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57화 (157/183)

157화

“자,거기까지.”

라우넬리안의 목소리가 두 사 람의 입술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정하게 풀려 있던 타르칸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지며 방해꾼을 노려보았다.

물론 라우넬리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아리스티네에게 다가갔다.

“리네,난 네가 편하고 행복한 게 중요해.”

“오라버니.”

“네가 실바누스에 있었으면 좋겠지만,아이루고가 편하다면 반대하지 않아.”

아리스티네는 대답 없이 라우넬리안을 바라보았다.

크리세아 궁에서〈개화〉한 후 로,라우넬리안은 계속 아리스티네에게 대관식을 치르자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어릴 적 상처 때문에 정당한 너의 권리를 포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지한 보랏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리네,네가 원하는 게 뭐니?”

그에 대한 대답은 예전에 나와 있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

실바누스를 벗어나 아이루고로 향하면서,아리스티네는 돈을 많이 벌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목표는 바뀌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아리스티네는 홀로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곳을 벗어나 타르칸과 함께 편하고 안전한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막연한 마음이었다.

처음으로 겪게 된 바깥세상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 고민해 볼 시간은 없었다.

“리네,사람은 많은 것을 겪으면 또 변하기 마련이야. 생각지 도 못한 것을 좋아하게 되고,또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걸 싫어하 게 되기도 하지.”

라우넬리안은 성년이 한참이나 남은 어린 동생을 바라보듯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너 자신도 몰랐던 너를 발견하게 되는 거야.”

나 자신도 몰랐던 나.

그 비좁은 세계를 빠져나오며 아리스티네는 자기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발견했다.

스콘을 좋아하고,수다 멸기를 좋아하고,햇빛 아래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고, 카드 게임을 좋아하고,서류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사랑을 한다.

아리스티네는 제가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면서도,남편은 됐고 돈이나 벌겠다고 생각했다.

“네 목표가 과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정한 것인지,아니면 정말로 네가 좋아하고 원하 는 것인지 생각해 보렴.”

라우넬리안이 아리스티네의 이마에 손가락을 콩, 하고 튕겼다.

“나는 네가 결정할 때까지 황 좌를 비워 둘 거야.”

아리스티네는 자신과 똑같은 빛깔을 하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에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라버니는 욕심도 없으세요?”

불쑥 질문이 나왔다.

“라우넬 오라버니께서는 황제가 되기 위해 이 많은 일을 계획하고 행하셨잖아요.”

반정이 이렇게 원활했던 것은 아리스티네가〈개화〉한 덕도 있지만,라우넬리안이 이미 반정의 마지막 단계를 앞둔 상태까지 진행해 둔 덕도 컸다.

눈을 휘둥그레 떴던 라우넬리안이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잘못 알고 있구나,리네.”

웃음기를 머금은 채,라우넬리안이 귀엽다는 듯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 었다.

“나는 황제가 되기 위해 이 많 은 일을 한 게 아니야.”

길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은발을 붙잡아 라우넬리안이 입을 맞추었다.

“널 구하고 싶어서 그랬을 뿐.”

“절 구하고 싶어서요?”

“널 구하려면 황제의 자리가 필요했으니까.”

황제에게 학대당하는 아리스티네를 구하려면 황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정략혼을 깨기 위해서도 황제가 되었어야 했고.

“오라버니께서 원하는 게 그거예요? 진짜로 좋아하고 원하는 거요.”

라우넬리안 역시 과거 학대당 하던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지켜보았어야만 했다는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네,내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 난 너의 행복을 원해. 그것 보다 내가 더 바라는 것은 없어.”

라우넬리안의 입술이 아리스티네의 이마에 닿았다.

“어쨌든 천천히 생각해 보렴. 임신 기간 동안은 실바누스에 있어야하니까.”

그때까지 근질근질한 것을 참고 남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 던 타르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헤어질 때니 봐준다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는데,뭐라고?

라우넬리안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타르칸을 돌아보았다.

“크리세아꽃은 황궁의 크리세아 정원에서만 자라니까. 왜 매 번 꽃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고 보니 크리세아꽃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도 꼭 활짝 핀 꽃을 골라서 가져오라고 했다.

씨앗도,덜 자란 것도 안 된다고 했다.

‘그게 그 때문이었나.’

