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타르칸의 뜨거운 몸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단단하고,안정되는 기분.
이 품이 그리웠다.
그녀는 재회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황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만 을 담고 있었다.
다른 사람 따위는 단 한 번도 담지 않은 것처럼.
‘눈빛이 흔들렸던 게 날 봐서 그런 거였어.’
제왕안으로 봤을 땐 레타나시 아를 보고 그런 줄 알고 울컥했다.
그게 레타나시아의 뒤에서 다가오는 자신을 봐서 그런 것이었을 줄이야.
각도의 농간이었다.
아니면 제왕안이 보여 주는 장면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타르칸이 저를 부르는 걸 들었을 텐데.
괜히 흥분했다.
“리네.”
타르칸의 부름에 아리스티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그러고 보니…….’
타르칸은 지금 자신의 몸 상태와 아이에 대해 가장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게 되면……’
궁내부 차관인 모로이텐 백작은 물론이고 레타나시아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입을 열기 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내려갔다.
닿아 오는 손길에 타르칸의 동공이 흠칫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스티네가 드러나 있는 그의 가슴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여기서……?’
유혹적인 손길에 타르칸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좋긴 좋았다.
타르칸도 이대로 아내를 안은 채 어서 빨리 둘만의 공간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첼 줄이야.
하긴 원래 제 아내는 대담한 구석이 있었다.
‘역시 이 옷을 입길 잘했어.’
타르칸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더 줄 때였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제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내의 손가락이 어딘지…….
‘임, 신…… 얘기?’
타르칸은 뒤늦게 그게 글자를 반복해서 쓰고 있는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커다랗게 엑스 자를 그리는 손 가락에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리스티네가 마주 끄덕이며 손가락을 내렸다.
왠지 아쉬움이 물밀듯이 밀려 왔다.
‘조금만 더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을 걸 그랬나.’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아리스티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무 의도 없이,순수한 마음으로 글자를 써서 알려 주려 했던 것인데 손끝에 부드러 우면서 단단하던 가슴의 감각이 아쉽게 남았다.
아리스티네가 은근슬쩍 남편의 가슴에 다시 손을 얹으려 할 때 였다.
“아리스티네 언니.”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리스티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레 타나시아.”
탐스럽게 웨이브 진 금발을 벌 꿀처럼 달콤하게 빛내며,레타나 시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귀국한 지 꽤 되셨다고 들었는데,이제야 뵙네요.”
라우넬리안의 사저에서 두문불 출하는 아리스티네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었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니냐는.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글쎄,내가 실바누스에서 살 때도 우리가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잖니.”
“……그건 이유가 따로 있었지요.”
“너는 날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유폐당해서 못 만났다는 뜻이니?”
“그렇게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언니의 상처를 자극할 의도는 없었어요.”
아리스티네의 입매가 살짝 올 라갔다.
황제에게 버림받아 유폐당했다는 사실은 언급만으로 쓰라린 상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 나라를,세계를 구했다는 증거였다.
“다만 저는 언니와 매일같이 함께 지내고 싶었어요. 제 하나뿐인 언니니까.”
“레타나시아,네가 그렇게 날 생각하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어휴,황제 폐하가 미웠겠어.”
“네?”
“그렇잖니? 넌 어려서부터 매일같이 나와 놀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유폐당해서 그러지 못했 고. 날 유폐시킨 건 폐하시니 네 가 원하는 걸 방해한 폐하가 미울 만도 하지.”
아리스티네가 생긋 웃었다. 다 알겠다는 듯 자애로운 웃음이었다.
“뭐,어린 마음에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니. 난 이해한단다.”
“무슨 말씀을……. 저는一.”
“어렸을 때의 일인데 왜 그렇 게 정색하고 부정하니?”
아리스티네가 새처럼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정색하면 남들이 찔리는 줄 알겠다.”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레타나시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천천히, 레타나시아는 굳었던 입매를 끌어 올렸다.
‘역시 쉽지 않아.’
유폐당해 혼자 산 주제에 이렇 게 교묘하게 사람을 몰아가다니.
