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곳엔 부드러우면서 탄탄히 자리 잡힌 대흉근이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레타나시아의 시선이 아리스티네를 따라 타르칸의 가슴으로 향했다.
타르칸은 불쾌감을 느끼고 가 슴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래 봤자 빵빵하고 커다란 대 흉근이 다 가려지진 않지만,의도는 명확했다.
치한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경멸스러운 시선이 레타나시아에게 꽂혔다.
“어머,레타나시아.”
타르칸의 행동을 보고 아리스티네가 책망하는 어조로 레타나 시아를 불렀다.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시선은 하지 않는 게 좋 아.”
아리스티네의 말에 레타나시아 가 얼굴을 확 붉히며 일그러트 렸다.
대체 누가 누굴 치한 취급 하 고 있는 건가!
“언니부터 제대로 처신하시죠!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난 괜찮아.”
아리스티네가 딱 잘라 단언했다.
“내가 봐도 상대가 불쾌해하지 않거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에게 불쾌 한 시선을 보내기는커녕 수줍게 눈 밑을 발갛게 물들였다.
“너와 달리 나는 가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 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사심 한 점 없이 순수했다.
문제는 손가락이 슬쩍슬쩍 단 단한 가슴의 탄력을 즐기고 있 다는 거지만.
“시선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야. 똑같이 바라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분이 다를 수밖에 없 지. 앞으로는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렴.”
대체 누가 누굴 보고 조심하라 는 건지.
레타나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평소의 그녀라 면 절대 하지 않을 레이디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내 시선이 뭐가 어때서! 지금 이 나를一.”
“네 의도는 중요하지 않아,레타나시아. 이런 문제에서 가해 사실은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꼈 느냐에 달린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레타나시아를 보는 아리스티네의 눈빛에는 경멸과 실망이 가득했다.
치한 짓을 하고서도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범죄자를 보는 듯한 시선.
모멸감에 레타나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생전 이런 취급은 처음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 부 정할수록 발렘하는 것으로 몰릴 게 뻔하다는 거다.
“정말 아무리 따로 자랐다고 하나 네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구나. 그래도 황녀로서의 명예는 아는 줄 알았거늘.”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상대가 입을 다문다고 해서 공격을 멈 출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아까 남의 남편 팔 근육을 빵 반죽 주무르듯 조물딱조물딱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내가 언제……!”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 는데 그것까지 아닌 척하니? 더 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렴. 그래
봐야 네 명예만 더 추락할 뿐이 야.”
허어, 레타나시아는 기가 턱 막혀서 거친 숨만 내쉬었다.
가슴속에 할 말은 가득 쌓였지 만,정작 제대로 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실바누스의 정치•사교계에서 군 림하고 있는 그녀를 이렇게 아무 말 못 하게 만드는 건 아리스티네가 처음이었다.
“리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았다. 마치 겁먹 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나 쟤랑 있기 싫어.”
“아,그렇겠다. 들어가자.”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토닥토닥해 주며 레타나시아를 째려봤다.
레타나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움찔했다.
불쌍한 척 아내의 품에서 도닥거림을 받는 타르칸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특별히 노려보거나 살기를 품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가 정확 히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맹수 앞에 선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바짝 얼어붙은 레타나시아를 보고 타르칸의 입꼬리가 느릿하 게 올라갔다.
칼날처럼 잔혹한 미소였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다시 타르칸을 바라보는 순간, 언제 그 런 표정을 지었냐는 둣 눈꼬리 를 내린다.
발톱 하나로 사람을 찢어 죽이 는 맹수가 날카로운 것을 전부 부드럽고 폭신한 털에 감춘 채 애교를 떠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그래도 가기 전에 이 말은 해 줘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타르칸이 레 타나시아에게 다가왔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내가 대마수로부터 리네를 구한 게 아니야.”
생뚱맞은 소리에 레타나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네가 나를 구한 것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녀가 이해 하길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숙여 레타나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한 번만 더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내게 몸을 들이밀면一.”
금안이 스르륵 움직여 레타나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타르칸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다시 허리를 세워 아내에게 돌 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레타나시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감싸고 아리스티네가 그에게 기 댔다.
두 사람은 아주 평화롭고 다정 한 연인처럼 정원을 떠났다.
타르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 지고 나서야 레타나시아는 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자신이 숨도 못 쉰 채 타르칸이 내뿜는 위압에 짓늘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참 나 진짜!”
