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화
아리스티네가 쓰러졌다는 말에 주방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쓰러졌다고?”
“상태는? 심각한가?”
두 남자는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며 성큼성큼 걸어 주방을 나갔다.
마음이 급한지 걸음은 계속 빨 라져 종래에는 뛰어서 아리스티네의 방에 도착했다.
아리스티네는 정신을 잃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파리한 안색과 혈색을 잃은 입 술,이마를 적신 식은땀.
그 모습을 본 타르칸은 심장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이 아리스티네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상태는?”
“꽃이 부족해.”
아리스티네를 간병하고 있던 시녀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라우넬리안에게서 돌아왔다.
“꽃?”
타르칸은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리스티네가 걱정되어 서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황금빛 꽃이 찬란하게 내뿜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예 빛을 잃어버리고 볼품없이 시든 꽃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부 다 싱싱했는데……”
“그만큼 아이의 권능이 강해졌다는 뜻이지.”
요동치는 불안정한 힘. 그 힘이 강할수록 더 많은 크리세아 꽃이 필요했다.
지금 방 안에 있는 꽃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것이다.
“……리네 같군.”
황후가 아리스티네를 잉태했을 때,아리스티네의 힘이 워낙 강해 하룻밤 사이에 정원의 크리세아꽃이 다 시들어 버렸다.
그 때문에 아리스티네가 타고난 권능이 권능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제왕안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그랬던 만큼 황제의 기대가 컸다.
라우넬리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기대 때문에 아리스티네가 어떤 일을 겪어야 했던가.
그리고 끝내 각성하지 못한 아리스티네를 어떻게 대했던가.
‘절대 황제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
물론 알려지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다.
어렸을 때와 달리 라우넬리안 에게는 힘이 있었다.
하늘을 뒤 엎을 힘이.
“리네와 아이의 상태를 안정시키려면 크리세아꽃이 필요하다는 말은 했었지.”
“그 꽃이 부족하다는 거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타르칸의 모습에 라우넬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리스티네의 아이가 권능을 타고났고,그 때문에 크리세아꽃 이 필요해서 실바누스로 데려온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타르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실바누스 황가의 직계는 능력이나 권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리네가 대체 어디까지 말한 걸까.’
동생이 그만큼 이 남자를 신뢰한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지내 본 결과,라우넬리안은 타르칸을 제법 인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 었다.
능력 좋고 조신한 점도 마음에 들었지만,아리스티네의 자발적 노예가 되려 한다는 점이 특히 점수를 높게 샀다.
‘아니,그래도 너무 쉽게 넘겨 주면 안 되지. 내 동생이 어떤 애인데!’
한 번쯤은 테스트를 거치고 싶었다.
그때,타르칸이 입을 열었다.
“황궁의 크리세아 궁에 피는 꽃이라고 하셨지요.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당연히 네가 구해 와야지. 내 동생이 너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건데.”
흥,하고 코웃음 치며 하는 말에 타르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예,제가 애 아빠니까요.”
그 말에 라우넬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조카니까 삼촌인 내가 갈 거라는 말이 목 끝까지 밀려왔지만 애써 삼켰다.
“난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리스티네의 뺨을 쓸었다.
그녀의 이마에 촉, 하고 부드 럽게 입을 맞춘 그가 방을 떠났다.
아리스티네의 상태가 안 좋은 데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타르칸을 바라보고 있던 라우넬리안이 후, 하고 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 에 앉았다.
“뭐,별일이야 없겠지. 크리세아 궁은 평소에는 경비도 제대로 서지 않고.”
황궁에 숨어드는 것이나 크리세아 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쯤은,영 못 쓰는 놈은 아니니 알아서 할 것이고.
“리네.”
땀에 젖은 동생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던 라우넬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엄마 너무 괴롭히면 삼촌한테 혼난다.”
아직 임신한 표도 안 나는 배 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치만 내 동생 닮으면 용서 해 줄게. 저놈보다 내 동생 더 닮아야 한다,알았지.”
라우넬리안은 배 속의 태아에게 한없이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더 아리스티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세아꽃을 한데 모아. 성수도 가져오고. 애 아빠가 꽃을 따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상태를 호전시켜야지.”
그 귀한 성수를 막 쓰겠다는 말임에도 그 누구도 놀라지 않 았다.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보며 라우넬리안도 방을 나섰다.
