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
아리스티네는 애써 침착하게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속은 그러지 못했다.
‘태의를 부르면 내가 임신했다는 게 바로 드러날 거야.’
그리고 아이가 ‘권능’을 타고났 는지 확인하려 들 것이다.
확인은 매우 수월했다.
지금은 내버려 두고 있는 크리세아 궁의 경비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왜 그러느냐. 몸이 안 좋으면 당연히 태의에게 보여야지.”
황제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라우넬리안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아리스티네가 아 프다는 핑계를 대며 짜 놓은 여 론을 지금 당장 뒤엎어 주겠다 는 의지가 가득했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긴 한데……’
문제는 정말로 태의에게 진맥 을 받으면 곤란하다는 거였다.
“자,어서 태의를 불러오라. 내 딸의 건강만큼 중요한 게 어딨겠느냐!”
황제가 시종에게 큰 소리로 외 쳤다.
시종이 황제의 명에 고개를 숙 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나직하면서도 위압감이 가득 실린 목소리에 시종이 저도 모 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르 칸을 바라보았다.
감히 황제인 자신의 명령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지금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타르칸 왕자!”
그 일갈에 타르칸의 금안이 스 르륵 황제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황제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인간의 눈이 아니야……
짐승 같은 눈.
금안에 날카로운 예기가 서리 자 야생의 짐승을 마주친 것처럼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 불쾌감이 사실 압도당한 두 려움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자각도 하지 못한 채였다.
“폐하께서야말로 선을 넘으셨습니다.”
흥분한 황제와 달리 타르칸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방만하게 말했다.
“아이루고의 왕자비를 실바누스의 태의에게 보이겠다니.”
내가 뭘 믿고?
그런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하! 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의 황녀다. 내 딸이야.”
“그렇다고 아이루고 왕자비라 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건강 상태를 타국에 쉽사리 노출시킬 수 없는 게 내 입장입니다.”
“이놈이……!”
“게다가 폐하께서도 조금 전 아이루고가 더 친정같다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댁이지만 친정보다도 더 친정 같은 아이루고에서 잘 챙길 테니 걱정 마 십 시오.”
입매를 비틀어 짓는 미소가 그 렇게나 사람의 신경을 긁을 수 가 없었다.
콰앙!
원래도 인내심이 짧은 황제였으니 그가 테이블을 부서져라 내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거친 서슬에도 타르 칸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훨씬 왜소한 황제가 패악을 부려 봤자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자신이 언성만 높여도 호 들갑을 떨며 납작 엎드리던 시종들을 봐 왔던 황제의 눈앞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 말은 아이루고에서 실바누스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 이냐! 애써 이룩한 평화를 지금 본인 입으로 부정해?! 그것도 네놈의 혼사로 이뤄진 평화가 아니냐!”
전쟁을 일으켜 아이루고의 뒤 통수를 칠 생각이 가득한 황제 의 입에서 평화 이야기가 나오니 우스울 뿐이었다.
아리스티네가 실소를 머금는 사이, 타르칸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1년도 안 된 평화지요. 신뢰 를 쌓는 데엔 시간이 필요한 법 아닙니까.”
황제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저놈이 내가 뒤에서 전쟁을 준비 중인 걸 알고 있나?’
타르칸의 얼굴을 살펴봤으나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타르칸은 여유롭다 못해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눈알.’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목덜 미에 땀이 배어 나왔지만,황제 는 인정하지 않았다.
‘야만인 주제에 감히 내 앞에 서 나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네놈에게 도 좋을 일이 없을 텐데.”
그 말에 타르칸이 짧게 웃었다.
“원래 앞뒤 생각하면서 움직인 적이 없어서.”
타르칸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 며 말을 이었다.
“하긴,그것은 황제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만.”
“뭐라?”
“와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테이블을 내려치며 언성을 높이고,조금 마음에 안 든 다고 이놈 저놈 하고.”
타르칸은 현재 아이루고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제후국의 왕세자도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아이루고는 제국과 대 등한 위치에 있는 독립국.
타르칸이 황제의 명에 어깃장 을 놓은 것은 분명 무례한 일이 었지만,황제의 반응은 현명하다고 볼 수 없었다.
특히 황제가 정말로 평화를 중요시한다면.
“실바누스는 법도가 발달한 나라라 들었는데.”
