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화
“신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실바누스의 정당한 황위 계승자 앞에서.”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담한 크리세아 궁의 정원에 몰려 있건만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까마득히 속았다.
지금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니 타고난 권능을 각성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개화’까지 한 것을 보니 그 권능은 다른 것도 아닌一.
‘제왕안이라니!’
설마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을 각성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왕안.
황제가 그토록 손에 넣길 원하고 원했던 권능.
‘저 계집이 제왕안을 각성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인데!’
아이루고를 복속시키고,이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을 터.
그 모든 칭송과 영광은 자신의 것이었다.
세상은 전부 제 발아래에 무릎 꿇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망쳤다.
황제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노려보았다.
크리세아꽃이 피워 내는 황금빛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아리스티네는 고고하게 서 있었다.
마치 황제 따윈 아무것도 아니 라는 양 내려다보는 시선.
황제의 눈매가 푸르르 떨렸다.
‘이 건방진……!’
진작 각성한 줄 알았다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목줄을 틀어잡아 서라도 이리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을 것인데.
“이 제국의 황제는 나다! 이 나란 말이다!”
황제가 피 끓는 음성으로 발악 하듯 외쳤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재미있다 는 둣 웃을 뿐이었다.
“내가 나의 정당한 권리를 주 장하기 전까지는,이겠죠.”
느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황제는 아리스티네의 말이 제 숨통을 틀어 쥔 것처럼 압박을 느꼈다.
“나는 성인이니 언제든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요.”
이건 경고가 아니었다. 협박이었다.
긴가민가하며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못하던 자들이 숨을 들이삼켰다.
‘뭐야……’
‘그럼 진짜란 말이야?’
‘그냥 과장된 전설이 아니었어?!’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신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실바누스의 정당한 황위 계승자.
주신 비스나테프가 손수 축복하고 정한 인간의 제왕.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쓸 수 있는 자.
해묵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던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미 신이 내린 자이기에 아리스티네는 황제가 되기 위해 고작 인간의 허락 따위 받을 필요 없었다.
황제가 인정하든 안 하든,황 위를 물려주든 물려주지 않든 그녀는 실바누스의 유일무이한 황위 계승자였다.
“말도 안 돼……”
레타나시아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희미한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참 의외인데.”
아리스티네가 생긋 미소 지으며 레타나시아를 바라보았다.
“레타나시아,너는 내가 제왕안을 각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잖니.”
“뭐?!”
황제가 고개를 획 돌려 레타나시아를 바라보았다.
포진해 있던 기자들도,무릎 꿇고 있던 기사들도 모두 깜짝 놀랐지만,황제만큼은 아니었다.
레타나시아는 세 명의 자식들 중 그가 유일하게 믿고 아끼는 자식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을 각성한 걸 알고 있었다고?!’
레타나시아는 저도 모르게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원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 부황과 자신의 관계를 이간하는 거냐며 따졌겠지.
하지만 지금 레타나시아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그저 제왕안을 각성하기만 한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레타나시아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냥 황가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건국 신화 속에서나 있는 일 아니었냐고! 〈개화〉라니……!’
순간,타르칸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말할 때 ‘리네’라고 불렸던 게 떠올랐다.
의아했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아리스티네와 불화를 만들기싫어서 대강 얼버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아리스티네 언니였어?’
타르칸이〈개화〉한 아리스티네 를 만난 거라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충격에 빠져 있는 레타나시아의 모습에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진짜로 알고 있었군……’
각성은 다섯 살 전에 일어나니 레타나시아는 이미 오래전에 아 리스티네가 제왕안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다.
“내가 제왕안을 각성했다는 것을 알고 황제께 달려가 고했잖니.”
아리스티네의 말이 황제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아리스티네 언니가 부황 폐하께서는 나라를 멸망시킬 폭군이라고 했어요.”
아리스티네가 레타나시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매일매일 자길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라고,폭군이니 반란이 일어나 단두대에 목이 잘릴 거라고.”