아니,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출산할 때까지 계속 실 바누스에 있어야 하는 건가?”

“당연하지.”

그 말에 타르칸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아리스티네는 그렇다 쳐도 타르칸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다.

할 일을 마무리 짓고 온 것도 아니고,위임하고 온 것도 아니다.

전사들이 왕도로 귀환하기도 전에 무작정 실바누스로 왔으니 마수 토벌의 사후 처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임신한 아내가 도망인지 납치 인지 모를 것을 당했다는 소식에 눈이 돌아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곁에 없으면 누 가 임신한 아내 곁에 있겠어.’

내가 내 아내의 수발을 들어야 해!

아내 노예는 고민을 끝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라우넬리 안은 웃으며 타르칸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까지 자리를 비울 수 없 으니 넌 아이루고로 돌아가야지?”

“내 자리는 내 아내 옆인데.”

언제 사이가 좋았냐는 듯 두 남자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네는 두 사람을 바라 보다가 타르칸의 팔을 잡아끌었다.

“괜찮아. 이제 크리세아꽃은 필 요 없으니까.”

“필요 없다니?”

“몸은 괜찮은 건가?”

두 남자의 질문에 아리스티네 가 씨익 웃으며 타르칸을 꼬옥 끌어안았다.

“내 꽃이 옆에 있으니까.”

아내의 대담한 손길에 타르칸 은 얼굴을 붉혔고,라우넬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라우넬리안이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주 오래전에 잊힌 이야기였으니까.

〈개화〉하는 황제가 나오지 않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유실되어도 어 쩔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의도적으 로 지워진 이야기였다.

실바누스의 치부와도 관련되어 있으니까.

“제국의 초창기에는 〈개화〉한 황제가 꽤 많았지. 근데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줄어들더니 더 이상 각성하지 않았어.”

아리스티네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신혈이 약해져서? 그렇다기엔 여전히 실바누 스 황가의 핏줄은 능력을 타고 나지. 아직도 금발과 은발밖에 태어나지 않아.”

신혈이 약해진 것이라면 외적인 부분에서도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금발과 은발 외에 다른 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겠지.”

〈개화〉상태였을 때 아리스티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득히 먼 옛날의 진실까지도.

“아주 흔한 이야기야. 배반과 질투의 역사니까.”

* * *

제국이 아직 왕국이었을 때, 황가가 아직 왕가였을 때.

전 대륙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 왔다.

논밭과 강물이 마르고 곡식은 타들어 가고 짐승은 헐떡이며 죽어 갔다.

살기 위해 온갖 범죄가 일어났다. 인륜을 저버리고 천륜을 어겼다.

대륙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이 라 기록될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빛은 있었다.

가뭄에 고통스러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준 왕이 있었다.

제 입에 들어가는 곡식과 물, 입을 옷,심지어는 황금으로 된 왕가의 문장까지도.

모든 것을 잃고 가장 낮은 곳에 떨어진 왕의 곁에는 단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왕의 호위.

초라하게 죽어 가는 왕의 앞에 신이 내려왔다.

[수많은 이들이 제 백성을 평안케 할 책임을 지고 권리를 누 렸다.

그러나 이 혼란한 세상에서 그 책임과 도리를 다하는 자는 너 뿐이로구나.]

왕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

왕은 제왕의 눈을 가져 모든 진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왕은 걱정했다.

만약 자신이 이 막대한 힘에 눈이 어두워져 변심하면 어떻게 되는가.

제 자식과 자식의 자식은 한결 같이 선정을 펼칠 수 있을까.

왕의 염려에 신이 웃었다.

[네 곁에는 충신이 있지 않느냐.]

올바른 곳에 가도록 보좌하고, 그릇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간언할 자.

왕의 몸뿐만이 아니라,마음까지 굳건히 지키는 호위.

용맹하고 강인하고 무자비한 왕의 기사.

신의 힘이 왕의 호위에게 흘러 들어 갔다.

신은 비를 내리며 명했다.

이 땅에 폭정을 끝내라고.

현명한 왕은 길을 인도했고, 그 길을 막는 자들은 기사의 검 앞에 무너져 내렸다.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왕은 황제가 되었다.

언제나 왕의 곁에 있었던 기사는 이제 황제의 곁에 있었다.