나른하게 중얼거린 타르칸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황제 폐하께서는 그 귀감이십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조롱이었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저는 믿을 만한 사람에 게 제 아내의 몸 상태를 부탁하러 가 보아야겠습니다.”
타르칸은 황제가 허락하기 전 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 운 태도로 아리스티네를 부축했다.
타르칸과 아리스티네 그리고 라우넬리안이 방을 나갈 때까지, 황제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달칵.
부드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그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감히!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이 나를 능멸해!”
챙그랑! 쾅! 우지끈!
황제가 테이블 위를 옆으로 쓸 어버리면서 온갖 것들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방 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됐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황제의 번들거리는 눈이 다음 희생양을 찾아 희번덕거렸다.
시종들과 시녀들은 모두 무릎 꿇은 채 납작 엎드린 지 오래였다.
그들의 등을 굽어보던 황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흥,제법이더군.”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던 라우넬리안이 불쑥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 널 내 동생의 남편으로 인정한 건 아니야.”
그가 똑똑히 알라는 듯이 타르칸에게 말했다.
“예,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난 인정 하지 않았다니까?”
“그렇군요,형님.”
아웅다응하는 두 사람을 보고 아리스티네는 한숨을 쉬며 소파 에 앉았다.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인데 피곤해.’
그런 기색이 읽혔는지 두 사람 은 투닥거리는 것을 멈추고 아리스티네의 상태를 살폈다.
아리스티네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물을 마셨다.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 던 타르칸이 중얼거렸다.
“실바누스의 황제는 생각보다 더한 자더군.”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었다.
제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황제는 대전에서도 야만인이니, 뭐니 하며 아이루고인들을 대놓고 무시했다.
‘내게는 마수와 붙어먹는 놈들 이라며 침대에서 천박하게 굴라 는 말까지 했지.’
평소 황제의 연행을 봤을 때 오늘 일은 놀랍긴커녕 당연했다.
그런 아비를 둔 덕분이라고 할 지,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에서 왕후나 공주들의 견제가 아프지 도,가렵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사고를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면 오라 버니를 북방으로 보내지도,나를 유폐시키지도 않았겠지. 무엇보 다 아이루고와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고.”
아이루고와의 전쟁을 기점으로 실바누스는 천천히 쇠락의 길로 향해 가고 있었다.
황제의 관을 쓰면 안 될 자가 황제가 되면 어떤 사달이 나는 지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였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쌌다.
“이제 예전 일은 잊어. 내가 널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그녀를 보는 타르칸의 금안이 내리찍는 햇살처럼 다사로웠다.
“행복……”
아리스티네는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이 은근슬쩍 타르칸의 가슴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부드러우면서 단단한,따뜻한 촉감에 그녀는 단번에 행복을 되찾았다.
‘아,안정된다……’
이것이야말로 힐링이었다.
가슴 테라피 최고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아리스티네 의 손가락을 보며 라우넬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내 동생이……’
그의 마음속에서 아리스티네는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자라나는 모습을 다 못 보고 생이별을 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순수하고 순진한 동생이 빵빵한 남자 가슴을 조물조 물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때,아리스티네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싱그러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깃들며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 빛나고 흰 뺨이 사랑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내 동생이 가슴 좀 만질 수 있지!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데!’
미소 짓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가슴속에 싹트던 착잡함은 다 사라졌다.
라우넬리안이 가늠하듯 타르칸 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대흉근이 인상적이었다.
〈아니에요,타르칸은…… 가슴 이 빵빵하고 잘생겼어요.〉
문득 동생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잘생겼다는 게 얼굴이 아니라 가슴이었나.’
라우넬리안이 타르칸의 얼굴을 살폈다.
‘뭐,나쁘지 않은 얼굴이다만.’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라우넬리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동생에게 세상에서 제일 잘생 긴 오빠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이뤄졌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었지 만,어쨌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잠시 힐링 타임을 가지던 아리스티네는 곧 정신을 차렸다.
손을 떼고 타르칸의 얼굴을 살 피니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이긴 한데…….
‘왜 눈빛이 손을 떼냐고 아쉬 워하는 거 같지?’
참으로 요망한 눈빛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아내로서 어쩔 수 없이 아쉬워하는 남편을 달 래 주기 위해 가슴에 착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진지한 얼굴 로 말했다.