* * *
황궁에 숨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실바누스 황궁의 경비가 허술 한 게 아니라 타르칸이 너무 대단한 탓이었다.
그는 무려 대마수를 둘이나 쓰러트린 존재였다. 그것도 혼자서.
단일 무력으로서는 타르칸을 능가할 자가 이 대륙에 없다고 봐야 했다.
‘……라우넬리안의 입김이 황궁 곳곳에 닿아 있군.’
황궁 벽의 그림자에 숨어들며 타르칸은 속으로 감탄했다.
라우넬리안의 저택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황궁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시종,시녀,기사 가릴 것 없이 모종의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되었다.
라우넬리안이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제도에 돌아오긴 했지만, 황궁에 세를 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가 제도에 돌아온 지 아직 1년도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 면 더더욱 그랬다.
‘수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 은 남자야.’
괜히 황제가 반정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라우넬리안을 바로 누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크리세아 궁.’
타르칸은 방 안에 피어 있던 황금빛의 꽃을 떠올렸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겠지 만, 예민한 그의 기감에는 그 꽃이 품고 있는 특별한 힘이 느껴 졌다.
그리고 그게 그가 정보를 파악 하기도 전에 황궁에 숨어든 이유였다.
‘괜히 시간 낭비 할 필요는 없지.’
소리 없이 도약한 타르칸은 몇 번의 발돋움만으로 첨탑 위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황궁의 정중앙은 아니더라도 꽤 중앙부에 가까운 곳이었다.
타르칸은 눈을 감고 집중한 채 오러를 퍼트렸다.
안개보다도 더 열은,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아주아주 성긴 오러.
이런 오러는 공격도,방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수색에는 제 격이었다.
보통 선명히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오러를 내뿜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지만,사실 아무 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옅은 오러를 균일하게 계속해서 퍼트리는 것이 더 정신력을 요구하 는 일이었다.
눈을 감은 채 집중하는 타르칸 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황궁은 마을 하나는 너끈하게 들어갈 크기였다.
일부러 중앙 쪽에 자리를 잡은 것인데 오러가 황궁의 6할을 뒤 덮을 때가 되어서도 크리세아꽃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러 소비가 너무 많은데.’
아무리 열게 퍼트리고 있다고 해도 면적이 워낙 컸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오 러가 고갈되었을 것이다.
사실 오러로 궁을 뒤덮어 크리 세아꽃의 힘을 감지하겠다는 무 식한 방법은 타르칸이기에 가능 한 짓이었다.
그때였다.
타르칸이 눈을 번쩍 떴다.
‘찾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경계가 삼엄하지?’
중요한 궁이라고는 하나 근 스 무 해 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 궁이라고 했다.
크리세아꽃을 탐낼 자들도 없다. 다른 곳에는 무용지물인 꽃 이라고 했으니까.
‘……느껴지는 오러와 마나를 보면 꽤 실력 좋은 기사들과 마 법사들이 있겠군.’
꽤 상당한 병력이었다.
오러의 대부분을 수색에 쓴 상 태이긴 했지만,타르칸은 망설임 없이 도약했다.
창백한 채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면 일분일초가 아 까웠다.
* * *
라우넬리안은 의자에 기대 서류를 보고 있었다.
황제 직속 부대의 병력에 대한 자료였다.
‘흠,카넬리언 후작과의 교섭을 마치면 제국 병력의 대다수를 장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모든 실권이 라우넬리안의 손 안에 들어와도 황제는 절대 평화적으로 양위하지 않을 것이다.
무혈입성은 불가능.
애초에 라우넬리안도 평화롭게 황위를 얻을 생각이 없었다.
황제에게서 잔혹하게 빼앗아 그가 피를 쏟고 땅바닥을 기게 만들 생각이었다.
황제가 아리스티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 외에 불필요한 피는 흘리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직속 부대군.’
한번 은근슬쩍 접선해 봤지만, 황제의 직속 부대는 포섭할 수 없었다.
무리하게 끌어들였다가는 반역 을 꾀하고 있다며 역공당할 수 도 있었다.
거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명백 한 증거가 나오면 안 된다.
‘생각보다도 병력이 더 강력 해.’
아이루고와의 전쟁을 새로 준 비하며 황제는 세금을 확 올렸다.
그리고 세금의 대부분을 군자 금으로 돌렸다.
‘세금을 확 올린 덕분에 귀족들과의 교섭은 수월했지. 민심도 황제에게서 더 멀어지고.’