레타나시아의 몸이 멸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레타나시아는 기억을 읽는 능력을 사용해 아리스티네가 그렇게 혼잣말하며 황제를 저주하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을 고했다.
사실 레타나시아가 본 것은 제왕안이 발현한 아리스티네의 기억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폐당했지.”
아리스티네의 말은 감정 없이 사실을 말하듯 여상했다.
“죽을 정도로 앓아도 어떤 도움도 바랄 수 없고, 먼지 섞인 딱딱한 빵 조각을 뜯으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손바닥만 한 하늘이 내가 볼 수 있는 바깥세상의 전부인 곳으로.”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며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타르칸이었다.
그의 얼굴이 아픔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흉흉한 기운이 타르칸에게서 뻗어 나와 레타나시아를 압박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다.
“네년이 감히 날 속여?! 그때 날 위하는 척 한 말이……!”
황제가 레타나시아의 멱살을 틀어잡으며 다그쳤다.
분노와 배신감이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솟구쳐올라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레타나시아는 숨이 막혀 새파 랗게 질린 얼굴로 컥컥거렸다.
아리스티네는 싸늘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냉큼 딸을 유폐시킨 주제에 왜 모든 탓을 레타나시아에게 전가하는 것일까.
실망만 시킨 쓸모없는 자식 따위가 감히 날 무시했으니 이 기 회에 버리자고 생각했으면서.
“당신 같은 자가 이 나라의 황제가 된 게 잘못이었어. 이제 그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는 내려 놓도록 一.”
“황제는 나다! 머리카락 색이 바뀌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이냐! 다 헛소리야!”
“깍!”
황제가 레타나시아를 밀치며 소리쳤다.
“알라우트 백작!”
“예,예,폐하!”
습관적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알라우트 백작은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연 누구의 명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너는 나의 직속 부대 대장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 명을 어기고 감히 침입자에게 고개를 숙여?!”
“하,하지만……”
“네놈들에게 그 많은 돈을 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큰 소리로 호통 친 황제가 지 원군으로 온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대관식을 치르고 이 나라의 황위를 이은 자는 바로 나다. 내가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건 반역이나 마찬가지! 당장 저년을 잡아들여 라!”
반역이라는 말에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이자 알라우트 백작 역시 검을 치켜들고 아리스 티네를 향해 돌진했다.
남청빛 오러가 당장이라도 아리스티네의 몸을 난도질할 듯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채앵一.
알라우트 백작의 검은 아리스티네에게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타르칸이 제 아내를 감싼 채 검을 치켜들었다.
아리스티네가 미리 본 대로였다.
“수가 너무 많은데. 아까처럼 안 죽이고 싸우는 건 힘들겠어. 좀 죽여도 돼?”
타르칸의 질문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저었다.
“곧 올 거야.”
뭐가 올 거냐는 질문은 할 필 요가 없었다.
달려들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었으니까.
군화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던 크리세아 궁에 적막이 찾아왔다.
“뭐,뭐야?”
“몸이 안 움직여!”
혼란에 가득 찬 병사들의 외침이 적막을 깨트렸다.
그 소란 위로 한 남자가 유유 히 내려앉았다.
“어서 오세요.”
“리네,걱정했잖니.”
라우넬리안이 아리스티네의 몸을 살피며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곤 자신의 염동력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병사 들을 바라보았다.
오러를 보유하고 있는 기사들 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건 힘들었지만,그 외에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은 완전히 제압당했다.
“이게 〈개화〉의 힘인가? 내가 강하긴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라우넬리안이 감탄했다.
아리스티네의 의지에 따라 그녀가 개화시킨 크리세아꽃의 힘이 라우넬리안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저 반역자를 어서 잡아들이라고!”
“황제. 아니,알피어스.”
아리스티네의 차분한 부름에 황제가 눈을 찢어질 듯 커다랗 게 떴다.
지금 저년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것인가?
