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레타나시아를 벌하라.
폐주를 죽여라.
그리고 새로운 황제 폐하의 존 안을 뵙고 싶다.
신의 선택을 받은 황제 폐하께 서 우리를 이끄시리라.
대관식을 서둘러 치러라!
광장을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 리가 파도가 되어 제국을 휩쓸었다.
파도는 황궁 깊숙한 곳을 해일 처럼 휩쓸었다.
어둠이 좀먹은 먼지 구덩이에 갇혀 있던 황제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며 절망했고,황녀궁 에 칩거 중인 레타나시아는 귀 를 틀어막으며 목에 피가 나도 록 오열했다.
자신들을 저주하는 목소리,그 렇게나 증오했던 아리스티네를 찬미하는 목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그 파도는 실바누스를 지나 주변국은 물론,멀리 떨어진 나라 -아이루고에까지 닿았다.
Chapter 38. 오구구,내 째끼
“뭐라고? 황제?”
아이루고 왕후의 손에서 보고 서가 파사삭 구겨졌다.
그녀의 얼굴은 그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힘은 타르칸 쪽으로 완전히 기운다.
황제의 부군이 된 타르칸이 아 이루고의 왕이 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서,힘의 역학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가 되리라.
“회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를 썼어야 했는데.”
다른 것도 아닌,아이루고 왕의 첫 번째 손주다.
첫 왕손을 잉태해 후사 문제가 없는 쪽이 왕위 다툼에서 훨씬 유리한 건 당연한 이치.
게다가 타르칸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아리스티네 왕자비가 아이루고를 떠난 뒤였으니까요.”
하미르의 느긋한 말에 왕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언제나 여유로운 아들의 태도가 듬직하고 기꺼웠지만 지금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렇게 남 일처럼 말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의심되는 게 있었다.
“하미르,정말로 그전에 아리스티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몰랐 느냐.”
“알았으면 제가 먼저 손을 썼 겠지요.”
하미르가 눈매를 휘며 산뜻하게 답했다. 일말의 망설임이나 주저도 없이.
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미르를 바라보았다.
임신 극초기,아리스티네가 쓰러지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는데 그때 하미르가 타르칸의 궁에 발걸음 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갔다고 해서 거기 정보를 다 아는 건 아니지.’
왕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심 을 접었다.
“그래요,내 아드님이 알았으면 분명 그랬겠지요.”
“그런데…… 무슨 속셈인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는 눈치람니다.”
스키엘라 공작의 말에 왕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황제위를 거부하다니, 제정신인가?”
“그래서 아무래도 아이루고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폐하의 눈치도 그렇 고……”
아이루고의 왕,네프테르는 최 근 심기가 대단히 불편했다.
오죽하면 귀족들이 제 이권 주장에 관해서도 한발 물러난 태 도를 보이며 눈치를 살필 정도 였다.
네프테르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정확히 아리스티네가 실바누스로 간 후부터였다.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시기 가 공교롭게 맞아떨어지니 아리스티네의 부재 때문에 저러나 싶었다.
이후 아리스티네가 회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역 시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네프테르의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무려 콧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말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서 콧노 래라니. 소문이 와전된 게 분명해’
네프테르의 성정을 아는 사람 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라리 아이루고로 돌아오는 게 잘됐습니다. 실바누스에 있으니 직접적으로 손을 쓰기 힘들었지 않습니까.”
왕후의 말에 하미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후,아리스티네 왕자비의 신 변에 문제가 생기면 국내는 물 론이고 실바누스의一.”
“그 정도는 압니다. 설마 내가 그런 어리석은 수를 쓰겠습니 까.”
“일단 후계가 사라지는 게 중 요하지요.”
스키엘라 공작이 왕후의 말을 받았다.
“예,가장 큰 걸림돌은 그것 아닙니까. 복중 태아가 잘못되는 일은 꽤 흔한 일이지요.”
왕후가 짙게 미소 지었다.
“왕손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폐하의 신뢰도 땅에 떨어지겠지요.”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왕후와 스키엘라 공작을 보며 하미르는 생각에 잠겼다.
* * *
“흐응,흥,흠〜.”
나직한 음색이 작게 울려 퍼졌다.
궁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어쩌면 좋을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그 네프테르 왕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첫날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제 귀를 의심했고,둘째 날은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서 벌벌 떨었고,셋째 날인 오늘은…….
