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라우넬리안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동생의 방에 와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
“자,아〜 해 봐.”
“……그냥 제가 먹을게요.”
“안 돼. 우리 리네가 어릴 때 아파도 오빠가 병간호도 못 해 줬는데.”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멈칫했다.
아픈 채 혼자 방치된 어린 동 생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에게 상처였을 것이다.
결국 아리스티네가 입을 벌렸다.
“옳지 잘 먹네. 잘 먹어야 빨리 체력을 회복하지. 오빠가 먹여 주니까 더 맛있지?”
침대에 앉은 동생에게 수프를 호호 불어 먹여 주는 것을 보고있는 궁인들의 마음이 착잡했다.
비전하의 친정 식구니 당연히 잘 보이고 싶은데,‘집에 가자’고 했던 말이 있는지라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묘한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비전하 간호 잘해 드릴 수 있는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드릴 수 있는데!’
궁인들의 열렬한 시선을 느낀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궁인들 보기 민망했다.
하지만 라우넬리안이 자신을 과보호하는 경향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아리스티네는 잠재력을 키운다는 황제의 계획에 따라 온갖 학대 를 당했다.
라우넬리안은 유년기부터 고통 받는 동생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자랐다.
차라리 신경을 끄면 속이 편했을 텐데, 그는 동생을 지킬 수 없다는 박탈감 속에서 괴로워했다.
그런 그가 동생을 끼고도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애초에 삶의 목표가 동생을 구해 내는 게 되었으니까.
아리스티네에게도 라우넬리안은 애틋했다.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무엇보다一.
‘만약 내가 제왕안의 소유자인 걸 밝혔다면 오라버니도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라우넬리안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네 남편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놈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고 있고.”
라우넬리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역시 오빠가 최고지?”
투덜거리는 건 이걸 위함이었다.
내가 타르칸 놈보다 낫다!
그걸 어필하기 위한 것.
라우넬리안이 동생에게 미소를 지었다.
꿀빛 금발이 아침 햇살에 화려 하게 빛나고,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귀족적인 얼굴이 한순간 에 다정하게 변했다.
보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멍하니 한숨을 흘릴 정도로 찬란한 미소였다.
부들부들하던 궁인들도 이 순간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남매가 마주보고 미소 짓고 있으니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절경이네요,장관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이네요.’
저도 모르게 감탄하던 궁인들이 핫,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게 아니지! 질 순 없어!’
눈빛을 교환한 그들이 재빨리 신문을 가져갔다.
“비전하,오늘 아침 신문입니다.”
“아,고마워.”
아리스티네가 궁인들에게서 신 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1면을 확인한 순간,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기 시작 했다.
라우넬리안은 빠르게 동생의 이변을 눈치챘다.
“리네, 왜 그러一.”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 했다.
★마수조차 방해하지 못한 운명적인 사랑
대서특필된 헤드라인과 함께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가라앉은 거대한 막사와 간이 침대가 파손돼 엉망진창이 된 내부가 콜라주되어 있는 사진이 었다.
“대체 이게,이게 무슨…… ”
충격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라우넬리안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는 것이다.
달그락 一.
집기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에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아리스티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신문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봤을 때는 이미 늦 었다.
테이블과 암체어를 비롯해 방 안을 장식했던 온갖 집기가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멀쩡한 것은 아리스티네가 앉아 있는 침대뿐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히 다뤄도 아까운 내 동생을,이딴……!”
라우넬리안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쨍그랑!
화병이 깨지는 것을 시작으로 원목 테이블이 부서지고 소파가 거꾸로 바닥에 처박혔다.
와장창창! 쨍그랑!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거센 반응에 아리스티네는 조금 당황해서 라우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궁인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서둘러 그를 말렸다.
“오라버니.”
아리스티네의 손이 라우넬리안 의 손을 잡는 순간,분노가 가득 했던 보랏빛 눈동자에 이지가 돌아왔다.
순식간에 방 안에 휘돌던 광풍과도 같은 기운이 잠잠해졌다.
“……미안하다,리네.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아리스티네는 말없이 라우넬리안의 손을 꽉 잡은 채 궁인들을 바라보았다.
“괜찮니?”
“예,예. 비전하.”
“오라버니께서는 워낙 강력한 마법사셔서 마나를 통제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들킬 일은 없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가서 쉬고 있으렴.”
배려인 동시에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궁인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아리스티네가 라우넬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우넬 오라버니.
질책이 섞인 부름에 라우넬리안이 다시 사과를 하려 했을 때였다.
“................!”
아리스티네가 그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간 많이 힘들었죠.”
라우넬리안이 타고난 능력은 염동력이었다.
그건 물론 놀라운 이능이었지만,실바누스 황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권능’의 영역인 제왕안, 예지 그리고 날씨를 조종하는 능력과 같은 것들이 귀히 여겨졌다.
그에 반해 물건의 위치를 조금 움직일 뿐인 염동력은 평범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라우넬리안의 능력은 그저 물건의 위치를 조금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건 오라버니께서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아오셨다는 뜻이지.’
그것도 그냥 힘든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기를 느낄수록,생명이 경각에 달릴수록 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더 많이 발휘한다.
아리스티네 역시 제왕안으로 과거,현재,미래뿐만이 아니라 전생마저 볼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살아남기 위해서.
라우넬리안이 이토록 강한 염 동력을 갖게 된 것도 북부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상황에 수없 이 처했다는 뜻이다.
“별거 아니었다. 네가 겪은 일 에 비하면……”
라우넬리안은 어쨌든 황자였다.
