 건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一.”

그의 말이 더 이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아……”

아리스티네의 잇새에서 흐린 신음이 흩어졌다.

아리스티네는 무언가 강력한 파동이 자신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리스티네?”

하미르는 제 품에서 무너져 내리는 가느다란 몸을 꽉 붙들었다.

의식을 잃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하미르는 단숨에 아리스티네를 안아 들었다.

문사처럼 우아하게 생긴 것과 달리 그는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제 품에 있는 아리스티네의 얼 굴을 한 번 바라본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저희는 주인에 대한 말을 함부로 흘리지 않습니다.”

궁인들이 무표정하고 단단한 얼굴로 아세나를 향해 말했다.

“나도 비전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첩자처럼 뭔가 캐내겠다는 게 아니라 두 분 전 하에 관해 몇 가지 질문하겠다는 것뿐이잖아요?”

“어떤 질문이든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아세나의 설득에도 궁인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벌써 10분째 이어진 공방이었다.

결국 아세나가 폭발했다.

“아니,신문 기자들에게는 아주 잘 협력해 주셨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황실 홍보부와……”

“훙보부 좋아하시네! 첫날밤 침대 부서진 잔해 사진 찍게 해 준 게 흥보부에서 주관한 거라고요? 그냥 편의 봐준 거면서 왜 나는……!”

그 말에 딱딱했던 궁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머나,그 이야기였어요?”

“저희는 또 무슨 질문이라고....”

“그 부분에 관해선 얼마든지 정보 제공 가능하니 물어보도록 하세요.”

한순간에 태도를 바꿔 사르르 웃는 궁인들의 모습을 본 아세나가 허,하고 기막힌 숨을 홀렸다.

그런 반응에도 궁인들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왕자 내외의 금슬이 좋다는 것은 얼마든지 소문나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궁인들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런데 정보를 제공해 드리는 대가로 필요한 게 있는데요.”

그 말에 아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공짜로 말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금품을 가져오진 않았다.

돈보다 귀한 게 그녀의 마법 아니겠는가.

“무엇을 원하세요? 이 천재 마법사 아세나가 의뢰를 받는 경우는 드무니 숙고해서 요구를.....”

“아니,그런 건 됐고요.”

궁인들이 정색하고 손사래 쳤다.

“마수 평원에서 타르칸 전하와 비전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설명해 주시면 돼요.”

“최대한 자세하고 정확하게. 마법사분이시니 기억력은 당연히 좋으시겠죠?”

아세나는 입을 벌렸다.

자신은 인간의 한계를 연구하고 싶은 지적 탐구욕 때문에 이런다지만 대체 궁인들은 왜 이 러는 걸까.

그러나 곧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사진 몇 장이었다.

‘원래는 질문할 때 참고 자료로 쓰려고 했지만……”

“이걸 제공해 드리는 거라면 대가로 충분하겠죠.”

궁인들의 시큰둥한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진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이건……!”

한쪽 각이 폭 가라앉은 막사 전경 사진,간이침대와 기둥이 기울어진 막사의 내부 사진 등이 여러 각도로 자세히 찍혀 있 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친절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궁인들이 미소를 지으며 아세나를 바라보았다.

아세나는 미소 지으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대화가 오갈수록 궁인들은 깨달았다.

‘지적 탐구욕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마법사님도 우리와 같은 과야.’

이야기하는 내내 은근슬쩍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다음 침대 의뢰는 아세나 님께 맡겨 볼까.’

아주 잘 만들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이 응힉힉,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큰일입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다른 궁인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비전하께서……!”

아리스티네에게 문제가 생겼다 는 것을 안 순간 궁인들과 아세나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며 걸음을 옮겼다.

“비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쓰러지셨습니다. 하미르 전하께서 모셔왔습니다.”

“궁의는?”

“우미루 님을 불렀습니다. 타르칸 전하께서 안 계시니 혹시나 하고……”

“알겠습니다.”

걸음을 서두르는데 누군가 다 가오는 것이 보였다.

왕의 궁에 소속된 궁인들이었다.

그들은 아리스티네의 궁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비전하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하필 이 상황에.

궁인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폐하십니까?”

손님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아니겠지만 확인은 필요했다.

“아니요. 다른一.”

“죄송하지만 비전하께서 지금 쓰러지셨습니다.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차피 하미르가 쓰러진 걸 알고 있으니 아리스티네의 건강 상태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 말에 왕의 궁인들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길을 방해하지 않고 빠르게 물러났다.

덕분에 궁인들은 곧 아리스티네가 누워 있는 방에 도착했다.

침실이 아니라 다른 곳인 이유 는 하나였다.

아리스티네의 곁에 서 있는 하미르를 본 궁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를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미르 전하. 지금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 말에 하미르가 궁인들을 돌아보았다.

평소와 달리 푸른 눈동자는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아리스티네에게 이상이 생겨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궁인 따위가 내게 축객령이라. 내가 유하게 굴었더니 우습게 보인 모양이야.”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비전하를 보필하는 것이 저희의 소임이니 그 부분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궁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미르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나도 아리스티네가 걱정되니 어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그 정도 자격은 되겠지.”

궁인들의 눈매가 잠시 떨렸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잠시 후,우미루가 도착했다.

“비전하!”

그녀는 세상이 떠나갈 듯한 얼 굴로 아리스티네의 곁에 다가왔다.

아리스티네가 아프다니,얼굴을 밝히는 우미루에게 그건 세상의 빛이 희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자주 아프신 건지……”

벌써 아리스티네가 쓰러진 게 두 번째다.

우미루는 노심초사하며 아리스티네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뭔가 심각한지 미간을 찌푸린 채 한두 번 더 확인을 했다.

그러고서도 그녀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지?”

결국 참지 못한 하미르가 먼저 물었다.

우미루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비전하께서는 곧 깨어나실 겁니다. 몸 상태는…… 좀 더 정밀하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미르는 물론이고 아 세나와 궁인들의 얼굴에 충격이 지나갔다.

“대체 무슨……”

좀 더 자세히 캐물으려고 할 때,아리스티네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비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아리스티네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리더니 곧 눈동자가 드러났다.

보랏빛 눈동자가 한 바퀴 구르 더니 의문을 품는다.

“내가 왜……”

“쓰러지셨습니다. 기억나십니 까?”

아리스티네가 몸을 일으키려 해서 궁인들이 부축해 주었다.

우미루가 그녀의 입술에 미지근한 물을 대 주었다.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우미루를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우미루가 열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의료 장비가 없어 혈액 검사를 못 합니다. 저보다는 아세나 경이 더 잘 볼 겁니다.”

“제가요? 아……!”

아세나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비전하.”

그녀는 아리스티네에게 가까이 다가와 살며시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마나의 파동이 아리스티네의 몸을 훑었다.

아세나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곧 반짝였다.

그때였다.

“회임을 감축드립니다, 비전하.”

“내 동생이 쓰려졌다고!”

아세나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인 것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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