무시하던 야만인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레타나시아는 뒤늦게 성을 내며 씩씩거렸다.
이딴 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자신같이 고귀한 황녀가 야만 인 따위를 유혹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었다.
미적 감각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을 놈이 어떻게 자신의 아 름다움을 알아보겠는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맴도는 못생겼다는 말에 레타나시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였다.
“이야,재밌는 구경했네.”
뒤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에 레타나시아가 몸을 홱 돌렸다.
그곳엔 이복 오빠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재밌는 구경이라니요.”
“그렇잖아? 언제 네가 그런 취 급 받는 걸 보겠어. 단 한 마디 제대로 응수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 잘 봤어. 역시 내 동생은 대단하다니까.”
레타나시아가 차갑게 눈을 가 라앉히며 라우넬리안을 노려보았다.
물론 라우넬리안은 신경도 쓰 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턱을 쓰 다듬으며 중얼거릴 뿐.
“뭐, 그놈도 나쁘진 않은 것같고.”
“흥,오라버니의 놀림에 어울려드릴 생각은 없어요. 전 이만 가보겠어요.”
“나도 빨리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긴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라우넬리안이 손짓했다.
“가기 전에 이건 보고 가.”
그의 손짓에 따라 사진 몇몇 장이 팔랑거리며 레타나시아의 앞으로 날아갔다.
사진에 찍힌 것을 확인한 레타나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꽤 잘 나왔지? 역시 최신식으로 사길 잘했어. 내 동생 찍으려고 산 건데 너 따위를 찍었다는 게 기분은 나쁘지만.”
레타나시아의 귀에는 라우넬리안이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넘겼다.
아까 타르칸과 단둘이 있을 때의 모습이 잔뜩 찍혀 있었다.
타르칸의 팔을 바짝 끌어안은 채 가슴을 꽉 대고 있는 게 누가 봐도 유혹하는 모양새였다.
“이런 사진이 대중에 공개되면 좀 그렇지 않겠어? 제국민이 사랑하는 황녀님?”
그냥 남자를 유혹하는 모습을 보여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타르칸은 언니의 남편 이었다.
이복 언니의 남편을 유혹하는 이복 여동생.
얼마나 자극적이고 천박한 주제인가.
좌악,확!
레타나시아의 손에서 사진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이래 봐야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도저히 찢지 않 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참고로 영상도 찍었으니까 말이야. 너 화면발 잘 받더라. 일그러트린 표정이 특히.”
재밌다는 듯 웃은 라우넬리안이 레타나시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자,그럼 나가서 밖의 기자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젠장,젠장!’
레타나시아는 빠르게 회랑을 가로질렀다.
아주 손쉬운 승리를 거머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아리스티네도 아리스티네였지만, 타르칸과 라우넬리안도 짜증 이 났다.
‘왜 그렇게까지 아리스티네를 싸고도는 거야! 뭐가 그렇게 좋 아서!’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레타나시아는 항상 뒷전이었다.
부황 폐하의 관심은 온통 아리스티네에게 쏠려 있었다.
자신이 찾아가도 귀찮다는 듯 이 내쫓고 문을 닫았다.
제 앞에서 닫히던 커다란 문.
그 문 안에는 항상 아리스티네 가 있었다.
‘그래도 부황께선 지금 나를 가장 아끼셔.’
레타나시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권력을 나누기 싫어하는 탐욕스러운 황제가 후계를 지목하진 않았지만,차기 황제 자리 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타나시 아는 불안했다.
만약 부황이 아리스티네가 제 왕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냐. 도구로써 쓸 수 있는 제 왕안을 원했는걸. 자신에게 숨긴 걸 괘씸하다고 생각할 거야. 어 쩌면 역심이라고 볼 수도 있지.’
레타나시아는 황제의 이기적인 성정을 잘 알았다.
“황녀 전하.”
그때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시녀가 고개를 수그렸다. 황제궁에서 일하는 시녀 였다.
‘젠장,지금 부황을 만나서는 할 이야기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타나시 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머,부황께서 나를?”
반가운 양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황제의 시녀는 고개를 숙이곤 길을 앞장섰다.
당장 데려오라고 했다는 뜻이다.
레타나시아의 눈매가 가라앉았지만,따라가는 것 외엔 별도리 가 없었다.