원래 황제는 제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패한데다가 세금까지 올렸으니 인기가 있으면 이상했다.
그 반대급부로 국민들의 사랑은 황제가 아니라 황자와 황녀에게 쏠렸다.
어쨌거나 군비를 확장한 덕에 제국의 병력은 확실히 강화되었다.
아이루고와의 전쟁에서 패하며 병력을 상당수 소실했던 것을 생각하면 꽤 빠른 성취였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군자금이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부족했다.
‘그 돈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 기 들어갔군.’
라우넬리안이 직속 부대에 관 한 서류를 툭 쳤다.
이 정도 병력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많은 피가 흐를 수밖 에 없을 것이다.
‘흠’
그가 고민에 빠져 있는 때였다.
“황자 전하.”
조용히 라우넬리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바닥에서 솟은 둣 갑자기 모습을 드러 냈다.
라우넬리안의 고요한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정기 보고일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
“크리세아 궁의 경비가 강화되었습니다.”
“뭐?”
라우넬리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다래졌다가 깊게 가라앉았다.
“……황제가 눈치챘군.”
갑자기 크리세아 궁의 경비가 강화되었다는것은 단 하나의 사실을 뜻했다.
황제가 아리스티네의 임신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
어쩌면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레타나시아 황녀가 귀궁한 뒤 바로 황제와 독대했습니다. 그 독대 직후 황제가 크리세아 궁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 말에 라우넬리안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 짜증 나는 계집이 또..........”
레타나시아의 말 때문에 아리스티네가 유폐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레타나시아의 말 때문에 조카가 위험에 노출 되었다.
“아까 곱게 보내 주는 게 아니 었는데……”
레타나시아의 정신이 너덜너덜 해졌던 걸 생각하면 과연 곱게 보내 준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라우넬리안의 기준에서는 살려 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관대 한 처사였다.
“경고도 못 알아듣고.”
분명 사진과 영상이 있다고 협박했는데도 이딴 식으로 구는 걸 보면 이 일이 라우넬리안의 귀에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크리세아 궁의 경비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이 퍼지더라도 이렇게 전후 사정이 확실하게 전달 될 줄은 몰랐겠지.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경비 강화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지? 어차피 황실 기사단 중 반절 이상이 나와 이야기가 끝난 상태야.”
황제가 아리스티네의 임신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경계할 만한 일이었지만,크리세아 궁의 경비 강화는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비를 맡은 황궁 기사단을 통해서 크리세아꽃을 조달해 와도 될 듯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라우넬리안의 기대를 처참히 부서트렸다.
“황제의 직속 부대입니다. 그중 얼마가 배정되었는지는 파악하 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라우넬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천천히 그의 시선이 다시 서류를 향한다.
“황제가 아주 작정했군.”
이만한 무력을 배치했다는 것 은 곧一.
“리네의 태내에 권능을 타고난 아이가 있다는 걸 아는 거야.”
파삭,라우넬리안의 손아귀에서 서류가 구겨졌다.
몰래 이 병력을 뚫고 크리세아 꽃을 구하긴 힘들어졌다.
“카넬리언 후작과의 회동을 앞당겨야겠어. 이렇게 된 이상 황제를 치고 황궁을 손에 넣는다.”
“존명.”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 동생을 위한 꽃도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오겠지.”
라우넬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은 피를 홀리려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또 생각이 있었다.
‘타르칸에게 아이루고 전사들 을……. 아.’
잊고 있던 사실이 갑자기 떠올라 라우넬리안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타르칸이 크리세아 궁에 갔는데.”
라우넬리안의 시선이 구겨진 서류로 향했다.
직속 부대 중 얼마를 크리세아 궁에 배치했는지는 모르지만,타르칸은 혼자였다.
“……괜찮을까.”
갈라진 신음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 * *
“으.........”
아리스티네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 했다.
“정신이 드니,리네?”
그 말과 함께 상체가 부드럽게 일으켜졌다.
“여기 물 마시렴.”
차가운 것이 입술에 닿아 아리스티네는 정신 없이 물을 삼켰다.
한 잔을 다 비우자,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오라버니……
“그래,네 오빠야.”
라우넬리안이 아리스티네의 손을 도닥였다.
‘쓰러진 건가. 아이는....’
“아이는 괜찮아.”
배에 손을 얹는 모습을 본 라우넬리안이 말해 주었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왜 그러세요?”
“ 응?”
“왜 혼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세요?”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