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화
황제 직속 부대의 1기사단 단장,알라우트 백작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감이 좋지 않아.’
아까부터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분 나쁘게 건드려 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살기나 오러와 같은 명확한 기운이 아니라,실체 없는 무언가가 솜털을 스치는 것 같은 기분.
‘기분 탓인가.’
기감을 끌어 올려 살펴도 명확하게 잡히는 게 없다.
알라우트 백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1기사단뿐만 아니라 3기사단과 4기사단 역시 이 자리에 있었다.
1기사단의 단장인 그가 전체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기에 이들은 모두 자신의 수하나 마찬 가지였다.
‘다들 긴장 따윈 하나도 하지 않고 있군.’
그도 그럴 것이 전운이 감도는 전투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황궁 안의 경비를 서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이런 실력자들이 고작해야 아무도 없는 궁의 경비를 선다는 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제 직속 부대는 전부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개의 기사단만 왔어도 크리세아 궁을 철통같이 방어하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세 개의 기사단이 와 있다.
크리세아 궁은 규모가 작고 소담한 맛이 있는 궁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몰려 있다 보니 사각지대란 존재하지 않았고, 동료들의 모습도 잘 보였다.
그런 만큼 근무 중이라기보다는 농땡이 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느슨한 상황에서 갑작 스럽게 습격당해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실력이 있었다.
‘역시 감이 안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라우트 백작은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대체 뭔지 알 수 없지만,경계 해서 나쁠 건 없다.
“다들 정신 차려! 군기가 빠졌군. 아무리 작은 임무라고 해서 소홀하면 一.”
주변을 둘러보며 커다란 목소리로 호령하던 알라우트 백작이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한데?’
아까와 같이 불명확한 느낌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뭔가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수가 적지?’
다른 사람이 보면 이 많은 사람들의 수가 뭐가 적으냐 할 것이다.
하지만 알라우트 백작의 눈에는 수가 줄어든 것이 보였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금씩, 조금씩 생기는 구멍이.
“기사단장은 자기 기사단의 인원을 파악해!”
그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털썩,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은 습격자들이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심히 처치해 봤자 들키는 건 금방이니 그럴 바엔 한 명이라 도 더 많이 처치하는 것이 이득이니까.
지휘관이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과단한 결단력을 가진 놈이 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
당황한 기사들이 검을 뽑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 간의 간격을 좁히며 습격에 즉시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주 못 쓰는 놈들은 아니군.’
타르칸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 했다.
‘특히 저놈.’
알라우트 백작을 보는 타르칸의 눈이 예리해졌다.
기척을 극도로 죽이고 있는데도 눈치를 챈 게 용했다.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노련한 검사라는 증거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 볼까.’
들켰으니 힘을 숨길 필요도 없다. 타르칸은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황금빛 오러가 그의 검신에 맺힌다. 그리고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그의 신형이 쏘아져 나갔다.
“커헉……!”
“크윽……”
새빨간 피가 튀어 올랐다.
상처 입고 주춤거리는 동료들의 모습에 기사들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적의 전력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진……”
“한 명이다.”
알라우트 백작이 기사의 말을 끊고 말했다.
‘한 명?’
‘단 한 명이라고?’
기사들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단 한 명의 적을 상대로 이렇게 당하고 있단 말인가.
알라우트 백작은 부상자를 확인하고 눈매를 찌푸렸다.
‘상처가 얕아. 죽일 생각이 없는 거야.’
모욕적인 일이었다.
완벽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여유.
‘아주 우습게 보고 있군.’
습격자가 한 명이라는 소리에 동요하고 있는 수하들을 본 그가 소리를 높였다.
“상대가 실력자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단 한 명! 사람은 지치고,상처 입으면 피를 홀리기 마련이다. 놈에겐 지원해 줄 동료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믿고 등을 맡길 동료가 있다!”
한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것은 물론 사기를 꺾는 일이다.
하지만 수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한다.
그가 분위기를 이끌어야 할 때였다.
알라우트 백작의 말에 기사들의 동요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의 적을 두려워해서 어찌 제국 최고의 부대라 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적이 두려운가!”
그 외침에 기사들이 검을 치켜 들며 함성을 질렀다.
아까와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에 긴장하며 방어에 급급했던 모습과 달리,지금은 적극적으로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 도륙할 준비를 갖춘 형세였다.
타르칸은 검자루를 바투 쥐며 자세를 낮췄다.
‘귀찮게 됐군.’
* * *
아리스티네는 수면 거울에 떠오르는 타르칸의 모습에 숨을삼켰다.
그는 수많은 기사들과 전투 중이었다. 발치에 만발해 있는 황금빛의 꽃.
크리세아 궁이었다.
‘그럼 현재인가?’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타르칸의 능력을 믿지만, 상대 의 수가 너무 많았다.
새파랗게 예기를 발하는 다섯 개의 검이 타르칸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다행히 타르칸은 검을 쳐 내고 피한 뒤 반격까지 했지만,지켜 보는 아리스티네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지금은 잘 싸우고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실수한다면?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어이질 것이다.
틈을 보이는 순간 호시탐탐 그 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수십 개 의 검이 그를 향해 날아들 테니까.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르칸인걸. 분명 무사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애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리네?”
두 손을 꽉 모은 채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의 모습에 라우넬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 부름이 들리지도 않는지 아리스티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단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을 따라 물이 담긴 대야에 시선을 준 라우넬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수면에는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다른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제왕안.’
그 전설과도 같은 위대한 권능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뭘 보고 있길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지.’
불현듯 라우넬리안은 아리스티네가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이런 일을 겪었을 거란 걸 깨달았다.