그렇게 몇 대가 흐르고,제왕의 눈을 가진 황제는 드넓은 대 륙의 중앙 평원에서 대마수가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영역 안에서 홀로 살던 다른 대마수와 다르게 마수를 규합하고 통솔하는 대마수였다.

황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무리 강인한 황제의 군대라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마수들이 대마수의 아래에 모일 것 이고,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 으킬지는 분명했으니까.

황제는 기사에게 대마수를 토 벌할 것을 명했다.

기사는 황제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황제를 설득했다.

황제의 피에 흐르는 신의 축복이 깨어나기 위해선 기사의 힘이 필요했다.

기사가 떨어져 있는 동안 황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황제의 결심을 돌릴 순 없었다.

황제는 이미 기사가 떠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도.

기사는 황제를 염려했지만,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기사는 떠나기 전,황궁의 보잘것없는 들꽃에 자신의 힘을 깃들게 했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 힘이 황제의 피에 깃든 신의 축복을 깨우길 바라며.

그렇게 기사는 황제의 곁을 떠나 평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기사가 강력한 황제의 군대를 이끌고 자리를 비우는 동안,황제의 동생이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평원에서 싸우는 군대 에게 보내던 지원을 모조리 끊었다.

황제는 죽어 가며 미소 지었다.

[나는 기사를 보내는 순간 결심을 마쳤다.

내 죽음으로 대륙 을 구원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다만 먼 곳에서 걱정으로 애태울 나의 기사가 염려되는구나.

아우여,너의 배반과 질투로 인해 이 땅에 제왕의 눈은 감겨 꽃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의 축복은 이어지고,신의 힘은 끊기지 않는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운명처럼 다시 꽃을 피우리라.]

그리고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꽃이 피었다.

* * *

“어쩜,너무 낭만적이야.”

“이런 게 바로 운명이구나.”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감탄을 홀렸다.

“그런데 그럼 아이루고와 실바누스가 원래는 하나였다는 뜻인가?”

“그런데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졌다니……”

황제를 배신한 동생이 황위에 올랐으니 당연히 황제의 군대는 새 황제에게 증오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군대의 지원을 끊은 것은 평원에서 고립되어 죽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증오심은 더 더욱 강해졌다.

군대가 돌아왔으면 반역한 동생을 처단하려 했을 것이니 새 황제는 그들이 죽길 바랐을 것 이다.

그러나 기사가 이끄는 군대는 대마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살아남았고,그들이 모여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평원에 가득한 마수들로 인해 두 국가는 단절된 채 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럼 여태껏 〈개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 이 때문인가.”

“지난 세월 동안 제왕안을 타 고난 황제는 있지 않았나. 그게 진짜 제왕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개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었다니.”

“제왕안은 제약이 꽤 많지 않았소. 그런 제약이 있는데 ‘제왕’ 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부터가 이상했소.”

비밀스러운 사교 클럽에서 신 문을 살피던 귀족들이 이야기를나눴다.

이들은〈개화〉와 제왕안에 대 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최고위 귀족들이 었다.

“자,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소?”

“이 정도까지 나왔다면 길은 하나지.”

“하지만 황제께서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네.”

“글쎄,그건 지켜봐야지.”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에 불이 붙었다.

창가에 서 있던 귀족은 밖을 쳐다보았다.

중앙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화제는 단 하나였다.

“난 두 분 결혼식 사진을 보고 서도 운명이구나, 생각했다니까?”

“맞아,그게 아니면 이렇게 잘 어울릴 리가 없지.”

“황녀님,아니,황제 폐하께선 신이 내린 제왕이라니…. 이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야.”

사람들은 이미 아리스티네를 황제라고 부르며 칭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분을 폐주가 학대하고 감금했다고?”

“왜 안 죽이고 살려 놓는 거야! 그런 놈은 불에 태워야 해!”

“그러고 보니 들었어? 레타나시아 황녀님 말이야.”

“황녀님이라는 말도 아까워. 폐하께서 유폐당했던 게 그 마녀 때문이라면서?”

“정말 여태까지 그렇게 봉사하며 국민들 앞에 섰던 게 다 연기였다니…”

“소름 끼친다니까?”

“언니를 유폐시킨 주제에 왜 아직도 황궁에 있어?”

“폐주와 함께 화형시켜야 해!”

흥분한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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