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화
갑작스럽게 들려온 두 가지 말에 아리스티네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녀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소란 중 하나를 몰고 온 당사자는 달랐다.
“회임?”
그렇게 되물은 이가 심각한 얼굴로 서둘러 아리스티네에게 다가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궁인들이 그런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는 아이루고인과 확연히 다른 외양을 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수려하다 못해 화려 한 얼굴.
실바누스 황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과 은발. 그중에서 남자는 벌꿀처럼 보이는 짙은 금발을 하고 있었다.
또,눈동자 색은 아리스티네와 같은 오묘한 보랏빛이었다.
외양만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무엇보다 아리스티네를 ‘내 동생’이라고 불렀다.
이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실바누스의 황자님을 뵙습니다.”
대체 왜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런 의문을 접어 둔 채 궁인들은 인 사부터 했다.
아리스티네의 친정에 책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황자는 궁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는 아리스티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회임이라니,그게 무슨 말이냐.”
걱정스러운 눈빛이 까칠해진 아리스티네의 안색을 홀었다.
아무리 봐도 임신을 축하하는 기색이 아닌지라,궁인들과 아세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리스티네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으로 한참 동안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라버니.”
“그래,리네. 네 오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너무 늦어서 미안하구나.”
실바누스의 황자, 라우넬리안이 그런 아리스티네를 꽉 끌어안았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인 채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가족의 품에 안긴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빠의 어깨는 넓어졌고,등을 쓸어 주는 손길은 단단히 여물어 있었다.
“집에 가자.”
라우넬리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때까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던 궁인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지금 무슨……!”
내뱉고 나서야 자신들이 감히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들은 애타는 시선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우리 비전하시잖아요!’
‘여기가 비전하 집이시잖아요!’
아리스티네는 라우넬리안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하미르 전하,오라버니께서 범한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경황이 없었을 것을 이해하니까요.”
“그럼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와 해후의 정을 나누는 것도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하미르는 잠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임신 때문에 쓰러진 게 맞는지 부터 시작해서 궁금하고 걱정되 는 게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한 아리스티네가 아세나와 궁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자리를 피해 줘.”
그 말에 궁인들의 얼굴이 더 불안해졌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겨 방을 나갔다.
* * *
“오라버니.”
“리네.”
남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의 변화가 서로의 모습에서 느껴졌다.
“내 동생.”
라우넬리안이 손을 뻗어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쌌다.
이제 다 커서 결혼까지 했건만 그에게는 아직도 아이처럼 보였다.
언제나 상처투성이에, 말없이 묵묵한 시선으로 조용히 주변을 바라보던 작은 아이.
어떤 사람은 그 시선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그늘졌다고 말했지만,라우넬리안에게는 그 어떤 시선보다 순수해 보였다.
아비인 황제가 이복여동생을 예뻐하는 것을 멀리서 한없이 바라보던 아이.
조르는 말도,하다못해 부럽다는 말도 할 줄 모를 정도로 상처받았고,그럼에도 저를 상처 준 사람을 제대로 미워할 줄도 모르던 아이.
라우넬리안이 보아 온 그 어떤 것보다도 가슴 아프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예쁘네.”
그가 아리스티네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아리스티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비죽였다.
결혼까지 한 처자에게 이 무슨 애 취급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반갑다거나,보고 싶다거나,하다못해 오빠도 여전히 잘생겼다는 말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으나 라우넬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아리스티네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마치 제 동생이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둣이.
“어쩐 일이긴. 내 동생이 있는 곳인데.”
“하지만 오라버니는……”
아리스티네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지 라우넬리안도 잘 알았다.
라우넬리안은 오랫동안 제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긴커녕 북부에 발이 묶여 있었다.
황자인 라우넬리안의 신변을 제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제.
아리스티네가 유폐당했듯 라우넬리안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북부로 보내졌다.
명목상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두 남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황제가 이 만남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아리스티네의 표정을 본 라우넬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리네,넌 더 이상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돼. 이제 이 오빠가 널 지켜줄 테니까.”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리스티네는 한층 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반란이라도 계획 중이신 거예요?”
