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화
씨익,레타나시아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제가 타르칸 왕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 졌다.
“그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네,폐하.”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뻣뻣한 첫째보다는 애교 많은 둘째가 훨씬 사내의 마음을 잘 사로잡 을 것 같았다.
황녀라는 지위를 떼고 보더라 도,레타나시아는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존재 아니던가.
하지만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는 레타나시아의 태도를 보니 그 이상이 있는 둣했다.
뒷말을 기다리는 황제의 눈빛 에 레타나시아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까 타르칸 왕자와 회랑에서 마주쳤답니다.”
“마주쳤다니.”
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대감이 가득한 황제의 눈을 보며 레타나시아가 고개를 끄덕 였다.
“부황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 리기 위해 일부러 마주쳤지요.”
“역시 내 자식은 레아, 너뿐이구나.”
황제가 껄껄 웃으며 딸을 치하 했다.
“아이참,부황 폐하께서도. 오라버니나 언니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어요.”
“섭섭해하라지. 내 기쁨은 오로지 너뿐이거늘.”
피식 웃은 황제가 고개를 숙이며 은밀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읽었느냐?”
“물론이지요.”
레타나시아의 대답에 황제의 눈에 흡족함이 들어찼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며 입 끝을 올렸다.
레타나시아의 능력.
그건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통 해 기억을 읽는 것이었다.
레타나시아가 태어났을 때,황 제는 그녀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황제의 관심은 오로지 아리스티네에게 쏠려 있었다.
실바누스 황실의 직계는 대부분 능력을 타고난다.
하지만 그중에서 ‘권능’이라 불릴 만큼 위대한 능력을 타고나 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아리스티네는 바로 그 권능을 타고난 것이다.
제 대에서 권능을 타고난 아이가 나왔다는 사실은 탐욕스러운 황제의 눈을 벌겋게 만들었다.
황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여러 번 위험에 빠트리며 아리스티네 가 위기의 순간에 잠재력을 싹 퇴우길 바랐다.
어서 권능을 각성하도록.
각성한 권능으로 자신을 이 세 계의 절대자로 만들어 주기를.
어떤 의미에서 레타나시아에게는 다행이었다.
라우넬리안은 첫 아이였던지라,기대에 찬 황제가 어서 능력을 각성하길 바라며 학대했다.
하지만 각성한 능력이 황제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쓸모도 없는 염동력이었기에 거의 방치되었다.
보통 염동력을 지닌 황족들은 숟가락을 구부리거나 작은 물건 을 허공에 띄우는 정도의 힘만 발휘했다.
대체 성장 과정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지금 라우넬리안의 염 동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지만.
황제는 염동력을 지닌 아들에 게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그뿐 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황후가 아리스티네를 임신했기에 그의 관심은 이미 그쪽에 집중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려 권능을 타고나 크리세아 궁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던가.
황제는 아리스티네의 능력을 빨리 각성시키고 성장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극한의 상황에
빠트려도 아리스티네는 권능을 각성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아리스티네를 각 성시킬까,골몰하던 황제에게 권 능도 없이 태어난 둘째 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덕분에 레타나시아는 황제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학대를 피 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난하게 능력 을 각성했다.
타인과 신체를 접촉해 기억을 읽어 내는 능력을.
권능을 타고난 주제에 그걸 각 성조차 하지 못하는 아리스티네 에게 분노하고 있던 황제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능력 각성은 전부 5세 이전에 일어난다.
기대와 욕심이 컸던 만큼 각성도 못 한 채 여섯 살이 된 아리스티네는 황제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시작부 터 좌초시킨 죄인이었으니까.
그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자식이 유일하게 흡족할 만한 결과를 낸 것에 대단히 기뻐했다.
레타나시아가 신이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리스티네가 권능을 각성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그러지 못한 상황에서 레타나시아의 능력은 황제에게 아주 필요한 것 이었다.
비록 제약이 많은 능력이긴 했 지만,정치적으로 참 요긴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아주 귀중한 사실을 알아냈답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서 말해 보거라.”
“타르칸 왕자의 첫사랑을 봤어요.”
“첫사랑?”
기대와 다른 대답이었다.
타르칸의 약점이나 치부 같은 것을 보길 원했다.
첫사랑 따위를 봐서 뭘 하겠는 가.
황제의 실망에도 레타나시아는 깊게 미소 지었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 더군요. 비록 비쩍 마른 몸이 볼 품없어 보이긴 했지만.”
“흐음.”
황제는 시큰둥해져서는 성의 없이 대꾸했다.
레타나시아여서 이 정도인 것 이지,다른 이였다면 대답조차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잘 가꿔 자랐으면 굉장한 미인이 되었을 이목구비였어요.”
레타나시아가 빙긋 웃었다.
“저처럼요.”
가볍게 덧붙인 말에 등받이에 기대 있던 황제가 허리를 세웠다.
