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리스티네가 배가 고프다는 말에 온갖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졌다.
임신 중인 황녀 전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였다.
하지만.
“우읍……!”
아리스티네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리네?!”
“괜찮아?”
두 남자가 아리스티네의 양쪽 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성거렸다.
“비,비려……”
아리스티네가 지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두 남자의 눈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
“감히 내 동생에게 비린 음식따위를 내놓다니.”
“이것이 실바누스 셰프의 수준 인가.”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두 남자 때문에 애먼 셰프들만 죽어 나갔다.
“우욱!”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헛구역 질에 궁인들이 서둘러 클로슈 (cloche)를 닫았다.
사실 음식은 모두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그러면서도 충분한 영양식으로 준비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곡물은 물론이고 풀까지도 비려한다는 게 문제였다.
클로슈가 전부 닫히고 창문을 전부 열자 좀 살 것 같았다.
아리스티네는 지친 이마를 등 받이에 대며 숨을 골랐다.
“모두 정성 들여 준비해 주었 는데 못 먹어서 미안해.”
아리스티네의 말에 시무룩해져 있던 셰프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땀이 살짝 배어 나온 이마와 혈색이 옅어진 입술,처연히 내리깔린 긴 속눈썹.
병약하고 가날픈 모습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호 본능 을 불러일으켰다.
“아닙니다,황녀 전하!”
“그 무슨 말씀을……!”
“다 저희가 부족한 탓입니다!”
저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도
가장 먼저 우리를 챙겨 주시다 니!
어떻게든 내 동생이 먹을 수 있는 걸 만들라며 윽박지르는 라우넬리안에게 굴려지던 셰프 들이 감격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아리스티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함구 할 만큼 충성심 높은 사람들이 었다.
원래도 회임 중이신 황녀님께 서 조금이나마 드실 수 있도록 힘을 내자고 생각했는데, 아리스티네가 이렇게 나오니 콧잔등이 시큰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황녀 전하! 저희가 곧 다른 음식을 올 려一.”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조금 쉬시지요.”
아이루고 궁인이 실바누스 셰 프들의 말을 싹둑 잘랐다.
“비전하,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드셔서 그러신가 봅니다.”
궁인들이 아리스티네의 팔을 주무르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 비전하께는 아무래도 아이루고 음식이 더 익숙하고 입에 맞으실 테니까요.”
“아니,황녀 전하께서는 태생이 실바누스고 성년이 되도록 이곳 에서 살았는데 무슨……”
“원래 사람 입맛은 바뀌기 마련이지요. 아이루고에서는 비전 하께서 얼마나 잘 드셨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전하. 이럴 줄 알고 저희가 다 준비해 왔습니다.”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주무르던 궁인이 눈짓을 하자 다른 궁인들이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음식 쟁반을 가득 실은 트롤리 여러 대가 식당 안 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오기 시 작했다.
궁인들이 가슴을 쭉 펴고 아리스티네에게 말했다.
“후후,비전하 이제 고생 끝입니다. 저희가 왔으니까요.”
“저희야 비전하의 취향은 다 꿰고 있지 않습니까.”
“셰프들도 다 그대로 데려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실바누스의 시녀들과 셰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간살맞게 황녀 전하께 아양 떠는 것 좀 봐.’
‘아니,이 저택의 주인은 우리 황자 전하신데 왜 자기들이 저렇게 활개람?’
‘이곳에서 황녀 전하를 모실 사람은 우리인데 왜 자기네들이……’
본디 궁인이나 시녀들은 주인 의 총애를 다투는 경쟁심이 있기 마련이다.
라우넬리안의 아랫사람들은 모두 아리스티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매일 밤 후회하며 내 동생을 지켜줘야 했었다고 훌쩍이는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직접 보게 된 황녀님은 모시는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우신 데다가 아랫사람에 게 다정했다.
심지어 임신 중이셨다.
저도 모르게 귀여운 황손을 생 각하며 흐뭇해지면서도 고생하 는 황녀님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돌 이 옆에서 저러니 경쟁심에 화 르록 불이 붙지 않을 리가.
무엇보다 자신의 주인들 역시 경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흥,우리 리네는 원래 실바누 스 음식을 좋아해. 뭐니 뭐니 해 도 이 오빠가 있는 모국의 음식 이니까. 입덧 시작하기 전에 내 가 먹여 주는 거 얼마나 잘 먹었는데.”