‘폐,폐하께 문제가 생겼나?’
‘저번에 쓰러지셨을 때 혹 시……’
차마 머리를 부딪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네프테르가 보이는 이상 행동(?)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네프테르가 왕자였던 시절부터 그를 모신 시종장이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어흠,딱히 그런 건 아니다.”
“그럼 기대되십니까.”
“어허,그런 게 아니래도.”
“예,알겠습니다.”
시종장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술잔과 술병을 놓았다.
술을 따르려는데,네프테르가 고개를 저 었다.
“되었다.”
“예?”
술을 즐기는 네프테르가 마다 하는 것은 처음이라,시종장은 당황했다.
“간만에 만나는데 술 냄새를 풍기며 볼 순 없지. 그것도 복중에 내 손주가 있는데.”
좋지도,기대되지도 않는다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엔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군주는 무치. 시종장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조용히 술을 물렸다.
무릇 전사라면 검만큼 술을 잘 다뤄야 하고,아이루고의 사내라면 모두 전사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네프테르가 술을 자제한다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차라리 콧노래를 불렀다는 말을 믿겠다고 하겠군.’
시종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궁 인에게 트레이를 넘겼다.
“그런데 왜 안 오지? 포털을 타고 오니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텐데.”
“아직 출발을 하지 않으셨겠지요. 그쪽 사정도 복잡하니 정리할 게 많을 겁니다.”
“그래도 오늘 오후에 출발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12시 7분입니다,폐 하.”
“12시가 지났으면 오후 아니더냐.”
“하지만 보통 오후라고 하면……”
“그럼 지금이 오전이야?!”
버럭 성을 내는 네프테르의 모습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알아보겠습니다.”
그제야 네프테르가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종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런 일이 오늘 아침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하……. 비전하,제발 빨리 와주세요.’
시종장은 간절하게 빌었다.
* * *
“리네.”
귀족적이고 우아한 라우넬리안 의 얼굴이 지금은 풀 죽은 강아 지처럼 시무룩했다.
“진짜 보내기 싫은데. 내가 왜 내 동생이랑 떨어져 있어야 해.”
그가 아리스티네를 꼬옥 끌어안고 뺨을 비비며 말했다.
“그냥 오빠도 같이 갈까? 거기 방 많잖아.”
폐주의 명으로 북부에 간 후로 만나지 못했던 어린 동생을 이제야 만났다.
둘은 생이별한 이산가족이었다.
헤어져 있던 긴 시간만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했다.
“오라버니……”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타르칸이 재빨리 끼 어들었다.
“형님께서 지내실 방은 없습니다. 다 쓰임새가 있는 방이라서요.”
“아아,생각보다 궁이 좁구나? 남는 방도 없다니. 그런 비좁고 초라한 곳에 내 동생을 데려가겠다는 거?”
“이런,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남는 방이 있어도 형님께 드릴 방은 없다는 뜻입니다.”
으르릉!
사람들이 싸우는 건데 왜인지 맹수의 목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리스티네는 어젯밤 타르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님께서도 이제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셔야지. 우리가 곁에 있으면 그러기 힘들 거야.〉
돌려서 말했지만,아리스티네를 신경 쓰느라 다른 곳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래,오라버니도 결혼하셔야 지. 원치 않으면 안 하셔도 되지만,그래도 마음이 맞는 사람과 교제는 해 보셨으면 좋겠어.’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결혼하여 그와 함께 살고,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상상도 못 했던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까지.
라우넬리안도 그런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 생각으로 아리스티네는 아쉬운 마음을 떨쳐 냈다.
“다시 못 볼 것도 아닌데요. 예전이랑은 다르잖아요.”
“……그래.”
라우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고 싶다고 해도 지금 통치자가 없는 실바누스를 비워 둘 순 없었다.
“또 보자,내 동생.”
라우넬리안이 마지막으로 아리스티네를 꽉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했다.
그가 물러나자 아리스티네와 타르칸,그리고 아이루고 궁인들이 서 있던 거대한 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밝디밝은 빛이 아리스티네의 윤곽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라우넬리안은 조금이라도 동생의 모습을 더 보고자 끝의 끝까지 눈을 감지 않으며 소리쳤다.
“리네,나는 네 선택을 기다리며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이제는 아리스티네의 윤곽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희미했다.
밝은 빛이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타르칸,내 동생이랑 내 조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죽는다! 네가 지켜!”