“허,그 계집이 너처럼 생겼더 냐?”
“어렸을 때의 모습이니까요. 당 연히 저처럼 자라진 못했겠죠. 애초에 제가 어렸을 때의 모습 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고요.”
레타나시아는 황제에게 사랑받 는 황녀답게 어렸을 때부터 귀티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눈색은 똑같았어요.”
“그냥 금발이 아니라 색이 같았다고?”
실바누스 황가의 직계는 대대 로 특정한 색의 금발과 은발만이 태어났다.
핏줄에 새겨진 능력의 증거였다.
벌꿀과 같이 짙은 금발과 보랏 빛이 살짝 도는 은발은 확실히 희귀했다.
황가의 직계가 아닌 존재가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추억은 보정되기 마련이니까 요.”
레타나시아가 미소 지었다.
이것이 바로 레타나시아가 가진 능력의 최대 단점이었다.
기억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의 기억에 따라 진실이 왜곡 되기도 했다.
그게 바로 ‘권능’과의 차이였다.
‘권능’인 제왕안이나 예지는 오로지 진실과 사실만을 보여 주 니까.
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바로 기억에 담긴 대상의 감정 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
“굉장히 애틋한 기억이었어요. 지금까지도 소중히 품고 있더군요.”
그 말에 황제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왜 레타나시아가 타르칸의 마 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지 이제 깨달았다.
“이거 일이 쉽겠군.”
“네,타르칸 왕자와 아리스티네 언니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一.”
“라우넬리안 녀석이 그놈의 손을 잡을 리가 없지.”
황제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 였다.
제 동생이라고 하면 껌뻑 죽다 못해 죽는 시능까지 하는 녀석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부황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타르칸 왕자의 입지도 좁힐 수 있지요.”
아내의 여동생에게 반한 남자를 그 누가 반기겠는가.
“아주 시건방진 놈이었어.”
황제가 타르칸을 떠올리며 이 를 갈았다.
‘감정적 이긴.’
레타나시아는 그런 황제를 속 으로 비웃었으나 겉으로 내색하 지 않았다.
라우넬리안의 세력이 심상찮은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타르칸 의 환심을 사 제 편으로 끌어들 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 후에 타르칸의 배에 칼을 꽂든 말든 우선은 그렇게 행동 했어야지.’
하지만 지금 방 안의 꼴을 보니 황제가 어떻게 굴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리스티네 언니와 타르칸 왕자의 사 이가 꽤 괜찮더라고요?”
야만의 나라로 치울 때,가서 눈물깨나 뽑을 줄 알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어차피 정략혼이다. 사이가 좋 을 리 없지.”
황제가 픽 비웃으며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고년이 얼굴이 반반하긴 해도 그것뿐이잖으냐. 뻣뻣한 게 영 매력이 없어. 레아, 너와 비교하 기에도 아까운 수준이니 걱정 말거라.”
황제의 말에 레타나시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딱히 그 부분을 걱정한 건 아니었다.
“부황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기뻐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맞장구를 쳤다.
“사이가 좋아 보인 것도 라우넬리안 오라버니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일 수도 있지요.”
“그래,그게 확실하지.”
‘진짜 사이가 좋다고 해도 그 첫사랑의 기억을 그렇게 애릇해 하는 걸 보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충분해.’
레타나시아는 자신이 있었다.
아리스티네와 레타나시아.
황녀가 단둘이니 당연히 비교 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 중 당연히 레타나시아를 선택했다.
유폐당한 채 자라나 볼품없는 황녀 따위는 조롱이나 동정의 대상일 뿐.
아리 스티 네는 나긋나긋하지 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뻣뻣하고 남자를 다루는 요령이 없다.
‘분명 타르칸 왕자한테도 반말을 찍찍 뱉으며 가리지 않고 말 했겠지.’
레타나시아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아리스티네는 첫 만남부터 타르칸에게 수줍음이 많은 변태라면서 생각한 대로 말했다.
레타나시아가 간과한 게 있다면,그 수줍은 변태님이 변태답 게 그 말을 듣고 아리스티네에 대한 호감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냥 언니와 나를 놓고 봐도 다들 나를 좋아할 텐데.’
하물며 자신은 타르칸이 아직까지 애틋해하는 첫사랑과 꼭 닮지않았는가.
‘남자는 첫사랑을 평생토록 못 잊는다더니.’
완전히 낙승이었다.
레타나시아가 봐도 지금 제 모습과 타르칸의 기억 속의 소녀 를 두고 비교하면 동일 인물이 라고 믿을 정도였다.
‘미안해요,아리스티네 언니.’
레타나시아가 콧노래를 흥얼거 리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내 차지가 되겠네요.’
* * *
“비전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기다렸다는 말과 달리 파티시에는 방을 나선 지 30분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다른 셰프들이 요리한다고 바 쁠 때 그녀라고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반죽을 완료하고 휴지까지 시 켜 놓은 것을 제대로 굽기만 하 면 됐다.