“왕후와 황제가 손을 잡은 둣 해.”
이전에도 한 번쯤 의심해 봤던 생각이었다.
설마 그렇게까지,하고 넘겼지 만 오늘 황제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황제는 타르칸에게 가해질 위 협에 대해 아는 눈치였으나,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있다.
또,“내 딸이니까”라고 납득했던 것도 내 딸이니 이 정도 눈치는 챘을 거라는 어조가 아니 었다.
내 딸인 것을 생각해 그쪽에서도 말했을 수 있다.
‘一라는 뉘앙스였지.’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리네.”
두 남자가 놀라 아리스티네에 게 물었다.
아리스티네는 전략용 통신석 두절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을 라우넬리안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법사 아세나에게 조사를 명해 들은 결과까지도.
두 사람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 해졌다.
“하지만 긴밀한 관계는 아니에요.”
만약 밀접한 동맹 관계였다면 황제가 아리스티네가 임신했다 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모른다.
“확실히 왕위 계승에 외세를 이용하는 건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이지.”
라우넬리안이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칸의 세력이 치고 올라오면서 아이루고의 왕위 승계구도가 바뀌었다.
이전엔 누구나 하미르를 지지 했지만,지금 흐름은 완전히 타르칸에게 몰렸다.
“그 상황에서 왕후가 실바누스와 손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아.”
“네,왕위를 이은 후 대가를 치러야 하니 타국과 손을 잡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전부를 잃느니 일부라도 얻겠다는 선택을 하는 자들도 있으 니까.”
“역사에도 많이 있지.”
말을 주고받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나를 하나도 경계하지 않는 게 의외였는데 왕후 쪽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흘렸겠구 나.’
왕후 쪽에선 실바누스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황제가 타르칸과 하미르 중에서 저울질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왕후가 보기에 그 저울은 타르칸 쪽으로 기운 상태였을 것이다.
‘어쨌든 핏줄인 내가 타르칸의 편에 섰으니 황제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면 그보다 더한 이득을 보장해 주는 수밖에 없어.’
판돈을 약속해 주는 동시에 네 가 들고 있는,그 아리스티네라 는 카드는 쓸모없는 카드라고 바람을 넣었을 터.
특히 타르칸이 지금의 입지를 다지게 된 데에는 아리스티네의 공이 컸으니 더더욱 그랬을 거다.
아리스티네가 벌였던 모든 일 들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 기 위해 축소시키거나 그 공을 다른 곳에다 돌렸을 테지.
‘황제로서는 듣고 싶었을 소식이니 신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 을 것이고.’
사람에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성향이 있다.
황제는 참 황제답다고 해야 할 지,그 성향이 유독 강했다.
‘굳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 어도 황제는 왕후의 손을 잡았 겠지만.’
눈엣가시로 여기던 타르칸을 없앨 계획이라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왕후가 그렇게 주장한 덕에 황제가 나를 크게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된 일이야.’
경계하는 자에게서 정보를 빼 내기는 참 힘든 일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할 일이 많 겠어.”
“우선 꼬리부터 잡아야지.”
“황궁은 뒤에서 슬슬 장악해 나가고 있어.”
“뭐,아이루고 왕궁에도 내 입 김이 안 닿는 곳이 없지.”
두 남자가 은근슬쩍 능력을 과 시하며 어필했다.
아리스티네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쿵짝이 잘 맞아.’
“그럼 꼬리 잡는 건 맡겨도 될까?”
“이 오빠만 믿거라.”
“빠르게 잡아 주지.”
두 남자의 눈에서 경쟁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럼 믿고 맡길게요.”
아리스티네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걱정이 없었다.
‘황제가 아둔하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불행이라 고 생각해야 할지.’
하긴,그렇게나 학대했던 딸에게 독을 쥐여 주는 것부터가 멍 청한 행동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학대당한 서커
스단의 사자는 다 자라 강력한 힘을 얻고서도 사슬을 끊지 못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안의 사자 가 아니야.’
아리스티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여전히 황제가 그녀에 게 주었던 독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꼬르르륵.
조용한 가운데 나직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배,배가 고프네!”
“저도 배가 고픕니다,형님!”
두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게 더 부끄럽거든’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이들은 몰랐다.
이 꼬르륵 소리가 불러올 참사를......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