레타나시아가 부드럽게 눈꼬리 를 휘며 웃었다.
연둣빛 눈동자 가 봄날 새싹처럼 다사롭게 빛 났다.
“아리스티네 언니도 참,짓궂으셔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가 어찌 부황 폐하께 그런 불경 한 마음을 품을까요.”
“그러니?”
“아리스티네 언니가 제 하나뿐인 언니인 것처럼,부황 폐하 역 시 제 하나뿐인 아버지시잖아요.”
“그럼 나도 소중하겠구나.”
그때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라우넬리안 오라버니.”
레타나시아가 가까이로 다가오 는 라우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사 랑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라우넬리안 오라 버니도 제 하나뿐인 오라버니이신걸요!”
“누가 네 오라비야?”
라우넬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타르칸의 품에 있는 아리스티네 를 끌어안았다.
“내 동생은 우리 리네 한 명뿐인데.”
“오라버니.”
아리스티네가 한숨 쉬며 책망 하듯 라우넬리안을 불렀지만,라우넬리안은 오히려 그녀를 더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러곤 레타나시아를 노려보았다. 마치 아리스티네를 보호하듯이.
레타나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 고 그 모습을 보다가 힐끔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아내를 끌어안은 라우넬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레타나시아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처연하게 말했다.
“라우넬리안 오라버니께서는 여전히 저를 미워하시는군요. 그래 도 전 괜찮아요. 이제는 익숙하니까.”
레타나시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미소 지었다.
보는 사람이 더 아 픈 미소였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녀에게 눈 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라우넬리안에게서 아내를 빼 오면 아내의 몸에 무리가 갈까 그 고민만 하고 있었다.
결국 레타나시아가 타르칸을 불렀다.
“그런데 타르칸 왕자님.”
그제야 타르칸의 시선이 그녀 를 향했다.
“저,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연둣빛 눈동자가 빤히 그를 올 려다보았다.
마치 어렸을 적 연둣빛 눈동자를 한 아리스티네가 그랬던 것 처럼.
타르칸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글쎄,본 적 없는 듯한데.”
그 말에 레타나시아는 커다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부끄 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 저었다.
“아,실례했어요. 하긴,제가 언제 타르칸 왕자님과 만난 적이 있겠어요.”
하하,웃음을 흘리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제가 어렸을 때……. 아,아니에요.”
레타나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곤 하지만, 누가 봐도 뭔가 있는 얼굴이었다.
“이제 왕자님께선 언니의 남편 이시니까……”
시무룩하게 홀리는 목소리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무슨……”
“아,그렇지.”
레타나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되물으려던 타르칸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결혼 축하해요,아리스티네 언니. 이 말부터 해야 했는데 반가움에 잊었네요.”
축하한다며 활짝 웃는 얼굴은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였다.
레타나시아는 힐끔 아리스티네 의 얼굴을 살폈지만,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고마워.”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짧게 답 할 뿐.
‘뭐야,이 정도면 제 남편을 의심해도 좋잖아.’
라우넬리안과 타르칸의 결속을 막으려면 아리스티네와 타르칸 의 불화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귀찮은 짓을 벌였건만.
‘……정말로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위험해. 그리고 부황께서는 아리스티네 언니를 뭐 하나 할 줄 모르는 반편이라며 우습 게 보고 있지만,내가 보기엔 언니가 제일……’
아리스티네가 아이루고에 간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를 따르는 아이루고 백성들은 얼마나 많으며,그 녀가 이룩한 업적은 또 얼마나 찬란한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의료 강국이 된 아이루고를 야만의 나라라 부르지 않았다.
‘메스 수입이 막히면 자기들 손해니까.’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사업 줄 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강한 카드를 들고 돌아 오다니.’
레타나시아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아리스티네 언니는 그렇다 쳐 도 타르칸 왕자는 내게 넘어 올……
애교 있는 미소를 지은 채 타르칸을 힐끔 바라보던 레타나시 아가 멈칫했다.
“내 아내에게 더 이상 손대지 마시죠.”
“네놈 아내이기 전에 내 동생인데?”
