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때였다.
장내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단 한 곳을 향 해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오묘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은발,새벽하늘같이 깊은 보랏빛 눈동자,곧은 어깨와 쭉 뻗은 허리.
신비롭고 우아한 자태에 사람 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홀렸다.
신문의 사진으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회장에 있는 귀족들은 정략혼을 명 받았을 때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기억했다.
더럽고 엉망인 몰골로 초라하게 고개를 숙이던 모습.
그때와 확연히 다른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사람들은 이야기를 멈췄다.
“과연 황제의 관에 어울리시는 분이네요.”
“옆에 계신 분이 그 유명한 타르칸 전하이시죠?”
“……괴물이니,피에 미친 야만 인이니 하는 소리는 오늘부로 쑥 들어가겠는걸요.”
그런 말을 듣기에 저 남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긴 눈매 안에 자리 잡은 황금 빛 눈. 길고 곧은 콧대,모양 좋은 입술.
남성적인 턱 선 아래로 이어지 는 목 빗근과 그 끝의 쇄골,드 넓은 어깨.
저 탄탄한 품에 안겨 보고 싶 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마 성이 넘치는 남자였다.
어린 영애들이 얼굴을 발그레 하게 물들인 상태로 타르칸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귀부인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길들지 않은 날것같이 강인하 게 조여진 육체는 그들이 봐 오던 남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부채를 살랑이며 그 사이로 타르칸을 홈쳐보던 귀부인들이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첫날밤에 침대를 부쉈다고 했죠.”
“대체 어떻게 하면 침대가 부 서지나 했는데……. 부서질 만하 군요.”
“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군용 막사가 가라앉은 거.”
“아,그 기사 봤지요. 거기 막사 내부 사진도 실려 있던데……”
“엄청났죠.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니까요?”
소곤소곤하는 귀부인들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귀족으로서 고상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그들도 사람이 고 유부녀였다.
솔직히 이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어딨겠는가.
귀부인들이 눈을 빛냈다.
‘아닌 척하면서 뒤로는 그런 기사 다 찾아봤구나!’
‘너도?’
‘나도!’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귀부인들이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홈……’
아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수줍게 얼굴을 붉힌 어린 영애들이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바라보지 않는 것 같지만,부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길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다.
‘그래,좋은 건 나누는 게 좋지.’
나누는 기쁨에 대해선 아리스티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왜 이렇게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일까.
“칸.”
아리스티네의 부름에 타르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런 자리에 나올 땐 가슴을 조신하게 가리도록 해.”
“어?”
생뚱맞은 소리에 타르칸은 당황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아무 설 명 없이 눈썹을 모았다.
이 가슴은 내 가슴이야!
단호한 보랏빛 눈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타르칸의 입술이 벌어졌다.
흥,하고 고개를 돌린 아리스티네가 잠시 침묵하더니 살짝 발돋움했다.
타르칸의 귓가에 그녀의 숨결 이 닿았다.
“가슴 까는 건 밤에만 해.”
소리 죽여 속삭이는 목소리.
“너 진짜……”
타르칸은 신음처럼 말했다.
이 여자는 진짜 뭘까.
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이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타르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하지만 곧,밤에 아무리 가슴을 까 봤자 역사적인 일은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 * *
본디 아리스티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호의를 품었던 귀족들은 물론, 중립을 지켰던 귀족들 역시 빠르게 아리스티네 의 역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바로 폐주 알피어스의 앞잡이로,폭정을 돕고 거기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알피어스가 아리스티네를 학대하는 것과 유폐하는 것을 도왔다.
타르칸과의 정략혼을 명 받았 을 때도 누구보다 크게 비웃었으니,지금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레타나시아는 허옇게 질린 그들의 안색을 놓치지 않았다.
“프란첼린 공작.”
프란첼린 공작이 고개를 돌리 다가 자신을 부른 사람이 레타 나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일을 도모하려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냥 반역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려 〈개화〉한 정통 황제입니다.”
프란첼린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신문에는 온통 아리스티네에 관한 기사가 연일 대서특필되고있었다.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그 역 사적인 현장에 있었으니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여태까지 황녀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실바누스에서 아리스티네가 이렇게 언론에 노출된 건 처음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 황궁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정도만 알려졌고, 아이루고에 간 이후에는 몇 차례 보도되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기사의 대다수는 아리스티 네가 의료용 메스를 만들었다느니 하는,실바누스의 위대한 문명이 아이루고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밖으로 나오지 않아 신비에 감 싸여 있던 황녀가 알고보니 신 성한 황제의 재목이었다는 말에 제국민들은 열광했다.
심지어 아파서 출입을 삼간 것 이 아니라 황제에게 유폐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며,민심은 요란 스레 들끓었다.
“그게 어때서요?〈개화〉는 옛날 일이에요. 실바누스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새로운 전통이 생겼어요.”
“그래서 다음 대 황위는 황녀 전하께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공작께 나쁜 일은 아닐 텐데요. 이대로 아리스티네 언니가 황좌를 차지하면 곤란해지지 않 으신가요?”
프란첼린 공작이 레타나시아를 보았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아리스티네가 황제가 되면 곧 바로 자신을 축출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귀족들조차 폐주가 아리 스티네 황녀를 유폐하고 학대했 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나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순번을 정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명백히 아리스티네에게 줄을 대려는 행위였다.
민심은 물론,귀족들의 지지 역시 아리스티네를 향해 있다는.
“……그래서 이대로 옹크린 채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겠다고요?”
레타나시아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아리스티네 언니는 부황 폐하를 유폐하는 것으로 끝냈어요. 언니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이지만,결국 혈육의 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요.”