라우넬리안은 대답 없이 미소지었다.
그는 어휴, 하고 한숨 쉬면서 아리스티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동안 힘이 없어서 내 하나뿐인 동생을 이리 고생시키고.”
“하나뿐이라니요.”
아리 스티 네에게도, 라우넬리안 에게도 동생이 한 명 더 있다.
그 지적에 라우넬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정히 풀어져 있던 보랏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 는다.
“그 여우는 내 동생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네가 유폐당한 것도....”
“제가 무슨 고생을 해요. 저보다 오라버니가 더 고생하셨지요.”
아리스티네는 그냥 말을 돌렸다.
라우넬리안은 그런 아리스티네 를 바라보다가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이렇게 남 생각만 하고 착해 빠져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오라버니뿐일걸요.”
“내 동생 예쁘고 착한 건 나만 알면 됐지.”
라우넬리안은 아리스티네의 뺨에 키스하곤 손바닥을 펼쳤다.
“선물을 가져왔다.”
그러자 아무 것도 없던 그의 손위에 리본이 앙증맞게 묶인 상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상자를 아리스티네의 손에 쥐여 주었다.
“풀어 보렴.”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리본을 풀었다.
“……마카롱이네요.”
색색의 마카롱이 귀엽고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놓여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기억이 물밀듯 차올랐다.
“오라버니께서 어렸을 때 제게 몰래 주셨지요.”
“그랬지.”
“맛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리스티네가 마카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맛있었는데 크고 나니 무슨 맛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라우넬리안의 눈빛에 고통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곧 그 감정을 갈무리하며 다정히 물었다.
바삭,아리스티네가 마카롱을 깨물었다.
바삭하면서 존득한 꼬끄가 부 서지며 진한 라즈베리 필링과 입 안에서 어우러졌다.
“맛있니?”
아리스티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였을 때와 똑같아서 라우넬리안은 웃음을 홀렸다.
하지만 그 웃음의 끝은 씁쓸했다.
“이런 것 따위 물릴 만큼 먹고 자라야 했는데.”
“걱정 마세요. 여기서는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마카롱도 많이 먹어서 이제 어떤 맛인지 잘 알고 있다.
“나 걱정 안 시키겠다고 거짓 말할 필요 없다. 내 동생 얼굴이 이렇게 상해선.......”
라우넬리안이 아까워 죽겠다는 둣 아리스티네의 뺨을 쓸었다.
아리스티네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건 마수 평원에서 돌아온 뒤에 쉬기보단 음모를 파헤치는 쪽에 집중하며 무리해서 그런 거였다.
‘아니,그보다 다른 이유가 크겠지.’
아리스티네는 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임신했다고 하나 납작한 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2주차.
보통이라면 임신을 했다는 사실조차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세나 정도 되는 마법사가 마나로 몸을 스캔했기에 이변을 감지한 것일 뿐.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쓰러지기 전에 느꼈던,온몸을 휩쓰는 파동.
그 파동의 근원이 자신의 배에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만큼 슬프고 안타까웠다.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하는 말에 라우넬리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동시에 그의 눈빛도 깊게 가라앉았다.
“권능을 타고났구나.”
실바누스 황가의 핏줄을 흔히 황금의 피라고 부른다.
천 년의 세월 동안 군림해 온 고귀한 핏줄에 대한 비유였다.
-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실바누스 황가의 직계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으니까.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을 가진 것처럼.
그중에서도 ‘권능’이라고 칭할 만한 능력을 타고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황제가 알면……”
“절대 알아선 안 되지.”
라우넬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권능을 타고났다면 더더욱 여기에 있을 순 없다. 네가 얼마나 힘들텐데. 함께 실바누스로 가 자.”
“하지만 실바누스에는.....”
황제가 있다.
라우넬리안이 아리스티네의 손 을 꽉 붙들었다.
“이제는 이 오빠에게도 너를 보호할 힘이 있어. 적어도 예전 처럼 그 차갑고 비좁은 곳에 너를 가두진 못할 것이다. 아니, 가두긴커녕 네게 손끝 하나 못 대게 할 거다.”