황제는 척박한 땅에 그를 보냈지만,그뿐이었다.
북부에서 라우넬리안은 나름대로 황자로서 대접을 받으며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라우넬리안 본인의 의지 때문이었다.
황제의 손에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 때문에 온갖 위험을 자초하 며 앞장섰고,그 결과 그 차갑고 배타적인 북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염동력은 역대 최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강대한 무력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겼다는 건 곧 반란의 씨앗이 싹렀다는 뜻.
‘드디어 너를 구할 희망이 생겼어.’
라우넬리안은 아리스티네를 마주 꽉 끌어안았다.
“이제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런가요.”
“그래.”
“그렇다면一.”
아리스티네가 스윽 고개를 들었다.
라우넬리안을 보는 시선이 제법 엄격했다.
“이것부터 치우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엉망이 된 방 안을 가리켰다.
반란을 도모할 정도의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황자는 동생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방 청소를 시작했다.
아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항상 받던 시선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따갑게 느껴졌다.
‘아,진짜 창피해.’
설마 타르칸의 막사가 신문에 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체 사진은 누가 찍은 거야.’
첫날밤 침대가 부서진 것도 대 서특필되었던 판에 이제 와서 뭘 새삼스레,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
아직 임신 사실은 공식적으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그것 까지 소문날 경우를 생각하면 낯이 뜨거웠다.
‘막사가 가라앉은 건 내 탓이 아닌데!’
분명 타르칸은 원래부터 그랬다고 했다.
* * *
“너무 빨리 걷지 마렴.”
쪽팔림에 자꾸만 걸음이 빨라지자 옆에서 아리스티네를 부축하던 라우넬리안이 한마디 했다.
“이렇게 부축받을 정도는 아닌 데요.”
“조심하고 조심해도 모자라.”
라우넬리안이 단호하게 말한 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오빠 품에 안겨서 가는 게一.”
“빨리 가죠.”
아리스티네는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라우넬리안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를 따랐다.
그들은 네프테르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
“……생각보다 타르칸 왕자와 사이가 괜찮은가 보구나.”
잠시 침묵하던 라우넬리안이 말을 꺼냈다.
그는 당연히 아리스티네가 홀대당할 줄 알았다.
실바누스에서도 황제가 아리스티네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말이 많았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동생을 구하러 무리해서 온 것인데, 정작 분위기가 생각과 달랐다.
“잘해 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리네,그가 마음에 드니?”
아리스티네는 그 질문에 걸음을 멈추고 라우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본 라우넬리안이 웃었다.
“내 동생,다 컸네.”
약간의 아쉬움과 대견함이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실바누스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니. 몸을 생각해서.”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잊을 만하면 기묘한 파동이 느 껴진다.
그런데도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임신이라니.
‘내 배 속에 나와 칸의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건 단순히 기쁘다,신기하다 같은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바보,왜 이런 순간에 곁에 없는 거야.’
타르칸이 임신을 알게 된 순간에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부모가 된 다는 사실에 조금 두렵기도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 어난,그녀의 삶을 바꿀 변화.
하지만 사랑스러웠다.
엄마가 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
‘하지만,난 이미 널 사랑하나 봐.’
아리스티네가 납작한 배를 문질렀다.
그에 화답하듯 온몸에 부드러운 파동이 퍼져 나갔다.
그 파동이 기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몸을 생각해서.
라우넬리안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권능’을 타고난 아이니 무사히 출산하기 위해선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었다.
“저도 알아요.”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대로 얼굴도 보지 않고 떠나면 불안해할 테니 칸이 올 때까지만……”
“언제 올 줄 알고. 들어보니 마수 토벌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원정이라던데.”
“하지만.”
“리네,이건 양보할 수 없다. 네 건강이 달린 문제야. 그리고 배 속의 아기도.”
배 속의 아기까지 말하자,아리스티네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아기와 그 녀 둘 다 잘못되는 것이니까.
“알겠어요.”
그 대답에 안심한 듯 라우넬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말거라. 내가 타르칸 왕자에게는 잘 말할 테니.”
아주 잘 말이지.
그가 속으로 미소지었다.
감히 제 동생의 마음을 채 간 놈팡이에겐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했다.
* * *
“우리 리네 왔구나.”
네프테르가 만면에 웃음을 띠 고 아리스티네를 맞았다.
원래도 아리스티네를 예뻐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아무래도 마수 평원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왔으니까 흡족하시겠지.’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나 다름없는 상황.
아리스티네 역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인사했다.
“부왕 폐하,마수 평원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귀환했습니다. 몸을 추스르느라 보고가 늦은 점 죄송합니다.”
“응? 아,그랬지.”
네프테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환대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미 네가 올린 장계는 받아 보았는데 굳이 직접 와서 보고 할 필요 있느냐. 안 그래도 몸이 무거울 텐데. 자자,어서 이리앉거라.”
네프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아리스티네를 부축했다.
그 모습에 아리스티네는 깨달았다.
‘아,임신 소식을 들으셨구나.’
다른 이도 아니고 국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프테르가 아리스티네의 팔을 잡자 원래 아리스티네를 부축하고 있던 라우넬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여동생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네프테르 역시 지지 않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은근슬쩍 라우넬리안의 팔을 털어 내려 했다.
파지지직.
새파란 전기가 두 사람 사이에 서 튀었다.
아리스티네는 양쪽에서 팔이 잡힌 채 지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나 국가간의 자존심싸움은 여전히 존재했다.
국가의 알력 다툼을 이렇게 하는 걸까.
‘다 좋은데 나는 빼 주었으면.’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