아무 걱정도 없이 온 세상이 마냥 밝고 평화로운 줄로만 알고 뛰어놀 시기에도 불안하고, 어둡고,잔혹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았겠지.
그게 너무나 가슴 아팠다.
황제에게 당한 학대 외에도 제왕안이 보여 주는 혹독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감히 어릴 적의 아픔을 보상해 주고 싶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동생이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살길 바랐다.
그때,아리스티네가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침대 등받이에 겨우 기대어 있던 아이가 대체 무슨 힘이 난 건지 벌떡 상체를 일으켜 대야 를 콱 잡는다.
라우넬리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타르칸이 옆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쳐 내며 동시에 허벅지를 노리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허벅지가 찔릴 줄 알았다.
아리스티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등 뒤와 앞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온다.
피하기엔 자세가 좋지 않고 몰 려드는 기사들로 인해 공간도 애매했다.
타르칸은 오러를 이용해 뒤에
서 쇄도하는 공격을 방어하면서 앞에서 오는 일격을 막아 냈다.
[이 괴물 같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반응을 보이며 오러를 분산시키는 모습 에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엄청난 대웅에도 불구하고 타르칸은 핀치에 몰려 있었다.
타르칸의 정면에서 검을 맞대고 있는 남자의 검은 묵직하니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들의 대장격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황금빛 오러와 남청색의 오러 가 뒤섞인다.
가가각一.
검날이 맞닿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게 있는 공격에 타르칸은 공격을 홀리지도,쳐 내지도 못한 채 대치하고 있었다.
두 손이 묶인 그를 향해 양옆 과 뒤 가릴 것 없이 공격이 들 어왔다.
오러가 방어하고 있었지만,대 치가 길어질수록 불리할 건 자 명했다.
공격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 대와 달리 타르칸은 오러를 공 격과 방어 양쪽으로 분산시키고 있으니까.
타르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으헉.....!]
[큭..........]
커다란 황금빛 물결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공기를 흔드는 파동. 충격파에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이 울컥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오러 폭발?!]
[미친,저런 게 가능해?]
지원을 위해 조금 떨어져 있어 충격파에 휘말리지 않았던 기사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상태에서 집중을 해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그런데 방금 타르칸은 여러명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는 상황 아니었던가.
압도적인 무력을 눈앞에서 보니 순식간에 전의가 상실되었다.
타르칸은 자욱한 흙먼지를 보며 혀를 찼다.
[내 아내한테 줄 꽃이 상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 올랐다.
뿌연 시야 속에서도 차갑게 빛나는 검날과 흉포하게 날름거리는 남청색의 오러.
아리스티네의 눈이 흑 커졌다.
수면 거울 안에 타르칸의 뒷모 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날아드는 검.
아까의 폭발로 바로 방어막을 칠 수 없는지 타르칸이 검을 쥔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상대가 더 빨랐다.
짙은 오러를 두른 대검이 휘둘러지는 모습이 아리스티네의 눈동자에 박힐 듯 새겨졌다.
“아,아…….”
새빨간 피가 꽃잎처럼 튀어 올랐다.
숨이 꽉 막혔다.
수면 거울로 손을 뻗어 봤자 물만 휘젓게 될 뿐이란 걸 알면 서도 손을 뻗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생각보다 먼저 아리스티네의 손이 움직였다.
남편의 뒷모습을 움킬 둣 새하얀 손이 수면 속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리네?!”
그녀의 몸이 수면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대야는 그녀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물이 부풀어 오르듯 위 로 솟구치더니 그녀를 삼켜 버렸다.
라우넬리안이 재빨리 손을 뻗 었지만 잡히는 것은 차가운 물 뿐
솟구쳐 오른 물은 금방 잠잠해 졌다.
갑작스레 솟구쳤던 게 거짓말 처럼 주변에는 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한낮에 잠깐 졸다 꿈을 꾼 것 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사라진 아리스티네만 없었다면.
라우넬리안은 빈 침상을 보며 빈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방을 나서며 밖에서 대기 하고 있던 시종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갈 채비를 해라!”
* * *
아리스티네는 갑자기 나타난 타르칸의 뒷모습에 눈을 휘둥그 레 떴다.
아니,타르칸이 나타난 게 아 니었다.
그녀가 타르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붉은 피가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타르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돼애애애애애!”
처절한 절규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리네?”
타르칸이 주변을 경계하며 그 녀에게 다가갔다.
기사들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대응을 못 하고 있었다.
“사,상처가……”
“이 정도는 별거 아닌一.”
“가,가슴에! 가슴이!”
아리스티네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타르칸의 가슴팍을 살폈다.
타르칸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적이 오러 폭발로 인한 충격을 버티며 어떻게든 공격을 했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오러를 사용해 공격한다는 것은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결국 타르칸에게 닿기 전에 적의 검에 둘러져 있던 오러는 꺼져 버렸고,검 끝이 살짝 가슴을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주변에 흥건한 피는 역류한 오러를 감당하지 못한 적이 왈칵 피를 토해 낸 흔적이었다.
“어떡해……. 가슴에 피가 나잖아. 이거 흉이 지게 생겼는 데……!”
아리스티네가 울먹울먹하며 가슴을 호호,불었다.
“신관한테 가면 되겠지? 흉 안 남겠지? 진짜 안 되는데……. 매끈매끈한 가슴에 왜 이런 상처 가……”
슬퍼하는 아내의 모습에 타르 칸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자신이 다친 것을 이렇게 걱정 하며 가슴 아파하다니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왜 내가 아니라 가슴이 다친 것을 신경 쓰는 거 같지……’
이 가슴은 분명 자신의 가슴이었다.
그런데 왜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얼굴이 다쳐도 이 정도로 슬퍼하진 않을 거 같아……’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