“이미 크리세아 궁은 포위됐어. 군권은 이미 이쪽으로 넘어 왔거든. 유능하신 오라버니 덕분에.”
“무,뭐라고……?”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무릎 꿇을 거야.”
“무슨……!”
황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쿵,소리와 함께 무릎이 흙바닥에 부딪혔다.
아리스티네의 말대로 그녀 앞에 무릎이 꿇렸다.
허벅지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푸르르 떨릴뿐,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이……!”
아리스티네는 황제에게 시선을 떼고 궁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다른 사람 들도 입구를 바라보았지만,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대군을 끌고 온 카넬리언 후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라우넬리안 황자의 말이 사실이었군……!’
사실 카넬리언 후작은 라우넬리안과 마지막 협상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손을 잡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렇게 달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개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말.
반신반의하면서도 속여 봤자 제 살만 깎아 먹는 말이기에 병력을 이끌고 크리세아 궁으로 향했다.
카넬리언 후작이 아리스티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가 명했다.
“알피어스를 포박해라.”
“명을 받듭니다.”
알피어스의 명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었다.
아리스티네가 정말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힘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검을 휘 두르면서도 망설임이 있었다.
거기다 라우넬리안이 병사들의 자유를 빼앗고,카넬리언 후작이 수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왔다.
크리세아 궁은 물론,황궁 전 체가 포위되었을 것이다.
라우넬리안이 염동력을 풀었음 에도 움직이는 병사들은 없었다.
황제의 직속 부대였던 기사들 역시 검을 내려놓고 아리스티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병사들을 비 롯한 모든 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관식은 아니었다.
아무도 새 황제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새로운 황제 앞에 경의를 표했다.
* * *
아리스티네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그녀가 보았던 장면 그대로였다.
수면 거울을 건너온 뒤 마음을 진정시키자 미래가 보였다.
어렸을 적, 타르칸과 함께 마수 평원에 있을 때 눈앞에 미래가 펼쳐졌던 것처럼.
그때와 다른 것도 있었다.
미래뿐만이 아니라 아득한 과 거와 현재까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였다.
보고 싶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아리스티네의 앞에 펼쳐졌다.
이쪽으로 바삐 향하는 황제의 모습,카넬리언 백작과 통신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라우넬리안,몰려오는 병사들.
그리고 아득히 먼 과거.
이 힘은 무엇일까.
제왕안은 분명 한정적인 힘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펼쳐지지도 않았고 수면에 비쳐 발현되었다.
아리스티네가 원한다고 볼 수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뭘까.
왜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바뀐 걸까.
수면 거울을 어떻게 넘어올 수 있었을까.
의문을 품은 순간,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가 펼쳐졌다.
아무도 모르는 진실의 문이 열렸다.
‘권능’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능력은 제왕안 외에도 몇 가지 있었다.
원하는 미래를 선명히 보는 예지의 권능.
비를 내리고 태풍을 부르는, 날씨를 조종하는 권능.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회귀의 권능.
그러나 ‘제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오로지 아리스티네의 권능인 제왕안뿐이었다.
주신이 택한 황제라는 증거인 〈개화〉.
그〈개화〉를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제왕안을 보유한 자뿐이었으니까.
즉,제왕안은 〈개화〉의 전제 조건이었다.
제왕의 자질을 타고난 증거였기에 제왕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꽃을 피우는〈개화〉에는 당연히 크리세아꽃이 필요했다.
‘아니,크리세아꽃이 필요한 건 아니지.’
크리세아꽃은 그저 매개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이유.’
아리스티네가 눈을 떴다.
곧장 타르칸과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 하고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타르칸은 그런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 살피고 있었다.
크리세아꽃이 발한 빛으로 인 해 황금빛 눈동자가 더더욱 선 명하게 반짝였다.
‘너였어.’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나의 꽃.’
타르칸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확연히 더 짙어졌다.
천 년의 시간을 지났음에도 신이 내린 축복은 여전했다.
‘네가 내 운명이었어. 처음부터.’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