“형님께서는 제 아내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봅니다. 제 아내는 웬만한 건 다 잘 먹어요. 취향에 맞지 않는 것도 그냥 내색 없이 잘 먹죠.”
“그래서 내가 지금 내 동생이 안 좋아하는 걸 억지로 먹였다고?”
“역시 황자 전하라 그런지 머 리가 아주 나쁘진 않군요. 부황 을 닮지 않아 다행입니다.”
파지지직!
두 남자 사이에서 찌릿한 전기가 튀었다.
‘우리 황자님 이겨라!’
‘타르칸 전하! 절대 지면 안 됩 니다!’
시녀들과 궁인들이 두 손 모아 자신의 주인을 응원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루고의 셰프 가 클로슈를 열며 말했다.
“비전하,비전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것으로 준一.”
“우욱!
하지만 셰프의 말은 채 끝나지 도 못했다.
다시 헛구역질을 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사색이 된 셰프가 빠르게 클로슈를 닫았다.
“흥,아이루고 음식은 익숙해서 괜찮을 거라더니?”
“우리 황녀님의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지.”
실바누스 시녀들이 아까 당한 수모를 그대로 갚아 주었다.
궁인들과 시녀들,그리고 셰프 와 셰프 사이에서도 전류가 파바박 튀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아리스티네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드시지 못해서 어떻 게 해요.”
“이러다가 정말 쓰러지시겠어요.”
자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아리스티네는 기운 빠진 상태로 애써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모처럼 여기까지 와서 신경 써서 요리한 건데 미안해. 나는 괜찮으니 다들 식사해. 다들 아 무것도 못 먹었지? 오라버니도 식사하세요. 칸,너도.”
아리스티네는 안심시켜 주기 위해 미소를 지은 것이었지만, 그 지친 미소가 보는 사람의 마 음을 더 아프게 울렸다.
원래 눈을 내리깔기만 해도 처 연한 분위기가 날 정도의 미인 이다.
궁인들과 시녀들,셰프들은 속으로 우리 비전하,우리 황녀님을 부르짖었다.
본인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힘든데 우리 같은 사람의 끼니 까지 챙겨 주시다니.
“리네, 뭐 먹고 싶은 것 있느 냐? 뭐든 말해 보거라. 이 오빠 가 다 준비해 줄 테니.”
“아뇨,입맛이 없어서……”
아리스티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건만 몇 번 역한 냄새를 맡자 식욕이 다 사라졌다.
이 많은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게 참 억 울했지만,어쩔 수 없었다.
잠시 괜찮았던 게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몰려오는지 전보다 더 입덧이 심했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해. 이 러다간 몸이 못 버텨. 안 그래도 체력이 없는데.”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쓸며 걱정스레 말했다.
“내 아내 얼굴이 반쪽이 됐어.”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그치만 비려서 못 먹겠는걸.”
아내의 투정에 타르칸은 뺨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밥이 되는 것부터 먹는 게 좋 겠지만,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뭐라도 먹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타르칸이 셰프들 사이에 서 있던 한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선을 받은 여자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왔다.
“비전하, 허락하신다면 제가 한 번 비전하께서 드실 수 있는 것 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지금은 입맛이 별로 없는 데……”
어차피 만들어 봤자 못 먹을 게 뻔해서 아리스티네는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다를 수 도 있어.”
타르칸의 말에 아리스티네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네 디저트를 만들던 파티시에니까.”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리 파티시에……?”
멍하니 중얼거린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보랏빛 눈동자 속에 별이 들어 찬 것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타르칸을 봤을 때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흡사 구원자라도 보는 얼굴이 었다.
‘우리? 우리라고?’
‘나한테도 우리 오빠라고 안 불렀는데?’
타르칸과 라우넬리안의 심기가 대번에 불편해졌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저리 반 색하니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사이 아리스티네는 홀린 듯 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시에에게 다가갔다.
“네가 바로 내 파티시에였구나.”
잃어버린 정인이라도 찾은 듯 달콤한 음성이었다.
아리스티네는 파티시에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비전하……”
파티시에는 고귀한 분이 손까 지 잡으며 자신을 반기자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하지만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아리스티네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지금 난 멀쩡하고 맛 있는 음식도 제대로 못 먹는 처지야. 디저트 가져와 봤자……”
완벽할 게 분명한 파티시에의 디저트를 먹긴커녕 그 앞에서 헛구역질을 해 댈 것이다.
그건 디저트에 대한 불경이었다.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게……”
잔뜩 풀이 죽어서 중얼거리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파티시에 가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비전하!”