“제게도 별다른 처벌이 내려오지 않았죠. 곧 조처가 취해질 거 라고 하지만,부황보다야 덜하겠죠
레타나시아가 프란첼린 공작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하지만 혈육도 아닌 공작께는 어떨까요.”
프란첼린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레타나시아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어차피 그가 고를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윽고 그의 입이 달싹였다.
‘됐다!’
레타나시아는 제 의도가 성공 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레타나시아 황녀,당신은 군주의 재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본인의 능력에 대한 객관화도 되어 있지 않죠.”
“뭐?”
“당신 같은 사람이 실바누스를 이끌면 실정을 저지를 게 뻔합니다.”
“고,공작……”
레타나시아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란첼린 공작은 폐주 알피어스가 실정을 저지르는 것을 앞 장서서 돕지 않았던가.
“인정하십시오,당신은 아리스티네 전하와 태생부터 다르다는 것을. 인품도,재능도,능력도. 그 무엇 하나 황제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레타나시아는 입을 벌렸다.
프란첼린 공작의 말은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 있는 시꺼먼 감정을 자극했다.
그녀가 평생을 시달렸던,열등감과 패배감.
“간신 주제에! 감히 누구더러 자질 운운하는 것이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레 타나시아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레타나시아를 쳐다봤다.
체통을 잃고 꽥꽥 소리 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남아 있던 일말의 정마저 뚝 떨어졌다.
프란첼린 공작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레타나시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레타나시아가 아닌,다른 사람에게.
레타나시아의 앞에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깊은 절이었다.
“아리스티네 폐하.”
“나는 대관식을 치른 적이 없는데.”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타나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것을 치르지 않아도 폐 하께선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신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당한 황위 계승자가 아니십니까.”
“공작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윗물이 흐리면 어찌 아랫물이 맑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제라도 진정한 군주를 모실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뿐입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폐하를 보좌할 것입니다.”
레타나시아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프란첼린 공작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마저 이렇게 구는 것을 보면,정말 실바누스의 전부가 아리스티네의 손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타나시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캄프리 후작,마레일 백작,루아튼 백작…….
알피어스의 총애를 한 몸에 받 으며 고개 빳밧이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아리스티네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폐하,이리 성장하신 모습을 보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폐하.”
그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태세 전환도 이런 태세 전환이 없었다.
‘내가 부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다음 대 황제로 확실시 되었을 때조차 저러지 않았는 데……!’
레타나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피 끓는 기분으로 그녀가 오열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이미 아리스티네는 세상의 주역이었다.
부황은 아리스티네를 교육해야 한다며 자신에게는 얼굴도 제대로 비쳐 주지 않았다.
부황과 아리스티네,둘만이 있는 방 안에서 아리스티네는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아리스티네가 밉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나야말로……!’
“레타나시아.”
차분한 부름에 레타나시아가 핫,하고 정신을 차렸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어.”
아리스티네는 언제나 그렇듯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폐주를 가둬 두기만 한 것은 내 아이를 생각해서야. 태교에 좋지 않으니까.”
레타나시아가 증오하는,저 여 유로운 미소.
저 얼굴이 절박함으로 일그러 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태교가 필요 없어지겠지?”
그러나 레타나시아는 아리스티 네의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삭이는 듯한,나직한 목소리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레타나시아는 위압을 느꼈다.
곧,곧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죽이라 명할 것이다.
적어도 그 에 준하는 명을 내릴 것이다.
이제 자신은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아리스티네의 복수에 고통스러워하리라.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생긋 웃은 후 레타나시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왜……”
겨우겨우 의문을 더듬었을 때 아리스티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주의라서.”
쿠웅.
이건 레타나시아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평생 아리스티네를 경계하며,그녀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길,그래서 아리스티네가 자신 앞에 굴복하길 바랐던 삶이었다.
그 삶을 부정당했다.
아리스티네가 세상의 중심인 것에 반발하며 증오를 품었으면 서,레타나시아의 중심은 어느새 아리스티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풀썩.
레타니사아는 종잇장처럼 나풀 나풀하다 허물어졌다.
아리스티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정말 이대로 둘 거야?”
“어차피 라우넬 오라버니가 다 알아서 처리할 거야. 내가 더 이상 나설 일이 아니야. 그럼 내 영향력만 강해져.”
아리스티네의 답에 타르칸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리네, 혹시 황제가 되고 싶은데 나 때문에 돌아가려 하는 거라면一.”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대번에 정색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자 타르칸은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딱 잘라 아니라고 하니 기분이 참….
“부왕 폐하 보고 싶어서 돌아가는 건데?”
“……부왕 폐하를 말이지.”
“응,리트텐이랑 무칼리 경이랑 우미루 경이랑 아세나랑……. 아, 자칼렌 경이랑 듀란테 경도.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다들 보고 싶어.”
왜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단 말인가.
타르칸의 심기가 대번에 불편 해졌다.
“……나는.”
“응? 넌 나랑 있잖아?”
대체 무슨 소리냐는 둣 아리스 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타르칸은 획 고개를 돌렸다.
“됐다.”
명백히 삐진 모습에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너였지.”
그 한 마디에 굳었던 타르칸의 입매가 풀렸다. 눈가가 발갛게 물든다.
좋았다. 다 좋다.
그런데.
‘……왜 내 가슴에 손을 얹는 거지.’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운운하는 데 왜 가슴을 만진단 말인가.
타르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한편,방에 돌아가면 푸시 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타르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아리스티네는 생글생글 웃 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一 예니카랑 스탈리나까지 보고 싶다니까?”
“걔네들이?”
“응,우리 집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우리 집.
그 말에 타르칸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리스티네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집이라고 느끼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야.”
콩,이마가 맞닿았다.
“칸,너는 내게 편하고 돌아가고 싶고 그리운 집을 만들어 준 사람이야.”
“리네……”
타르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스쳤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