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제도 근교에 자리한 대저택.
일반적인 저택보다 훨씬 더 높 은 담은 세 개나 되는 데다가 곳곳에 마도 장치가 보란 듯이 드러나 있었다.
단 하나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저택이 아니라 작은 요새와도 같았다.
그러나 세 개의 담을 지나면 마치 봄을 이곳에 붙잡아 놓은 것처럼 포근하고 안락한 정원이 펼쳐졌다.
라우넬리안이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마련한 안전 가옥이었다.
그리고 안전 가옥은 대개 표적이 되는 자가 머물기 마련이다.
황제의 밀명을 받아 이곳에 숨어든 복면인이 자세를 낮춘 채 기척을 죽였다.
‘이제 겨우 첫 번째 담을 통과했어.’
담 하나 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었다.
‘다른 녀석들은 잘 통과했으려나.’
그들은 잡힐 때를 대비해 각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마 첫 번째 담도 아직 못 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다면 가능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재차 다짐한 그가 마도 장치의 틈을 찾고 있을 때였다.
“이런,이런.”
담 위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 여유로운 기색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복면인의 심장은 바짝 얼어붙었다.
‘라우넬리안 황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단숨에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마저 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설마 은신 마법을 걸고 왔는데 내가 보이는 건 아닐 거야.’
아니나 다를까 담 위에 걸터앉아 있는 라우넬리안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면인은 안도의 한숨도 내쉬지 않은 채 라우넬리안의 동향을 살폈다.
괜히 움직였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라우넬리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아무리 청소를 열심히 해도 쥐새끼가 숨어든단 말이야.”
라우넬리안이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복면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라우넬리안은 분명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그의 말은 마치 복면인을 가리키는 것 같 았다.
‘여전히 날 보고 있진 않아. 설마 다른 녀석들이 들켜서 처리 하고 오는 길인가?’
그렇다면야 이해됐다.
‘더 조심해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복면인은 라우넬리안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향해 눈을 굴렸다.
그곳엔 주먹만 한 회색 털 뭉 치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쥐?’
설마 진짜로 쥐를 보고 한 말인가?
복면인이 황당함과 안도감에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그래도 계속 열심히 청소해야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쥐가 복면인을 향해 확 달려들었다.
복면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쥐가 달려든다고 해서 움직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발치에 웅크린 쥐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했다. 진짜 쥐 라기보다는…
‘쥐 인형?’
생각지도 못한 일에 그가 멍하니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허공으로 휙 끌어 올려져 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담 높이만큼 끌어 올려진 복면인의 눈앞에 라우넬리안이 보였다.
“쉿.”
라우넬리안이 입가에 검지를 붙이며 싱긋 웃었다.
“내 동생이 쉬는데 시끄러우면 안 되잖아. 그렇지?”
뭐라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쥐 인형이 찍찍,움직이며 복면인의 몸을 타고 놀았다.
“자꾸만 쥐새끼가 나온다니까. 터가 안 좋은 건지.”
라우넬리안이 쯧,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열심히 청소해야지. 내 동생이 있는 곳은 청결해야 하니까.”
그 말이 끝이었다.
라우넬리안이 빈주먹을 음켜쥐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난 쥐 인형 잔해가 허공에서 눈발 처럼 흩날렸다.
라우넬리안은 서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진짜 청소부가 나타나 이곳을 정리할 터였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동생이 있는 곳으로.
“깨어났구나,리네.”
반색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 렸다.
아리스티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실바누스……’
장엄하고 격조 높은 동시에 화 려한 방 안의 양식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아이루고가 아닌,실바 누스라는 걸.
그중에서 아리스티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침대 주변의 진과 황금빛으로 빛나는 꽃이었다.
아리스티네는 그 꽃잎을 살짝 어루만졌다.
황제의 눈을 피해 이 꽃을 가져오기 위해 라우넬리안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했다.
“……저 때문에 오라버니께서 고생 많이 하셨군요.”
“리네,널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건 내 기쁨이야.”
라우넬리안이 침대가에 앉으며 아리스티네의 머리카락을 정리 해 주었다.
그리고 손수 아리스티네의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아 주었다.
“어릴 적 네가 아플 때도 이렇 게 돌봐 주고 싶었는데.”