“오빠가 동생을 너무 싸고도는 건 보기 좋지 않죠.”
“난 남들 눈 따위 신경 안 써. 난 내 동생 눈만 신경 쓰거든. 왜,너는 내 동생 말고 남들 시선이나 신경 쓰나 봐?”
라우넬리안의 도발에 타르칸이 삐뚜름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남들 눈 따위 신경 썼다면 막사를 무너트리지 않았겠죠”
라우넬리안은 순간적으로 타르 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불꽃 이 확 튀어 올랐다.
“너,너 이 새끼가……!”
“어이쿠.”
타르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라우넬리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생각지도 못한 난장에 미소를 그리던 레타나시아의 입술이 가라앉았다.
궁인들이 깍깍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력 사태에 당황한 듯했다.
레타나시아는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이 기회에 아리스티네 언니의 측근을 내 편으로 꼬시는 것도一.,
궁인들을 본 레타나시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들은 폭력 사태에 놀라 깍,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었다.
궁인들은 아리스티네를 둘러싼 채 깍깍거리며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너무 낭만적인 재회였어요,비 전하.”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전 눈물마저 났답니다.”
“역시 저희가 그 침대를 가져 왔어야 하는데……”
“맞아요. 비전하께서 혼자 쓰시 기 좀 그렇다고 하신 그 침대요.”
궁인들이 음흉한 얼굴로 웅힉힉,웃었다.
‘응힉헉? 왜 저딴 식으로 웃는 거야. 역시 아이루고인들은 천박 해.’
레타나시아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땅히 가장 사랑받는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었으며,누구나 그녀에게 말 한 번이라도 붙이고 싶어서 난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감히 이 나를……’
레타나시아가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부황 폐하께 가시는 길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너무 시간을 많 이 뺏었네요. 저는 이만……”
그녀가 고상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린 채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레타나시아를 붙잡는 말도,배웅하는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리네 앞에서 폭력을 휘두르시다니,그러고서도 오라버니라 할 수 있습니까.”
“너는 날파리를 쫓는 것도 폭력이라 하나 보지?”
“비전하,걱정 마세요. 저희가 누굽니 까.
“저희는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응힉힉힉힉힉.
우아하게 인사하는 레타나시아의 이마 위로 핏대가 솟았다.
‘진짜 거슬리네,저 웃음소리.’
그녀는 몸을 일으킨 후,획 돌 아섰다.
‘두고 봐.’
까득,고운 입술에서 나는 거 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섬 뜩한 소리가 나왔다.
‘내 오늘의 모욕은 반드시 백 배,천 배로 갚아 줄 테니.’
레타나시아가 고개를 돌려 아리스티네 쪽을 바라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한 명, 한 명 사람들을 훑는다.
‘그래,지금을 즐겨 놓는 게 좋 을 거야.’
레타나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 리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어라? 레타나시아는 어디 갔 지?”
궁인들과 수다를 떨던 아리스티네가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어,그러게요?”
궁인들이 주변을 둘러보다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아까 아리스티네를 대하는 분 위기로 봐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하지만 비전하의 친정에 책잡 히기 싫은 것이 궁인들의 마음.
윗사람이 떠날 때 고개를 숙이 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예법이 었다.
하물며 이곳은 실바누스.
예법에 있어 아이루고보다 훨 씬 더 엄격한 나라이니 더 걱정 이 됐다.
“우리 보고 비전하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고 하면 어쩌죠?”
“인사 못 드린 건 명백히 우리의 실수이긴 한데……. 워낙 존재감이 없으셔야지.”
“실바누스의 둘째 황녀님은 봄을 몰고 오는 분이라고들 하던 데 난 모르겠던걸.”
“우리 비전하 앞에서는 태양 앞의 등불이니까.”
궁인들이 소곤거리다가 결론을 내렸다.
“나쁜 건 존재감 없으신 그분이지. 비전하를 모시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응,맞아.”
아리스티네는 조금 서먹한 눈 으로 그런 궁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니,아부 실력이 더 는 것 같은데…….,
그때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