지킬 수 있을 거라고,믿는다.
꾹,라우넬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빛이 잦아들기를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할 일이 많았다.
라우넬리안은 기다리고 있는 각 계층의 고위 관료들과 회동을 가지고,이번 반정에 손을 보탠 고위 귀족들과 따로 저녁 만찬을 가졌다.
말이 식사지,그건 정치와 사업의 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여러 사안의 아우트라인을 잡았으며 승인할 것을 승인했다.
빠르게 대관식을 준비하려면 해야 할 것이 많았다.
눈의 피로를 느끼고 미간을 문 지른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이미 달이 하늘의 정중앙에 떠 있었다.
적막했다.
곁의 보좌들이 벌건 눈을 애써 비비며 서류를 보고 정리하고 있었다.
이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라우넬리안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라우넬리안은 쓸쓸함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홀로 저 멀고 차가운 북부로 뚝 떨어졌을 때 보다도 더.
유폐당한 아리스티네를 구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었다가 폐주의 분노를 샀다.
염동력이라는 하찮은 능력을 가진 주제에 자신의 명에 정면으로 맞선 거냐며 북부로 보내졌다.
아리스티네가 각성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뒤로,폐주는 오누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실망감과 분노도 한몫했을 테지만,둘을 경쟁자로 여긴 레타나시아의 속삭임도 한몫했을 것 이다.
라우넬리안은 황자의 신분으로 겪지 않을 일을 치렀지만,그래 도 괜찮았다.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혼자 갇혀 있을 동생에게 밖에 는 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 다는 걸 알려 주었으니까.
단 한 번도 쓸쓸하지 않았다.
언젠가 힘을 길러 다시 돌아가면 동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동생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제 품을 떠났다.
대견하면서도,처음으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만 하지.”
그 말에 보좌들은 살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라우넬리안은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에서 나왔다.
황제의 집무실은 비워 두고 다
른 곳을 쓰고 있기에 처소까지 가는 길은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다른 곳 을 향했다.
크리세아 궁.
폐주를 몰아낸 뒤,아리스티네 는 이곳에서 지냈다.
지금 아리스티네의 흔적과 향 기가 가장 짙게 남은 곳이었다.
달빛 아래 만발한 작은 꽃을 보며 라우넬리안은 그곳에 서 있던 동생을 떠올렸다. 발치에 황금빛 꽃이 물결을 이루고,제가 다가가면 천천히 돌아보던 모습.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얼굴.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았다.
라우넬리안에겐 그 모습이 천 사처럼 보였다.
잠시 정원을 둘러보던 그가 아 리스티네의 침실로 다가갔다.
동생이 사용했던 가구를 하나 하나 천천히 쓸어 보며 동생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침대로 다가갔다.
〈개화〉한 후 컨디션이 눈에 띄 게 좋아지긴 했지만,아무래도 아리스티네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장소였다.
침대를 가져와야 했다고 매일 중얼거리던 궁인들이 결국 포털 을 이용해 아이루고에서 공수해 온 것이었다.
돌아가면 또 똑같은 게 있으니 괜찮다고 하며 두고 갔다.
이 방면의 프로인 궁인들이 침대가 부서질 때를 대비해서 처음부터 두 개를 만든 것이었다.
설마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한 라우넬리안은 궁인들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그 정도면 아리스티네를 불편 없이 모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 아리스티네가 누 웠던 자리를 쓸어 보던 라우넬 리안이 멈칫했다.
‘응? 여기 튀어나온 건 뭐지?’
왠지 누르게끔 생겼다.
라우넬리안은 별생각 없이 머리맡의 튀어나온 부분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
라우넬리안의 몸이 들썩였다.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뭐,뭐야?”
그 와중에도 몸이 들썩들썩 위로 좌로 우로 움직였다.
그가 앉아 있는 침대가 계속 움직이니 몸이 함께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라우넬리안은 분명 영민한 머리를 가졌지만,이 상식을 초월 하는 사건에 이해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라우넬리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애써 부정해 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침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짜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묘한 리듬을 타면서.
“이런 미친……!”
라우넬리안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동생이 품을 떠났다면서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호호호,정갈하게 웃던 궁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걸 왜 정갈하다고 생각했을 까.
돌이켜보면 그 웃음은 ‘호호호’ 가 아니라 ‘응힉힉’이었는데.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