‘분명 타르칸을 어떻게 했는지, 라우넬리안 오라버니와의 동맹을 막았는지 궁금해할 텐데……’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말을 들은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눈에 선했다.
‘아니,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은 아니지.’
레타나시아는 타르칸의 팔을 붙잡았을 때 읽은 그의 기억을 떠올렸다.
‘설마 언니가 임신했을 줄이야. 그것도 권능을 타고난 아이를.’
이건 황제가 눈을 번쩍 뜰 만한 소식이었다.
오늘 레타나시아가 전부 실패 했다는 사실조차 덮을 만큼 좋아할 소식.
"하지만 말하는 게 좋을까?’
황제의 관심은 온통 그 아이에 게 쏠릴 것이다.
어떻게든 아리스티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와 권능을 각성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겠지.
그리고 만약 아이가 권능을 각성한다면…….
‘차기 황위는 자식이 아니라 손주에게 물려주는 수가 있어.’
레타나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판단이 서 지 않았다.
황제의 궁으로 가는 내내 그녀 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계산이 돌아갔다.
황제의 궁 앞 도착했을 때에는 결론이 났다.
‘태어나더라도 내년에 태어날 텐데 후계로 책정되긴 너무 어려.’
황제가 원하는 것은 권능을 지닌 후계가 아니었다.
권능을 지닌 대단한 존재가 자신의 수족이 되어 자신의 야욕 을 채워 주는 것이지.
‘그래, 차라리 잘됐어.’
황제에게 아리스티네가 권능을 지닌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려 주면 저 역시 그 공로를 인정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가 키우면 되잖아?’
황제가 내내 아이를 끼고 있을 순 없다. 또,아무리 유모가 돌본다고 해도 아이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가 필요할 터.
‘후후,그래. 이모가 엄마 대신이 되어 줄게.’
레타나시아가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 *
치이 이익 一!
밀가루를 입힌 닭고기를 넣는 것과 동시에 뜨겁게 달궈진 기 름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불 앞에 서 있는 두 남 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개의 기 름방울이 튀어 오른 모습 그대 로 허공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황금빛 오러가 방어막을 형성 하긴 했지만 기름방울은 방어막에 닿지도 않았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허공에 떠있던 기름방울이 다시 커다란 팬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형님께서 힘쓰실 필요 없었을 텐데요. 제 오러면 충분합니다.”
“무슨 소리. 처남이야말로 편하 게 있지? 염동력으로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데 뭣 하러 오러 를 쓰는가.”
두 남자는 사이좋게 나란히 닭을 튀기고 있긴 했지만,그 안에서도 은근슬쩍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궁인들과 시녀들 그리고 셰프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고귀하신 분들께서 주방에 발걸음하시는 것에 기겁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기름 튀는 것에 “아 뜨거,아 뜨거” 폴짝 뛰던 다 큰 남자들이 오러와 염동력이라는 대단한 능력을 낭비하는 것도.
아리스티네가 원하는 치킨을 손수 만들어 주겠다는 경쟁의 결과였다.
현재 아리스티네의 식사를 책임지며 두 남자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파티시에, 나탈리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비전하의 설명대로 치킨 만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하지만 차마 그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됐다!”
닭을 다 튀겨 낸 두 남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누가 보면 치킨이 아니라 대륙을 정벌한 줄 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좋아하겠지?”
“레시피는 전부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 황금빛!”
“그래,리네는 황금빛이 나야 한다고 했지. 거기다 내가 봐도 바삭바삭해 보이고.”
두 남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치킨을 유산지에 올려놓았다.
기름을 빼기 위한 작업이었다.
레타나시아가 다녀가고 난 뒤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아기가 배고프대요.〉
그 말을 들은 타르칸과 라우넬리안이 콧김을 뿜으며 치킨을 만들러 달려간 건 당연한 일이 었다.
아리스티네가 “아니,할 이야기 가 있는데……” 하고 말했지만, 두 남자는 아내-여동생-와 자 식-조카-을 제 손으로 먹여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치킨을 접시에 담은 두 남자가 미소 지었다.
“예감이 좋아.”
“이번엔 마음에 들어 할 것 같 습니다.”
수천 번의 아픔이 있었기에 점쳐 볼 수 있는 성공이었다.
두 남자가 마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궁인이 뛰어 들어왔다.
아리스티네의 시중을 들고 있던 궁인인지라 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지?”
“비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