“지금 돌봐 주시잖아요.”
아리스티네의 말에 라우넬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렇게 곁에 두니 바라만 봐도 포만감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아리스티네가 꽃 송이 하나를 들어 향기를 맡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 꽃의 이름은 크리세아.
권능의 힘을 가진 아이를 잉태 했을 때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꽃이었다.
황금빛이 바래면 효능이 다해 새로운 꽃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통은 황궁 심처에 있 는 크리세아 궁에서 임신 기간을 보내곤 했다.
크리세아 궁이라는 이름이 말 해 주듯 그 궁의 정원에는 크리세아 꽃이 만발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머물면 황제에게 권능의 아이를 임신했 다고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없 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아리스티네는 방 안의 인테리어를 살폈다.
비단 벽지부터 시작해서 화려 하고 사랑스러운 가구가 방 안을 아름답게 꾸미고,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가을인데도 장미가 피어 있었다.
“처음부터 저를 데리고 오실 생각이셨나 보군요.”
“그래, 네가 희생양이 되어 야만인과 결혼하는 걸 내가 그대로 두고 볼 줄 알았니?”
“……아이루고 사람들은 실바 누스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그 말에 라우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아이루고는 그의 생각과 달랐다.
흉악한 야만인도 아니었고,연약한 동생을 냉대하거나 홀대하 지도 않았다.
아이루고 왕의 태도를 볼 때, 아리스티네는 그곳에서 꽤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만약 아리스티네가 임신하지만 않았다면 라우넬리안은 아이루고에 그녀를 두고 왔을 것이다.
동생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스티네의 안위였으니까.
“몸 상태는 어떠니?”
“많이 안정되었어요.”
아리스티네가 배를 감싸며 말했다.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임신하면 입맛이 변한다던데. 오빠가 다 구해다 줄게.”
“아뇨,괜찮아요.”
아리스티네는 그런 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있지만 그건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거였다.
“아이가 내 동생을 닮아 순해서 그런지 음식도 가리지 않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벌써부 터 이렇게 강한 것 좀 봐.”
라우넬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티네의 납작한 배에 손을 얹었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티네는 딱 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음식 냄새를 역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구역질에 밥상을 물 린 적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정말 제가 순하다고 생각하세요?”
“너만큼 착한 애가 세상에 또 어딨다고 그러니?”
진심이 가득한 라우넬리안의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이 흔들렸다.
‘북부에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졌을까.’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아이가 순해 입덧이 없는 건 좋은 일이었다.
“뭐,절 닮지 않고 제 아빠를 닮았나 봐요.”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배를 쓸었다.
‘타르칸이 변태에 수줍음이 많긴 하지만 성격이 안 좋은 건 아니지.’
타르칸을 떠올리면서 지었던 미소는 곧 씁쓸하게 바뀌었다.
‘우리 아가도 어서 아빠를 만나 봐야 할 텐데. 아빠는 마수 평원에서 잘 있겠지?’
성격이 순한 타르칸이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깨닫게 되었다.
타르칸의 성질머리 역시 자신 못지않게 더럽다는 것을.
아직은 지옥의 입덧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평화로운 날이었다.
* * *
쾅!
꽉 틀어쥔 주먹이 소파의 팔 받침을 거칠게 내리쳤다.
“실패라고?!”
노기를 띤 음성이 방 안에 살벌하게 내리깔렸다.
“송구합니다,폐하.”
“죽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 저 동태만 살펴보라고 보냈어. 그런데도 실패?”
하! 황제가 기가 막힌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던 시종이 더 몸을 낮췄다.
“젠장! 제국에 방문한 황녀가 왜 황궁이 아니라 사가에서 지내냐 벌써부터 말이 많아!”
라우넬리안 그 여우 같은 놈이 아리스티네를 보란 듯이 데리고 제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았다.
마치 몰래 데려가는 것처럼 로 브를 푹 뒤집어씌웠지만,깊게 눌러쓴 후드가 바람에 벗겨지며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라우넬리안은 깜짝 놀라 다시 후드를 씌웠지만 이미 볼 사람 은 다 봤다.
‘바람일 리가 없지!’
황제는 이를 으득 갈았다.
분명 그놈이 염동력을 사용해 일부러 벗긴 게 틀림없다.