접시에 다소곳이 담긴 것을 보 고 라우넬리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스콘? 이런 평범한 걸……”
“그다지 영양이 좋아 보이진 않는데.”
타르칸도 옆에서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헛구역질을 하지 않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곧 두사 람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혹시,하는 기대가 두 남자의 얼굴에 싹렀다.
아리스티네의 총애를 받는 파티시에 때문에 질투 나긴 하지만,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스티네가 뭐라도 먹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번에 스콘을 먹다가 다 뱉어 냈는데……”
라우넬리안이 걱정스레 말했다.
스콘이 덜 익은 것 같다고,밀가루 맛만 난다고 했었다.
라우넬리안은 대로해서 파티시 에를 꾸짖었고,억울해하는 모습 에 직접 스콘을 맛보았다.
스콘은 멀쩡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그가 미간을 찌푸렸을 때 아리스티네는 제 앞에 놓인 스콘을 바라보며 포크를 들었다.
일단 버터의 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졌다.
스콘은 타르칸의 궁에 도착한 날 먹은 뒤 아리스티네가 가장 즐겨 찼던 티 푸드였다.
맛있게 잘 먹던 때의 생각이 나서 입맛이 돌았다.
아리스티네는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과 쟁을 발라 입 안에 넣었
타르칸과 라우넬리안은 물론, 궁인,시녀 할 것 없이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제발 입에 맞으시길……!’
한 번 스콘을 씹은 아리스티네 의 눈이 커다래졌다.
스콘은 고소했고,살짝 깝조름 한 맛이 도는 게 식욕을 돋웠다.
새콤한 블랙커런트 쟁과 부드러운 클로티드 크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꿀꺽,식도로 넘기는 순간 빈 속이 아우성쳤다.
그렇게나 음식을 거부했으면서 왜 이제야 먹을 걸 주느냐는 듯이.
아리스티네가 서둘러 스콘 조각에 쟁을 발랐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흠흠,뭐…… 꽤 하네.”
“역시 데려오길 잘했군.”
타르칸이 은근슬쩍 자신이 파 티시에를 데려왔던 것을 어필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시선은 파티시에에게 꽂혀 있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비전하께서 드실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제 기쁨입니다.”
“그대는 나의 구원자야. 아이루 고에 있을 때는 내 기쁨이었는 데,실바누스까지 와서는 나를 구원하는구나.”
“비전하……”
감격한 파티시에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아리스티네가 그녀의 손을 잡 았다.
“이름이?”
“나,나탈리입니다.”
“이름도 예쁘네.”
아리스티네가 생긋 웃었다.
나탈리의 얼굴이 확 붉게 물들었다.
‘아니,분위기 왜 이래? 나도 내 동생한테 구원이니 뭐니 하 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재는 왜 내 아내한테 얼굴을 붉혀?!’
두 남자의 눈이 질투로 이글이 글했다.
“근데 스콘은 그다지 식사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밀가루,설탕,버터 덩어리일 뿐이죠.”
두 남자가 쿵짝이 맞아 투덜거 렸다.
“저,시장하실까 봐 빨리 만드 느라 반죽되어 있는 스콘을 구웠지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입에 맞는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나탈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두 남자가 서둘러 아리스티네 에게 물었다.
“리,리네 뭐 불편한 곳 없니? 마사지해 줄까?”
“괜찮아요.”
“조금 기댈래? 피곤하지?”
타르칸이 가슴을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리스티네의 뾰족한 시선이었다.
“왜?”
“밀가루,설탕,버터 덩어리라니,그건 스콘에 대한 모욕이야.”
아내의 말에 타르칸은 깜짝 놀 랐다.
“스콘한테 사과해.”
“미안……
하지만 그는 시키는 대로 스콘에 대고 사과했다.
아내에게 제가 스콘보다 못한 존재인 것인가 회의감이 들었지만,임신한 아내의 심기를 거스 르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느새 동지가 된 타르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라우넬리안이 화제를 돌려 주었다.
“다른 거 뭐 먹고 싶은 게 없어?”
“그,그래. 임신하면 특별히 당기는 음식이 있다던데.”
뭐든 말하라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두 남자의 모습에 아리스티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전부터 먹고 싶은 음식이 있었다.
하지만 구하기 힘들어서 말하 지 못하던 차였다.
그런데 계속되는 입덧에 지친 상태에서 이렇게 나오니…….
“저기,나 사실은…… 진짜 먹 고 싶은 음식이 있긴 해.”
“뭔데?”
“말만 해!”
두 남자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그 파티시에를 이길 건 수가 생겼다.
아리스티네가 심해의 꿀이 먹 고 싶다고 해도,하늘의 과실이 먹고 싶다고 해도 무조건 구해 다 주리라.
두 남자가 각오를 마쳤다.
이윽고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열렸다.
“나…… 치킨이 먹고 싶어.”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