그녀는 아리스티네의 앞에 부복했다.
“그런 말씀 거둬 주시옵소서! 제가 기필코 비전하께서 드실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풀조차 비려서 못 먹는데……”
“신에게는 아직 열두 포대의 밀가루와 버터가 남아 있습니다!”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보는 파티 시에의 얼굴에는 목숨을 건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이리 믿음직스러울 수가!
체념에 가득 찼던 아리스티네 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대는 나를 단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었지.”
“이번에도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아리스티네와 파티시에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파티시에가 진중한 눈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비전하,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 야 합니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어느새 굳 건한 신뢰가 가득했다.
“그대만을 믿겠어.”
“결과로 그 기대에 부응하겠습 니다.”
고개를 한 번 숙인 파티시에가 지체 없이 뒤돌아 방을 나갔다.
아리스티네는 오래도록 그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어쩐지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타르칸과 라우넬리안은 왠지 불길함을 느꼈다.
‘왠지 내 동생이 나보다 저 파 티시에를 더 믿는 거 같아……’
‘왠지 내 아내가 나보다 파티 시에를 더 의지하는 거 같은 데…….’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일부러 데려오긴 했지만 뭔가 상상한 것과 달랐다.
파티시에까지 데려오다니 내 남편 최고라고 답삭 안겨서 칭 찬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칭찬과 신뢰와 애정 은 전부 파티시에가 받고 있지 않은가.
‘내 아내의 칭찬을 렛어 가다 니.’
‘저 파티시에…… 질투 나!’
타르칸과 라우넬리안이 이글거 리는 눈으로 사라지는 파티시에 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와중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남자는 본능적으로 서로 같 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 달았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파티시에 는 이겨야지!’
‘차라리 이쪽이 상대인 게 낫 지!’
어쨌거나 남편이나 혈육이 호 적수인 게 나았다.
‘임시 동맹이다.’
‘성립.’
두 남자가 처음으로 타협한 극적인 순간이었다.
* * *
레타나시아는 엉망이 된 방 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귀한 기물이 엉망이 된 채 깨진 것을 보니 저절로 머리가 아팠다.
‘전쟁을 일으킨답시고 군자금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데 이렇게 보물까지 다 깨 버리면……’
이미 작년 연말에 책정한 예산 보다 오버되었다.
‘젠장, 더 세금을 올리면 정말 로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멍청한 아비를 둔 탓에 자신만 곤란했다.
차라리 후계자로 완전히 책봉 되었다면 의욕이라도 났을 텐데, 권력 욕심이 엄청난 황제는 계 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번듯한 후계자가 있으면 그쪽에 공식적으로 권한이 위임되고,그건 곧 권력 역시 나 눠진다는 뜻이니까.
황제가 다른 자식들을 미워하니 레타나시아가 다음 대 황위를 이을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귀환한 라우넬리안의 세력이 심상찮으니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황태녀 자리에 있는 것과 그냥 황녀로 움직이는 건 운신의 폭도다르다고.’
“오,내 사랑하는 딸이 왔구나.”
그때,술을 입에 털어 넣던 황제가 그녀를 반겼다.
레타나시아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키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부황 폐하.”
사뿐사뿐 황제에게 다가간 그 녀가 밉지 않게 그를 흘기며 술 잔을 빼앗았다.
“아이참, 술은 몸에 좋지 않으 니 그만 드시라니까요.”
“흐음?”
“레아는 부황 폐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부황 폐하께 서 오래오래 살아 계셔야지요.”
사실은 당장 자신을 황태녀로 봉하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마음을 까마득히 모 르는 황제는 딸의 애교에 허허 웃었다.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진짜 딸은 레아 너뿐이로구나.”
“부황 폐하……”
레타나시아는 안쓰러운 표정으 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부황 폐하를 이리 수심에 잠 기게 하다니. 라우넬리안 오라버니도 아리스티네 언니도 참 너 무해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이복 오빠 와 언니를 탓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 언니는 예전부터 그랬지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친 정에 돌아왔으니 좀 달라져도 좋을 텐데……”
레타나시아가 푹 한숨을 내쉬
“하지만 걱정 마세요,부황 폐하. 제가 누굽니까.”
“내 딸이지.”
“그래요,부황 폐하의 사랑스러 운 딸이 아닙니까.”
레타나시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폐하의 걱정을 덜 묘안이 있 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눈이 빛났다.
“묘안이 라?”
씨익,레타나시아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타르칸 왕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