단호히 말한 그가 안타까운 얼굴로 덧붙였다.
“미안하다,오빠가 부족해서 네 유년이 괴로웠구나.”
몸이 힘들 테니 집에 돌아가자는 말에 걱정부터 하는 동생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아리스티네가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께서 항상 저를 위해 애쓰셨단 것을 잘 알아요.”
아리스티네가 유폐당했던 때 라우넬리안 역시 열 살도 안 되는 나이였다.
그런 그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지금도 어느 정도 힘을 구축하 자마자 하나뿐인 여동생부터 찾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인 게 분명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국의 황자가 방문하는 건데 사전 협약도 없었다는 점이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래 봤자 결과가 없는걸.”
라우넬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동생한테 어울리는 남자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겠지만,그래도 그나마 가장 완벽한 놈을 골라 혼사를 맺어 주어도 부족할 판에 야만인과 결혼이라니.”
라우넬리안이 분노한 표정으로 타르칸을 향해 이를 갈았다.
아리스티네는 깜짝 놀라 그를 만류했다.
“아니에요,타르칸은……”
대체 뭐라고 설명하지?
손이 많이 가는 수줍은 변태?
평소 타르칸을 향해 했던 말이 바로 떠올랐지만,그대로 말하면 더 난리가 날 터였다.
뒷말을 기다리는 라우넬리안의 얼굴을 보며 아리스티네는 생각 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가슴이 빵빵하고 잘생겼어요.”
말하고 보니 너무 본심이었다.
라우넬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충격이 컸다.
하지만 가슴과 얼굴을 밝히는 동생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번 더 아리스티네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오빠보다 더?”
제 동생에게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아리스티네는 어이가 없었지만,오랜만에 본 오빠한테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역시 힘든 일을 겪으며 자라왔으니 성격이 조금 이상한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음, 종류가 달라서............”
아리스티네는 대답을 회피했다.
생긴 것은 종류가 달라 취향에 따라 우열이 나뉘겠지만 가슴은 솔직히 타르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확실히 말해 보거라,응? 이 오빠냐,그 놈팡이냐.”
“아니, 그래도 제 남편인데.....”
은근히 타르칸의 편을 드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라우넬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남편은 이혼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네 오빠다.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야.”
아리스티네는 흐린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북부에서 많이 힘들었나 보다.’
“실바누스에는 워낙 소문이 흉흉하니 오라버니 마음도 이해해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나한테 잘해 줘요.”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지만 동생의 우선순위에서 타르칸에게 밀렸다는 충격에 빠진 라우넬리안에게는 역효과였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
“잘해 준다는 놈이 임신한 아내 곁에 없고 대체 뭘 하는 거냐!”
“그게, 임신한 줄 모르니까
아리스티네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밤,정말 하룻밤 만에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바로 임신이라니?
“임신할 거리를 만들었으면 옆에 꼭 붙어서 네 수발들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수려한 눈매를 찌푸리며 말한 라우넬리안이 멈칫했다.
“아니,그놈은 지금 마수 평원에서 토벌 중이라고 들었는데?”
곧 그의 얼굴에 차디찬 분노가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무책임하게 떠나기 전에 네게 일을 치고 간 거냐?”
“그,그게 아니에요.”
아리스티네는 왜 혈육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민망했다.
하지만 말리지 않으면 라우넬 리안이 당장 마수 평원으로 타르칸을 잡으러 갈 것 같았다.
“아니면?”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 치의 거짓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빛났다.
아리스티네는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 채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어,그게,그러니까……. 얼마 전에 제가 마수 평원으로 가서......”
라우넬리안은 순간적으로 아리스티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나 찰나였다.
까득,이 가는 소리와 함께 살벌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홀러나왔다.
“그딴 불결하고 비루한 곳에서 감히 내 동생을……”
그와 동시에 라우넬리안의 분 노에 반응하듯 방 안의 기물들이 들썩이며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만큼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분노할 것도,놀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완벽한 오산이었다.
다음 날,신문에 커다랗게 실린 사진을 본 라우넬리안은 결국 왕궁의 방 하나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