애초에 진짜 숨길 작정이었으면 마차의 커튼을 다 내리고 더 은밀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소문내라고 아주 광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어떤 사실을 그냥 목격하는 것과 누군가가 숨기려 했던 비밀을 목격하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입을 더 근 질거리게 할까?
후자가 당연했다.
메인 로드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나팔수가 되어서 목격담을 전파했다.
그 과정에서 의문이 생겨나는 건 당연했다.
황녀는 왜 황궁에서 지내지 않고 황자가 몰래 궁 밖으로 데려 가는 걸까.
이런 의문은 상상력과 입을 통 해 퍼져 나갔다.
〈황궁에서 지낼 수 없어서 그런 거지.〉
〈왜 지낼 수 없는진 뻔하지 않겠어? 황궁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반기지 않으시는 거지!〉
〈설마 폐하께서 그러실까? 저 번에 얼마나 황녀님을 애틋하게 여기는지 아이루고에 공식 서한 까지 보내셨잖아.〉
〈공식 서한을 보낸 이유가 폐 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기사들과 시녀들이 황녀님을 괴롭혔기 때문이잖아.〉
〈그때 인선을 어떻게 한 거냐고 말이 많았는데 여론이 안 좋 은 걸 무마하려고 일부러 그런 서한을 보낸 거일 수도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자님께서 몰래 움직이셨어. 그분께서 경계 할 만한 분이 황제 폐하 외에
있어?〉
〈애초에 황녀님이 오셨으면 환영 연회라도 크게 열었어야지! 그런 연회 따위 하나도 없었잖 아.〉
〈폐하께서 황녀님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소문은 더 부풀려지고 더 커졌다.
아예 아리스티네가 황궁에서 암살을 당할 뻔해 라우넬리안이 급히 피신시킨 거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 영악한 놈이……”
소문이 그렇게까지 부풀려진 데에는 라우넬리안의 수작질이 컸을 것이다.
설마 아리스티네를 데려올 거 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대응이 늦었다.
“아이루고에서 아리스티네를 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대로 가다간 황제가 황녀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물론 그건 사실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죽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아이루고에서 전쟁의 불씨가 되어 죽어야 했다.
‘실바누스에서 문제가 생기면 안 돼.’
지금 여론을 생각했을 때, 실 바누스에서 아리스티네의 신변에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황제에게 화살이 돌아올 것이다.
“라우넬리안 그놈에게 명해라. 아리스티네를 데리고 황궁으로 귀환하라고.”
“하지만 폐하,지금 상황에서 억지로 불러들이면....”
“소중하디소중한 내 딸이 황궁에서 극진히 보살펌을 받아야지. 밖에서 지내는 게 말이 되냐고. 그렇게 말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 아닌가?”
그 말에 시종장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일단 아리스티네를 황궁에 불 러들여야 해. 그리고 대체 왜 라우넬리안이 실바누스로 데려왔는지 알아내야겠어.’
워낙 사이좋은 남매이니 야만인에게 시집간 동생을 보다 못 해 데려왔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의 감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뭔가 있어.’
황제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 * *
“실바누스로 간다.”
그 말에 궁인들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저도 데려가십시오,전하.”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비전하는 우리 손으로 되찾아야 해!
궁인들의 눈빛이 각오로 빛났다.
타르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가 궁인들을 아꼈으니 데려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감히 내 아내를 데리고.....”
타르칸의 눈빛이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심지어 아리스티네는 자신과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타르칸이 임신한 아내를 데려간 라우넬리안을 적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다 몸이 안 좋다고 했어.’
걱정으로 속이 다 타 버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약한 몸인데 임신으로 인해 얼마나 체력이 안 좋아졌을지.
“전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아세나가 뛰어 들어왔다. 타르칸이 반색했다.
“알아냈느냐?”
“네,여기 통신 코드입니다.”
타르칸은 지체 없이 통신석에 코드를 입력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드디어 아내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가 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 은 말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리스티네의 말을들어 주고 싶었다.
혼자서 얼마 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신호가 흐르고 연결음 이 들렸다.
“리네?”
타르칸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 써 진정시키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네가 그 내 동생을 임신시킨 주제에 책임감도 없이 옆에 있어 주지도 못한 놈팡이냐?]
통신석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타르칸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